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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65)화 (65/449)
  • 제65화

    소리자는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전하께서 무얼 하시려는 것인가! 손 공공을 찾아가 상황을 묻고 곽 공공과 금용을 구해올 방법을 의논해야 하는데 어째서……!’

    순간 소리자는 아주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놀란 그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헐레벌떡 신발을 신은 곽 공공이 문 앞에 나타났다. 그 역시 조금 전 창문으로 몽둥이를 들고 나가는 구염락을 확인한 후 부랴부랴 쫓아 나오던 참이었다. 방문을 나섰을 때 구염락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고.

    곽 공공은 초조해져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낭패한 얼굴의 소리자를 바라보며 신발을 벗고 달려들었다.

    “이 멍청한 자식! 이제 사는 게 지긋지긋한 게냐? 왜 허구한 날 일을 만들어! 금용은 신형사에서 곤장이나 몇 대 맞고 나올 게 뻔하지 않느냐. 며칠 간호해 주면 끝날 것을! 지금 네가 벌려 놓은 꼴을 봐라! 이제 어쩔 것이냐? 모두 순장을 당하게 생겼다!”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신발을 다시 주워 신은 곽 공공이 구염락을 뒤쫓아 가기 시작했다. 그가 쉴 새 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설마 백주 대낮에 살인을 저지른 주인 때문에 이렇게 끝장이 난단 말인가!’

    게다가 구염락의 상태가 알려지는 것 또한 그리 영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소리자는 겁에 질려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또 화를 부른 것인가!’

    소리자의 머릿속에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주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벽에 기대어 고꾸라졌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밝게 빛나던 궁의 등불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구염락은 곽 공공과 손 공공의 조치로 들것에 실려 왔다. 금용도 함께였다.

    겁에 질린 금용은 구석에 선 채 차마 구염락의 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태의 복장을 한 남자가 구염락에게 약을 먹였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약입니다. 이 병은 꼭 치료해야 해요.”

    말을 마친 그가 종종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구염락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손 공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직접 그의 옷을 갈아입히고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제야 구염락은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누구도 불을 켜지 않았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한동안 깨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한 손 공공과 곽 공공은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금용을 힐끗 바라본 뒤 방을 나갔다.

    달빛이 지면 위에 쏟아졌다. 눈서리처럼 눈부신 달의 광채가 별빛마저 초라하게 만드는 밤이었다.

    방에서 나온 손 공공이 미약하게 손을 떨기 시작했다. 평소 교태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엄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다친 이들 중 조정(朝庭)의 내통자가 있네. 처리하기 쉽지 않을 게야.”

    곽 공공이 은밀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럼 차라리…….”

    잠시 생각하던 손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그러세.”

    곽 공공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남소원 안으로 사라졌다.

    손 공공은 제자리에 선 채 조용한 방문을 바라보다 문득 곁방에 숨어 있는 소리자를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사건은 소리자의 탓이 아니었다. 열셋째의 매서운 성질이 어찌 그의 잘못이겠는가.

    ‘이런 자를 태자로 옹립하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만일 황위에 오른 뒤 발병이라도 한다면…….’

    그러나 방금 전 손 공공이 잡아당겼을 때 무서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구염락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자 공격을 하지 않았다. 손 공공은 구염락의 정서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구염락과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자가 황위에 오른다……?’

    손 공공은 즉시 핑계를 생각해 냈다. 구염락은 정이 깊은 금용을 위해 필사적이었던 것뿐이다. 만약 자신이 이번 사건을 보기 좋게 포장하는 데 성공한다면, 장서열의 체면을 생각한 폐하께서는 사건의 진상을 알아도 모른 척해 주실 것이다. 곁에 장서열이 등장한 건 열셋째에게 큰 복이었다.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구염락은 벌써 여러 차례 황제의 눈 밖에 났을 것이다.

    * * *

    이른 아침 내린 가랑비는 사람들의 시선을 흐리게 하고 만물을 덮어 가렸다. 궁의 등과 거리의 등불이 빛을 발했다. 아침 햇살이 비춘 후, 촉촉이 젖은 녹색 풀밭은 싱그러웠고 꽃송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화사했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매미는 하룻밤 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좌상부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앞은 청소하는 이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상부에서 가장 정교하게 지어진 누각 안, 장서열은 커다란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가 문득 학당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떠올린 후 다시 쓰러지듯 누웠다. 백옥처럼 하얀 베개 위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앙증맞고 고운 얼굴과 대비되었다.

    “편안해.”

    그녀의 기척을 들은 초 마마가 침대 휘장을 걷었다. 속눈썹을 깜박이는 아가씨를 바라보던 그녀가 웃음을 머금으며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부인께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계세요.”

    몸을 뒤척이던 장서열은 이불을 껴안고 침대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잠에 취한 나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안 먹을래.”

    초 마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르듯 말했다.

    “아가씨, 밖에 비가 와요. 농교와 완정이 아가씨를 위해 연한 죽순을 따와 죽순탕을 끓였는데, 정말 안 드실 거예요?”

    순간 연하늘색 비단 이불을 단번에 젖힌 장서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죽순탕을 먹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초 마마가 웃었다. 아가씨는 모든 게 완벽했지만 다소 제멋대로인 부분이 있었다. 세상에 어느 대가댁 규수가 늦잠을 잔단 말인가. 이미 정혼을 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라면 집안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을 터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가씨.”

    세숫물을 든 농교와 완정이 들어왔다. 완정은 이제 제법 출중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이 년간 상부의 법도를 익힌 덕분에 몸가짐이 단정했고, 위축되었던 성격도 밝아져 서출 아가씨들과 비교해도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활발한 성격에 고운 미모를 타고난 농교는 어렸을 때부터 아가씨를 따랐던 탓에 이제는 야단법석을 떠는 것까지 꼭 작은 장서열을 떠오르게 했다.

    “아가씨, 오늘은 노란 옷을 입으세요.”

    “싫어.”

    “그럼 오늘은 밖에 못 나가시겠네요. 노비는 오늘 아가씨께 드리려고 노란색 옷을 준비했거든요.”

    “하지만 비가 오잖아.”

    아가씨의 머리를 매만지던 초 마마가 오늘 땋을 머리 모양을 결정하며 입을 열었다.

    “됐다. 농교 너도 참, 비오는 날 노란 옷이 웬 말이냐. 가서 그 녹색 옷을 가져오너라.”

    “하지만 노비 생각에는… 알겠습니다, 아가씨 말이 옳아요.”

    초 마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 같이 아가씨를 치장해 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러나 아가씨에게는 자신만의 고집이 있었고, 특히 옷에 대한 취향은 극단적으로 명확했다. 장서열이 하루에 예닐곱 벌의 옷을 갈아입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초 마마가 아가씨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아가씨의 머리카락은 부드럽고 풍성해 긴 머리를 어깨에 드리우면 몹시 보기가 좋았다. 초 마마는 장서열의 나이가 어린 게 아쉬웠다. 조금만 더 컸더라면 갖가지 머리를 꾸밀 수 있었을 테고, 그럼 더더욱 예뻤을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몇 가지 머리밖에 할 수 없었다.

    “완정, 가서 매화잠을 가져오너라.”

    장서열은 차고 넘칠 정도로 장신구가 많았다. 여느 귀족 부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종류였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충왕비와 조옥언의 공이 컸다. 그들은 장서열에게 어울릴 만한 예쁜 화잠(花簪, 꽃모양 비녀)과 머리 장식을 제작하여 쉴 새 없이 보냈다. 덕분에 굳이 다른 장신구를 하지 않아도 장서열은 머리 장식만으로 충분히 화사하고 눈부셨으며, 동시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아가씨, 앞으로 매일 집에 계실 텐데 지루하지 않으시겠어요?”

    농교가 고개를 기울인 채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주인을 바라보았다.

    “전혀. 초혜전이야말로 지루한 곳이야.”

    농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초혜전에는 스승님도 있고 어린 황자들도 볼 수 있었으며 여러 가지 수업이 있어 즐겁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아가씨는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세자 또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노비인 그녀로서는 도무지 주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장서열은 진심으로 후련했다. 드디어 오늘부터 정식으로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초혜전은 이제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조옥언은 이미 딸에게 여계(女戒), 여덕(女德), 금(), 무용, 자수를 가르칠 스승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중 세 명의 스승은 과거 그녀를 가르쳤던 이들이었고, 나머지는 그녀가 따로 추가한 수업이었다. 딸은 더 이상 학당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조옥언은 딸이 할일 없이 노는 데 몰두하여 재주가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수를 가르칠 스승은 남방 지역에서 최고의 실력을 지닌 이로 현재는 장 씨 가문에서 안락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금 스승은 연경의 이름난 기녀인 루 부인이었다. 그녀의 금 솜씨는 세간에서 최고로 불렸다.

    무용은 조옥언이 직접 맡았다. 그녀는 딸에게 직접 무용을 가르치면서 부드러운 여인으로 보이는 법도 가르쳤다.

    이러한 수업은 과거 조옥언이 입궁하기 전, 조 노부인이 개인적으로 스승을 청하여 딸에게 가르쳤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크게 쓰이지 못했다.

    조옥언은 장신성 같은 남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 따위는 할 수 없었다. 장신성과의 혼인은 그녀 인생의 최대 오점이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실패한 아내였다.

    그러나 딸아이는 달랐다. 서풍엽이라면 장신성과 분명 다를 것이다. 조옥언은 아무리 봐도 예비 사위가 꼭 마음에 들었다. 듬직하고 유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분마저 부족할 게 없었다. 그는 딸아이와 맺어질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였다.

    조옥언은 비록 자신은 행복하지 못했지만 딸 장서열만큼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랐다. 행복은 저절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경솔한 태도는 금물이었다.

    과거 그녀는 남부러울 것 없는 유년 시절에 비추어 앞으로도 모든 것이 저절로 평탄하게 이루어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삶을 쟁취하려는 자들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토록 은밀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울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딸마저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게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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