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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67)화 (67/449)
  • 제67화

    “그럼 내가 한 소절을 불러 줄게요. 챙겨온 게 아깝잖아요.”

    그녀의 손을 맞잡은 서풍엽은 행복에 겨워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사실 장서열은 희극에 소질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공무가 있어 앞으로 며칠 동안 외부에 나가 있어야 했고, 이를 위한 마차는 이미 바깥에 대기 중이었다. 그가 오늘 장서열을 찾아온 이유는 극에 필요한 물건을 건네주고 구염락의 일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그럼 짧게 한 단락만.”

    장서열이 그의 손을 놓고 제자리에 섰다.

    “바빠요?”

    서풍엽은 장서열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물빛 치마가 바람을 따라 흔들리자 손목에 걸쳐진 겉옷 또한 함께 흩날렸다. 마치 바람을 타고 온 선녀처럼 여리고 아름다운 자태였다.

    장서열은 넋을 잃은 그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일이 바쁘면 그만 가 봐요.”

    서풍엽이 그녀의 겉옷을 정성스럽게 정리해 주었다.

    “아니, 한 단락만 듣고 갈게.”

    장서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섬돌에서 폴짝 뛰어내려온 그녀가 희극을 준비하러 갔다. 바쁘다면 굳이 시간을 내어 자신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함께 할 날은 많았다. 매번 이런 식이라면 그는 결국 지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기대에 찬 모습에 그녀는 차마 서풍엽을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 * *

    “아가씨! 아가씨! 여기예요, 노비는 여기 있어요!”

    “아가씨, 농교는 여기 있어요!”

    눈을 가린 장서열이 빠르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작은 몸이 바람처럼 날아다녔다.

    “아가씨! 완정은 여기 있어요.”

    나이 든 마마들이 회화 나무 아래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초 마마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움직이는 걸 너무 좋아해. 하지만 많이 움직이는 것도 좋지. 몸이 튼튼해지니까.”

    “암요. 아가씨께서 건강하셔야 부인께서도 기뻐하시죠. 여봐라, 너희는 아가씨를 언제까지 달리게 만들 셈이냐. 그러다가 아가씨께서 어디에 부딪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마마들이 입을 막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장서열이 계속해 방향을 바꿨다. 거의 옷자락을 잡을 뻔했으나 한발 늦은 탓에 상대의 옷자락이 그녀의 손 안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장서열은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그녀가 상대를 잡고자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덤벼들었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마마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아가씨를 놀리니까 애를 먹지.”

    “이게 다 마마 때문이에요. 마마 때문에 집중을 못 하겠다고요. 안 그랬으면 제가 어찌 아가씨께 몰려 구석까지 갔겠어요? 아가씨, 그쪽이 아니에요! 노비 여기 있어요!”

    장서열은 나비가 날듯 팔랑거리며 그들을 쫓았고 아깝게 잡지 못 할 때면 작고 귀여운 입술을 삐쭉 내밀며 발을 굴렀다. 그녀는 계속해 기세를 북돋우며 끝까지 그들을 잡으려 노력했다.

    * * *

    “아가씨, 축국(蹴鞠, 공차기)은 간단한 놀이예요. 채구(彩球, 여러 색상의 비단으로 만든 공)를 발로 차서 노비 뒤에 있는 틀 안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오색방울이 달린 채구를 든 장서열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내 제대로 된 솜씨를 보여주지!”

    그녀가 공을 찼다. 그러나 공은 움직이지 않았고, 헛발질을 한 그녀는 미끄러져 대자로 바닥에 뻗었다. 하인들이 황급히 앞으로 나갔다. 장서열은 벌떡 일어나 앉은 뒤 창피함에 얼굴을 가렸다. 아무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풍엽에게 말하지 마!”

    창피했다. 서풍엽이 알게 되면 분명 몇 번이고 자신을 놀릴 것이 뻔했다.

    * * *

    장서열은 매우 즐겁게 생활했다. 하고 싶은 것은 전부 할 수 있었고, 갑자기 흥이 일어 하루 종일 희극을 읊고 노래해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곳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아름답고 다채로운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아직 주인이 바뀌지 않은 집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하나까지 모두 어머니의 취향으로 꾸며져 있었고 그 느낌은 퍽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비호 아래 혼인할 날을 기다리며 주어진 인생을 만끽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녀에게는 근심할 일도 없었다. 아버지의 첩들은 화목했고, 그들의 서출 역시 성실하게 본분을 지켰다. 눈에 거슬리는 자는 어머니가 따로 처리했다. 어차피 그들은 모두 조옥언의 발 아래 하루하루 목숨울 부지하고 있었기에 주모(主母) 집안의 정실 부인의 보배 같은 딸에게는 더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조옥언은 집안을 엄격히 다스리는 주인이었기에 첩실들은 장신성을 거스를 수는 있어도 감히 부인의 심기를 거스르진 못했다. 덕분에 상부는 모든 게 원만했고 장서열로서는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구염락도 없고 또래와 비교당하는 일도 없는 현재를 만끽하며 드디어 일생 중 가장 평안한 날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장서열의 생활은 비슷하게 이어졌다. 오전에는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했고, 식사 후에는 서재에서 습자 연습을 했다. 만약 이 모든 걸 마치고도 시간이 남으면 오전 수업을 들었으나, 정 시간이 없을 때면 초빙한 이를 기다리게 한 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수업을 들었다.

    심지어 수업을 듣기 싫은 날에는 일단 실컷 잠을 청한 뒤 오후에 다시 수업 여부를 결정했다. 집에는 초혜전처럼 쌀쌀맞은 스승님도 없었고, 수업을 소홀히 한다고 해서 불경죄로 다스릴 황제도 없었다. 정 수업을 듣기 싫은 날에는 반운루에 돌아와 연주를 들으며 낮잠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이의 근심이 되기도 하는 법이었다. 적녀가 집에 들어앉자 나머지 서출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해졌다.

    집안에 들어온 모든 진귀한 물건과 음식들은 전부 큰아가씨에게 보내졌고, 그녀를 기쁘게 하여 부인의 눈에 들기 위해 온 집안이 사력을 다했다.

    쌀쌀한 저녁이었다. 비가 그쳤으나 하늘은 아직 흐렸다. 상부의 모든 뜰은 이미 빗장을 닫아건 후였다. 이따금씩 반운루에서 북소리가 나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처소에는 개미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았다.

    장서영은 매원(梅院)의 가장 좋은 방에 거처하고 있었다. 얇은 이불 속에 누운 그녀의 두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긴 속눈썹에 맺힌 눈물방울은 작은 얼굴을 더욱 불쌍하고 가련해 보이게 했다.

    매원은 서출 아가씨들의 숙소였다. 그곳에는 장서영뿐만 아니라 여섯 명의 자매들이 더 있었고, 그들은 각각 곁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장서영의 방은 정방(正房 여러 채로 된 살림집에서 주가 되는 집채)으로, 나이순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장서열 다음으로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받는 딸이었기에 얻은 것이었다.

    장서영은 새까만 침대에 누워 조용히 흐느껴 울었다. 서럽고 억울했다. 아버지가 아무리 잘해준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집안의 모두가 주모의 말에 복종했다. 큰언니는 주모의 친딸이었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총애한다 한들 그녀가 첩실의 자식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후의 일이었다. 장서영은 평소처럼 동루(东楼)에 자수를 배우러 갔다. 그러나 한나절을 기다려도 그녀들을 가르치던 봉 사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모든 자매들이 바보처럼 앉아만 있었다.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무슨 일이냐고 묻지 못했고, 다들 오시(午时, 13시)부터 신시(申时,17시)까지 꼼짝 않은 채 발이 저리도록 기다리기만 했다.

    동생들이 장서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도 방법이 없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 했기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동루의 집사에게 물었다. 그녀를 힐끗 쳐다보던 집사의 눈빛은 무어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묻지 말았어야 할 질문을 했다는 눈빛이었다.

    “큰아가씨께서 봉 사부와 함께 난초를 수놓고 계십니다. 지금 막 도안을 그리셨지요.”

    “그럼… 우리는 어떡해요?”

    말을 마친 장서영이 집사의 시선에 고개를 숙였다.

    “어떡하냐니요?”

    집사가 몹시 놀란 얼굴로 대청에 앉아 있는 자매들을 훑어보았다.

    “뭐가 문제입니까? 봉 사부는 부인께서 큰아가씨를 위해 모신 분이에요. 예전에는 큰아가씨께서 집에 안 계셨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 아가씨들을 가르쳐 주셨지만, 이제 봉 사부는 큰아가씨를 가르치는 게 당연하지요.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요?”

    장서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이렇게 버려도 되는 거야? 우리는 배우지도 말라는 건가?’

    비록 주모의 명령이라고 하나 자신들을 이렇게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만일 부인이 서출 자녀들을 괄시하고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는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그녀의 명성에도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집사는 장서영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

    “아가씨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바로 옆에 민 사부가 계세요. 민 사부는 부인께서 아가씨들을 위해 이미 몇 년 전부터 데려온 분이에요. 덕과 재능을 겸비한 좋은 사부님이니 수를 놓다가 의문점이 생기면 가서 가르침을 청해보세요.”

    말을 마친 집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그들을 한 번 더 훑어본 뒤 자리를 떠났다. 그의 말에 민 사부를 떠올린 장서영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그 노부인은 수를 잘못 놓으면 벼락 같이 손을 때리곤 했다.

    ‘차라리 안 배우고 말지!’

    집사가 일깨워 주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민 사부를 기억해 냈다. 그간 봉 사부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민 사부의 수업을 들은 아이는 없었다.

    덕분에 상부에서 공기처럼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된 민 사부는 기분이 매우 상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상부에서 여전히 그녀를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떠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찾지 않는 서출들의 행동에 민 사부는 이미 화가 나 있었고, 따라서 봉 사부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다시 민 사부를 찾아가기는 어려웠다.

    장서영은 자신들이 맞이하게 될 비참한 말로를 예상할 수 있었다.

    감히 누구도 항변하지 못한 채 자매들은 즉시 자리를 떠났다. 장서영 역시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텅 빈 동루의 대청을 바라보았다. 엄격한 눈빛의 민 사부를 떠올리며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장서영은 수놓는 걸 무척 좋아했고 봉 사부 역시 그녀를 귀여워했다. 봉 사부는 장서영에게 자수에 소질이 보인다며 양면 자수 기법을 전수해 주겠노라고 약속했었다. 오늘을 기다리며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신나게 꽃문양을 찾았고 드디어 약속된 날이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바라왔던 꿈은 큰언니의 한 마디로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장서영의 눈에서 멈추지 않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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