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조옥언은 위지 씨 가문의 딸에 대해 일찍이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그 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충왕부의 문 앞에서 서풍엽이 나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조옥언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충왕부에서는 그녀를 쫓아냈고 위지 씨 일가 역시 그녀를 말렸지만 그녀는 죽기 살기로 버티는 중이었다. 만에 하나 위지 노야가 딸을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그 역시 결국 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체면을 불사하고 덤비는 사람은 당해낼 수 없는 법이었다. 위지 씨 가문에서는 딸이 서풍엽을 연모하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딸이 서풍엽과 눈이라도 맞기를 바라고 있을 터였다.
‘어디 재주 있으면 귀한 딸을 첩으로 보내 보라지.’
그러나 조옥언은 정말로 그들이 딸 위지해어를 서풍엽의 첩실로 들여보낼까 두려웠다. 자신의 딸 장서열은 산만하고 아둔했다. 딸아이가 침착하고 속 깊은 위지해어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옥언은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옥언은 문득 크게 입을 벌린 채 벌컥벌컥 탕을 들이키는 딸을 바라보며 갑자기 힘이 빠졌다. 너무 급하게 혼처를 정하지 않았나 싶어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조옥언은 곧 이러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래도 장신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혼처였다.
따지고 보면 괜찮은 인물이 얼마나 있겠는가. 차라리 처음부터 제일 나은 사람을 찾아 서로 필요한 것만이라도 취할 수 있는 관계가 나았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 봐야 결국 좋은 소리도 듣지 못하는 불상사만 발생할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딸은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천천히 마시거라. 누가 빼앗는 것도 아니잖니.”
손수건을 털어낸 조옥언이 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넌 참 누구를 닮았는지 모르겠구나.”
“어머니를 닮았지요.”
죽순탕이 그리도 맛있을 수 없었다. 미소를 머금은 조옥언이 짐짓 딸아이를 흘겨보았다.
장신성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새로운 목표가 생긴 후 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장서영은 장서열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그는 멍청한 두 모녀가 밥을 먹고 있는 모습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꼈다. 이들은 지금처럼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바보처럼 살아야 마땅했다.
“당연히 나를 닮았지.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살 줄 아는 것도 복이야.”
“오셨어요, 아버지.”
장서열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계속해 밥을 먹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장신성은 딸을 나무라지 않고 자애로운 아버지인 양 자리에 앉아 딸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초혜전에 가지 않게 되어 신났나 보구나. 앞으로 실컷 놀거라. 이 아버지가 있으니 넌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네.”
조옥언은 장신성을 노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컷 놀아? 딸이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아도 좋단 말인가!’
“서열이에게 유학(儒学) 스승님을 모셔 줄까 합니다. 지인 중 적임자가 있는지 한 번 찾아봐 주시지요.”
장신성은 순간 머릿속이 까맣게 타는 듯했다. 분명 창피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딸아이에게 공부머리가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오. 글은 배워 무엇하겠소. 그냥 실컷 놀게 두시오.”
그가 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애정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조옥언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었다. 비록 남편이 장서열을 태자와 혼인 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아버지였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일 터였다.
“그래도 한번 찾아보시지요. 풍엽이 학문과 군사에 능하니 서열이도 어느 정도는 따라가는 게 좋을 것입니다.”
“풍엽이는 국가의 중책을 맡고 있는 인물이지만 서열이는 그저 여자아이일 뿐이오. 어찌 둘을 같은 선상에서 논하겠소. 괜한 걱정 마시오. 그리 염려가 되거든 차라리 재의(裁衣, 의복 재단) 스승을 몇 명 더 청해 예쁘게 치장하는 법이나 익히게 합시다. 어떠냐, 서열아.”
‘딸이 고작 여색으로 남자를 홀리기를 바라다니!’
사악한 본심을 드러낸 꼴이었다. 조옥언이 매섭게 장신성을 노려보았다. 장성한 후에도 용모나 뽐낼 줄 아는 딸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지겠는가.
장서열은 부모님이 각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든 신경 쓰지 않고 밥을 먹었다. 어차피 두 사람의 동상이몽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고, 사람의 성격은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과거처럼 스스로를 망치는 어리석은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장신성은 그녀를 태자에게 팔아넘기거나 딸을 이용해 어머니를 해하는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부모님의 갈등에도 그녀는 크게 상관하지 않고 식사를 마쳤다. 차라리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을 만큼 사랑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장서열은 마음을 넓게 가질 생각이었다. 이제와 아버지의 속셈을 따져봐야 소용없는 일이었고, 그녀는 결코 아버지를 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버지를 지하에 가둔 채 노년을 보내도록 하는 일뿐이었다.
“다 먹었어요. 글씨 연습하러 갈래요.”
그간 장서열은 매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구염락이 없었고, 학당 아이들이 자신을 주시하지도 않았으며, 머리 아픈 문장을 외우게 하는 스승도 없었다.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새처럼 그녀는 집에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며 지냈다.
물론 상실감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환생한 뒤로도 무려 삼 년을 함께 지낸 사람이 돌연 곁에서 사라졌으니 허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장서열은 글씨를 쓰다가 무심코 구염락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문득 이곳이 초혜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평소 구염락이 서있던 공간을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차갑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없었다. 구염락도, 그리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잊는 아픔도 그러했다.
이틀이 채 되지 않아 장서열은 집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열셋째의 역할은 농교에게 넘어갔다. 그녀를 부르는 이름 또한 금세 입에 감겼다.
장서열의 생활은 나날이 윤택해졌다. 서풍엽은 공무가 없는 날에는 어김없이 장서열을 찾아왔다. 그녀가 집에만 있는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까 염려한 그는 그녀를 데리고 나가 유명한 희자(戏子,연극배우)가 열연하는 희극을 관람하기도 했다. 재미있게 공연을 관람하던 장서열이 돌연 옆에 있던 서풍엽에게 말했다.
“난 오라버니가 부르는 것을 들어보고 싶어요.”
결국 오늘, 서풍엽은 희극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와 반운루를 가득 채운 뒤 장서열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몰래 불러 줄게.”
까맣게 잊고 있던 장서열의 머릿속에 그제야 전날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서풍엽을 보며 까르르 웃었다.
“‘서생과 여우의 만남’을 들려줘요.”
“좋아.”
“오라버니가 여우 역이에요.”
잠시 생각하던 서풍엽이 장서열의 맑은 두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코를 살짝 쥐었다.
“별 이상한 희극을 다 아는군.”
이럴 때면 그녀에게 대가댁 규수다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어머니인 충왕비 역시 장서열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희귀한 대본을 구해뒀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집에 있는 희자에게 이를 연습시키기까지 했다. 충왕비는 서풍엽에게 장서열이 좋아하도록 반드시 제대로 하고 오라며 신신당부를 한 상태였다.
“싫어요?”
장서열이 서풍엽의 팔에 매달려 활짝 웃으며 말했다.
“희극을 많이 들으면 아는 것도 많아지지 않겠어요?”
“여우 요괴가 사람으로 변신하는 걸 배워서 어디에 쓰려고?”
서풍엽은 일전에 장 부인으로부터 장서열이 희극을 듣지 않고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희극을 좋아했고, 이를 전해들은 충왕부에서는 일찍이 집안에 희자를 데려다 놓은 상태였다. 충왕비는 드디어 충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배우를 들일 수 있게 되었다며 장서열을 구세주라 칭했다.
“당연히 쓸모 있죠. 내가 서생이 되어 여우 요괴에게 잡아먹히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겠어요?”
서풍엽이 팔 안의 장서열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모두 물러가거라.”
“예.”
“이봐요. 여긴 내 집이라고요.”
장서열이 고개를 들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난 사위잖아.”
그가 옆에 있는 큰 회화 나무의 그늘 아래로 장서열을 옮겨 놓았다.
“할 말이 있어.”
“무슨 일인데요?”
그녀가 꽃이 무더기로 핀 섬돌 위에 섰다. 서풍엽과 같은 키를 갖게 된 그녀가 장난으로 그의 머리를 콕콕 찌르자 그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더는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진지하게 들어.”
서풍엽이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젯밤부터 이 일을 그녀에게 알려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장서열이 구염락을 아껴 주는 걸 용인했듯, 지금도 그는 일부러 막을 생각이 없었다.
“어젯밤 구염락에게 일이 있었어.”
“아.”
장서열은 많이 놀라지 않은 듯 담담했다. 그 밖에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서풍엽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캐묻지도, 그를 보러 가겠다며 야단을 피우지도 않았다. 마치 구염락에게 무슨 일이 있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태도였다.
서풍엽은 그제야 안도하며 지나치게 걱정한 스스로를 속으로 비웃었다.
“어제 신형사에서 손찌검을 해 사람 몇 명을 다치게 했다더군.”
신형사에서 금용을 잡아가게 만든 사람은 바로 서풍엽이었다. 당연히 제일 먼저 소식을 들었던 그가 보충하듯 말했다.
“그는 무사해.”
“이유가 뭐래요?”
장서열이 담담하게 물었다.
“왜 때렸대요?”
“계집종이 신형사로 끌려갔다는군. 정의 실현이었겠지.”
“그가 곤경에 처하지는 않겠죠?”
장서열이 서풍엽의 목에 매달리며 웃었다. 서풍엽은 한없이 마음이 물러지는 걸 느꼈다.
“그럴 리가. 내가 있는 한 구염락이 곤경에 처할 일은 없어.”
그러나 그녀에게 다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서풍엽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구염락을 위해 이번 사건을 덮고자 애쓴다는 걸 알아챘다.
‘서열이의 명성에 영향이 없게 장 씨 가문에서 손을 쓴 것일까? 아니면 폐하께서?’
“그럼 됐어요. 풍엽, 이렇게 보니 이마가 꽤 넓네요. 손으로 눌러보고 싶어요. 어라? 도망가지 마요!”
그녀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구염락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황위에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