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구염락은 머리를 쥐어짜는 중이었다. 그는 최근에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한 번씩 떠올려 보았다. 서열 누님이 몹시 보고 싶었다. 자신을 그리도 귀여워한 누님이었다. 분명 자신을 모른 체하지 않으리라. 그는 모기를 쫓는 향낭도, 풍엽 형님이 보내오는 귀한 물건도 모두 필요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오직 서열 누님뿐이었다.
“형님.”
당자가 얼른 귀를 틀어막고 책상에 엎어졌다.
“안 들려! 안 들린다고! 이 몸은 귀가 먹었다.”
녀석은 정말 끈질겼다. 매일같이 찾아와 장서열의 안부를 물었고, 그녀에게 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당자가 보기에 그는 멀쩡했다. 아픈 사람은 오히려 당자 자신이었다.
구염락이 당자의 팔을 흔들었다. 짜증이 난 당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열셋째, 내가 널 도와주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냐. 그녀는 이제 궁패(宫牌, 궁에 들어올 수 있는 허가를 증명하는 패)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 올 수가 없어. 차라리 네가 궁 밖으로 나가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당자의 그 한마디는 일순간 구염락의 투지에 불을 붙였다.
구염락은 한 번도 성인이 되기 전 궁 밖으로 나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궁에서의 생활이 못 견디게 힘들 때조차 해본 적이 없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나갈 것이다. 반드시 나가야 했다.
구염락은 궁벽을 따라 한 바퀴를 돌았다. 웅장한 벽이 백 리에 걸쳐 뻗어 있었고 허술한 구멍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사는 곳에 침입자가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달았다. 성곽은 작은 틈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구염락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문뿐이었다. 그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날짜를 정한 구염락은 사이가 가까운 몇몇 태감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다 궁에 식재료를 제공해 주고 나가는 마차에 위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마지막 궁문을 지날 때 경비병들은 혹시라도 숨겨진 밀수품은 없는지 검문하는 척만 했다. 만약 손 공공이 미리 충분한 은자를 찔러두지 않았다면 구염락은 궁문을 지날 수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경비병은 모두 그의 사람들로 바뀌어 있었다.
구염락은 그제야 스스로 똑똑하다 자부했던 것이 실은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가 무사히 궁을 나올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그가 누구의 관심도 얻지 못한 열셋째 황자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일이 잘못 되어 그가 밖에서 비명횡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죄를 추궁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경비 역시 모르는 척하고 그를 내보내 준 것이다. 병든 짐승 한 마리를 놓아줬다 해서 잘못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 암묵적인 합의를 현실로 만들기 위하여 손 공공은 그간 모아온 대부분의 은자를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이곳은 지엄한 궁이었다. 만일 경비가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도 절대 나갈 수 없었다.
구염락은 자신이 비천하고 쓸모없는 황자인 게 더없이 다행스러웠다.
* * *
외지에서 공무를 마친 서풍엽이 돌아오는 길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정혼자가 좋아하는 작은 장난감이었다. 그는 미래의 장모님께 잘 보이기 위한 선물 역시 잊지 않았다.
비록 장인어른은 언제나 그를 마뜩찮게 쳐다봤지만 그는 아랫사람의 예를 다하여 틈틈이 선물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일깨웠다.
옷을 갈아입은 서풍엽이 곧장 물건을 들고 좌상부로 내달렸다.
“세자께서 찾아내신 이 화고(花鼓, 허리에 차고 치는 북)를 보시면 아가씨께서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귀한 물건일 뿐만 아니라 아가씨에 대한 세자의 진심이 담겨 있으니 얼굴에 웃음꽃이 피는 것도 당연하지요.”
서풍엽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웬일로 부하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다며 꾸짖지 않았다. 장서열은 소리가 나는 모든 물건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만드는 공정이 복잡하고 모양이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화고는 춤을 출 때 쓰는 도구로 북의 테두리에는 금박이 입혀져 있었으며 그 위로 비단꽃이 붙어 있었다. 비단으로 만든 꽃송이는 은방울로 제작되어 움직일 때마다 청아한 방울 소리를 냈다. 비단꽃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반짝이는 빛을 반사했는데, 이는 장서열의 말을 빌리자면 ‘보기만 해도 기쁜’ 물건이었다.
서풍엽이 상부에 도착했을 때는 때마침 정오 무렵이었다. 그는 함께 점심 식사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아직 장서열의 나이가 어려 마음껏 좌상부를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다음 해부터는 출입을 삼가야 할 나이가 되므로 가능한 한 자주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이 좋았다.
서풍엽이 막 마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돌연 그림자 하나가 돌진해 왔다. 그가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재빨리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상대 역시 피하지 않고 곧바로 팔뚝으로 그를 막아섰다. 두 사람은 팽팽한 기세로 맞섰다.
“형님, 저예요!”
설레는 눈을 한 구염락이 신난 얼굴로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꼬박 하루를 기다린 끝에 얻은 천금 같은 기회였다.
‘이제 서열 누님을 볼 수 있어!’
구염락은 너무나 기뻤다. 서풍엽의 등장이 이렇게나 반가운 적이 없었다.
눈썹을 찡그린 서풍엽이 손을 거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서둘러 구염락을 낚아채 마차 안으로 들여보냈다. 뒤이어 마차에 오른 서풍엽이 말했다.
“여기서 떠나.”
구염락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사람처럼 즉시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거 놔! 놓으라고! 난 서열 누님을 만날 거예요! 누님을 만나야 한다고요!”
서풍엽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구염락을 꼼짝 못하게 제압했다. 하마터면 몇 번이나 놓칠 뻔했지만 그는 구염락을 얕보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나온 거야?”
구염락의 시선은 온통 문을 향해 있었다. 죽기 살기로 반항하던 그가 돌연 서풍엽의 팔을 덥썩 물었다. 서풍엽은 이를 악물며 아픔을 참았으나 여전히 그를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미친 녀석! 어떻게 나왔는지 빨리 말해! 서열이를 만나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 줄 알아?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서열이가 무슨 죄를 뒤집어쓸지 생각도 안 해봤어?”
순간 구염락이 망연한 시선으로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장서열을 보러 온 것뿐이었다.
구염락이 더는 저항하지 않자 서풍엽은 손을 풀었다. 그가 마차 안에 있던 술병을 들어 상처난 팔뚝에 부은 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말해.”
서풍엽은 그의 행동을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구염락은 황자였고 장서열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오늘과 같은 행동을 마냥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추후 구염락의 예절 교육 스승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염락은 평정을 되찾았다. 자신의 행동이 장서열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말에 그는 어떻게 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죄다 실토했다. 필요하다면 그는 류소경을 호수에 빠뜨린 일까지도 얘기할 수 있었다.
구염락의 말을 모두 들은 서풍엽이 경악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옷이라도 갈아입어 다행이구나.”
“손 공공이 일러준 거예요.”
‘또 그 자인가?’
서풍엽은 표정을 풀었지만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손 공공이라 함은 삼전(三殿)의 대총관인 손묘(孙淼)를 말하는 것이지?”
“네.”
‘저군전과 초혜전, 그리고 제자전(帝子殿)까지 관장하는 손 공공이라…….’
손묘는 주로 세 전각의 물자 배분과 지출을 관리하고 있었다. 주인과 직접 접촉하는 일이 없으므로 귀한 자리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물건을 나누어 세 군데 궁에 배분한다는 점에서 얻을 것이 많은 직책이었다.
‘지난번에도 손 공공이 나서서 사건을 덮지 않았는가. 그는 왜 그토록 구염락을 돕는 것일까?’
손 공공은 궁에서 권력이 높은 이에게 빌붙기로 정평이 난 자였다. 총애를 받지 못하는 황자 따위가 그의 안중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그가 총애는커녕 황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구염락과 친하게 지낸다?
‘구염락을 이용해 장인어른에게 대적하려는 누군가가 손 공공에게 지시를 내린 걸까?’
구염락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서풍엽을 툭 건드렸다. 그가 신중한 눈빛으로 서풍엽을 쳐다보았다.
“제가… 오지 말았어야 했나요?”
서풍엽이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사실 그가 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서열이를 한 번 보겠다고 그리도 험난한 과정을 거쳐 궁을 빠져나오다니.’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 않은 게 확실해? 예를 들어, 누가 서열이에게 이야기를 전하라고 했다든지.”
남들에게 장서열은 총명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었고, 장신성 또한 그녀를 덮어놓고 총애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손을 쓸 거란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자들 중 태자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구염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풍엽은 구염락을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구염락이 그녀와 가까이 지내는 걸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에 또 나오고 싶으면 당자를 통해 내게 알려. 내가 가서 널 데리고 나올 테니.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구염락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들은 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으니까.”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해야지! 만에 하나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서열이는 목이 쉬도록 울 거야!”
말을 마친 서풍엽이 구염락에게 눈을 부라렸다. 구염락은 일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서열 누님이 최고예요.”
서풍엽은 구염락의 웃음이 눈에 거슬렸다. 얄밉지만 비위를 맞춰야 하는 처남이 한 명 더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 서풍엽이 창문의 휘장을 걷었다.
“돌아서 들어가자.”
그가 열셋째 황자라는 신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서풍엽은 구염락을 친구로 소개하기로 했다.
구염락은 좌상부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서열 누님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온몸에서 광채가 날 지경이었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상부의 모든 풍경을 곁눈질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정교한 누각도 곧 만나게 될 장서열만큼 그를 기쁘게 할 수 없었다.
서풍엽은 구염락이 갑자기 자신의 뒤에서 벗어나 후원(后院)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황급히 그를 잡아 세웠다.
“무슨 추태야! 내 뒤만 따라와!”
서풍엽이 길을 안내하던 하인을 향해 쑥스러운 듯 웃어보인 후, 낮은 목소리로 구염락에게 훈계했다.
“손님으로 방문할 때는 그에 맞는 법도가 있는 법이야. 너는 남자 손님이니까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 돼. 그게 예의야.”
‘하지만 서열 누님이 저기 있는데…….’
서풍엽의 언짢은 표정을 본 구염락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