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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70)화 (70/449)

제70화

서풍엽은 일단 순서대로 장신성을 찾아가 이번에 맡은 공무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물러 나왔다. 내원의 하인이 그를 상야 부인에게 가는 길로 안내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신성은 구염락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이는 그의 신분을 눈치채고 일부러 모른 척한 것이었다.

지금 장신성에게 필요한 건 충왕부의 힘이었다. 그는 이미 장서영을 초혜전에 들이기 위해 손을 써둔 상태였고, 이제 누군가 앞장서 그의 계획을 시작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서풍엽이 제격이었다.

이날 장신성이 태자를 배신하고 모르는 척 구염락을 응접한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그는 서풍엽이 자신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하루빨리 장서영의 일에 나서주기를 바랐다.

딸이 초혜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장신성이 차를 들었다. 설령 태자의 눈에 들지 못한다 해도 초혜전에는 수많은 귀족 자제들이 있었다. 권 씨 가문의 서함 또한 나쁘지 않은 사윗감이었다.

내원의 삼중문이 차례로 열렸다. 문을 지키는 나이 든 마마들이 서풍엽을 알아보고 친근하게 웃어 보였다.

“세자님, 오셨습니까.”

“아가씨께서는 어제 세자님을 그리워하시며 종일 세자님의 이야기만 하셨답니다.”

서풍엽이 흥미를 보였다.

“뭐라고 하던가요?”

“노비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아가씨가 일러바치지 말라며 함구한 일은 많았다. 공을 차다가 넘어진 일도, 몰래 빙과(冰果)를 먹다가 밤새도록 끙끙 앓았던 일도, 나무에 올라 꽃을 따다가 떨어진 일도 발설해서는 안 됐다. 아가씨는 마치 지난 몇 년 동안 부리지 않은 말썽을 한꺼번에 저지르려는 사람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마마들은 은연중에 웃음을 터뜨리면서, 후에 세자가 장서열을 아내로 맞으면 꽤나 골머리를 앓을 거라는 생각에 동정을 금치 못했다.

서풍엽과 이야기를 나누는 마마들을 쳐다보던 구염락은 ‘난 열셋째라고 하는데, 혹시 서열 누님이 내 이야기는 하지 않더냐.’고 무척이나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서풍엽이 일러준 말을 떠올리며 기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만 볼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서풍엽이 미소를 머금었다.

“마마들께서 또 저를 놀리시는군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중에 후한 선물을 보내드리지요.”

“그럼 소인들은 미리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후원으로 들어서는 서풍엽에게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입가에 절로 미소를 띠며 그가 막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그보다 먼저 앞으로 뛰어나갔다.

“누님! 서열 누님!”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은 장서열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미친 듯이 그녀를 덮친 그림자가 단숨에 그녀를 껴안고 무척이나 기쁜 듯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환하고 명랑한 웃음은 푸른 하늘처럼 청량하고 한여름의 물결처럼 뜨거웠다.

“드디어 만났네! 서열 누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초 마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가씨는 올해 열 살이었다. 아직은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렇다고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이에게 안기는 걸 마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낯빛을 굳히며 앞으로 나가던 초 마마는 자신을 저지하는 세자의 눈빛에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세자는 저걸 보고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단 말인가?’

장서열이 황급히 구염락을 멈춰 세웠다.

“그만해, 어지럽단 말이야! 어떻게 나온 거야? 풍엽, 왜 그를 데리고 나왔어요?”

자리에 똑바로 선 장서열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너무 놀라 간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구염락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조금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서열 누님.”

“응.”

구염락이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웃는 것 말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 모습에 장서열은 할 말을 잃었다.

‘이 바보 같은 모습은 대체 뭐야.’

“왜 그를 데리고 나왔어요?”

곁에서 듣고 있던 초 마마는 그제야 상대가 아가씨와 아는 사이이며 세자가 데리고 온 자라는 것을 눈치챘다. 세자가 개의치 않는 이상 자신이 나설 수는 없었다. 초 마마는 농교에게 눈짓으로 아가씨와 놀던 이들을 물리라 명한 뒤 입을 열었다.

“세자께서 오셨군요. 아가씨께서 많이 그리워하셨습니다. 아가씨는 방금 제기차기를 하시던 중이었답니다. 노비는 아가씨를 모시고 가서 환복을 도와드린 뒤 부인의 거처에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부러운 눈길로 구염락을 쳐다보던 서풍엽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초 마마는 자신의 의중을 깨닫고 서열을 상대의 손에서 빼내준 것이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무조건 그녀에게 붙어 있어야 하며, 그녀의 시선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초 마마가 몇 번이나 세게 밀치고 아무리 눈도 부라려도 그는 끝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장서열 역시 구염락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열셋째, 장난 그만하고 이 손 놔.”

전생에서 그는 금용에게조차 이렇게 들러붙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왜 이러는 걸까? 설마…….’

장서열이 문득 고개를 숙인 그를 자세히 바라보며 물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거야?”

구염락이 코앞에 자리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꿈이 아니었다.

“누님이 보고 싶었어요.”

서풍엽은 당장이라도 구염락을 끌어내 주먹을 날리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건 자신이 해야 할 말이었다.

“됐다. 그와 함께 있어. 난 부인께 인사드리러 갈 테니 이따 그쪽으로 데리고 와.”

그 말은 장서열에게도, 서풍엽에게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초 마마에게는 달랐다. 얼굴을 굳힌 그녀가 아가씨의 예비 부군을 향해 소리 높여 말했다.

“세자, 같이 오신 친구분을 데리고 가 주시지요. 인사시키지 않으면 부인께서 언짢아하실지도 모릅니다.”

그제야 서풍엽도 정신이 들었다. 구염락에게 양보하는 것은 그에게 습관과도 같았다. 서풍엽은 지금 이곳이 초혜전이 아니며, 구염락 역시 더는 장서열의 반독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늘 구염락은 좌상부에 데리고 온 자신의 친구였다.

“나랑 가자. 안 그러면 다시는 여기 올 생각하지 마.”

즉시 손을 뗀 구염락이 서풍엽의 뒤에 섰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장서열을 향해 있었다. 흡사 버림받아 떨고 있는 아기 고양이처럼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초 마마는 얼른 아가씨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장서열은 고개를 돌려 서풍엽을 향해 익살맞은 표정을 지어보이고 얼른 정면을 보았다. 서풍엽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구염락을 쳐다보는 그의 눈길은 한결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가자.”

“난… 여기서 누님을 기다리고 싶어요.”

구염락은 제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풍엽은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곁에 있던 시종에게 명했다.

“그가 함부로 자리를 옮기지 않게 잘 지켜라.”

그리고는 다시 구염락을 향해 말했다.

“상야 부인께 문안 인사를 드린 후 다시 데리러 올 테니 꼼짝 말고 여기 있거라.”

얼른 고개를 끄덕인 구염락은 장서열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바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초 마마는 언짢은 얼굴로 아가씨를 씻기고 다시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아가씨, 부인께서 엄하게 단속하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자중하셔야죠. 아가씨는 이제 어리지 않으니 사내와 친밀한 접촉은 피하셔야 해요. 설령 세자께서 아무 말 안 하신다 해도 말이에요. 남들에게 의심받을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요?”

장서열이 겸허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며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대답했다.

“나도 그가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어.”

아가씨는 자신의 의중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그분이 나타난 게 문제가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가씨를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는 게 문제인 겁니다. 큰 결례를 범한 거라고요.”

“아직 어려서 철이 덜 들었을 뿐이야.”

“노비도 알고 있지요. 하지만 세자 앞에서까지 그러다니요? 세자께서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겠어요?”

장서열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앞으로 주의할게.”

초 마마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장서열의 머리를 정리하며 떠보듯 말했다.

“사실… 노비가 보기에는 그 아이도 어리지 않아요. 여덟 살은 족히 되어 보이던 걸요. 어린 나이가 아니죠. 아가씨는 사람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아가씨는 상부의 적녀이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몸이라 가까이 하고 싶어 안달인 사람이 수두룩하다고요.”

그 말에 장서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초 마마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 그는 아직 어려서 정말 아무 것도 몰라.”

“노비가 볼 때는 사연이 많은 아이 같았어요.”

초 마마가 그녀의 머리에 비단꽃 장식을 꽂았다.

“이러면 세자께서 눈부셔할 거예요.”

장서열이 작은 얼굴을 장난스레 일그러뜨렸다.

“나야말로 아직 어린걸?”

“맞아요, 맞아. 우리 아가씨는 아직 어리죠.”

연보라색 치마로 갈아입은 후 어깨에 연한 자색 겉옷을 걸친 장서열이 눈처럼 새하얀 목에 작고 정교한 분홍빛 동주(东珠)를 걸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전신에 기품을 발산하며 고귀한 소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반운루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구염락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서열 누님!”

순간 초 마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농교와 완정이 숨길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 저 사람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장서열은 웃을 수 없었다. 서풍엽을 따라가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어야 할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뭘 하는 거지? 여기가 남소원이야? 주 대학사는 지난 몇 년간 손님이 되었을 때의 기본예절도 가르치지 않았단 말인가!’

구염락이 신이 난 얼굴로 뛰어왔다. 장서열은 냉랭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구염락이 정말로 세상물정을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스승을 뛰어넘는 학습 능력을 보이는 아이가 방문 예절을 모를 리 없었다.

“풍엽은?”

문득 발걸음을 멈춘 구염락이 장서열에게 다가가려던 마음을 거뒀다.

‘서열 누님이 언짢아 해.’

구염락이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심사숙고하며 답했다.

“부인께 인사드리러 갔어요.”

장서열은 애처로운 모습에 넘어가지 않고 엄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너는? 우리 집에 왔으면 먼저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게 맞잖아.”

구염락이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고개를 들었다.

“난 누님을 기다리고 싶었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강경한 대답이었다. 장서열이 잠시 멈칫했다.

‘구염락이… 방금 뭐라고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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