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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64)화 (64/449)
  • 제64화

    봉황간은 아이들이 아예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듯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진짜라니까? 언젠가 장서열이 손수건을 잃어버린 적이 있어.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손수건이었지.”

    봉황간은 당시 숨 막혔던 긴장감을 떠올리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거의 모든 남자아이들이 손수건을 찾기 시작했어. 그 애가 웃는 모습 한번 보려고 말이야.”

    당시 장서열은 겨우 다섯 살로, 초혜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는 거만했지만 몹시 귀여웠고, 웃는 모습은 어떤 아이보다도 따스했다. 모든 아이들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모두 장서열을 헐뜯기 바빴다.

    “형님도 그랬어요?”

    이야기를 듣던 한 남자아이가 도전적으로 봉황간에게 물었다.

    봉황간은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엄청 귀여웠으니까.”

    아무도 그 말을 부인하지 못했다.

    “그리고요? 빨리 말해 줘요. 누가 손수건을 찾아 줬나요?”

    봉황간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구염락이 주웠어. 내 기억에 그때 구염락의 주변에는 항상 파리가 있었던 것 같아. 손은 숯처럼 까맸고 하도 지저분해서 서쪽 거지들보다도 더 역겨웠지.“

    “…….”

    “장서열은 정말 엄청나게 화를 냈어.”

    장서열이 초혜전에 온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그 사건을 통해 사나운 성격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 뒤로 많은 아이들이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구염락에게 물 한 통을 다 뿌렸어. 그리고 물통까지 던진 뒤, 그에게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온 거지’라고 욕을 했지.”

    하지만 구염락은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쇠로 만든 물통이 머리를 세게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찾아낸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네주려 했다. 손수건은 물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손안에서 이미 얼룩덜룩해진 상태였다.

    “맞다, 게다가 그때 구염락은 너무 어려서 아직 정식 학생도 아니었어.”

    순간 봉황간은 당시 구염락이 정말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온 게 아니었을까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은 그 대목에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다음은요? 어떻게 됐어요?”

    “서열이가 울었어. 손수건이 더러워 졌거든. 그 애가 울자 남자아이들이 열셋째를 아주 호되게 때렸지.”

    봉황간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구염락은 몸을 웅크리고 있었지만 두려워하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의 몸 위로 셀 수 없는 주먹과 발길질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읽기 어려운 표정으로 멍하니 장서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장서열은 더 소리 높여 울었으며, 결국 구염락은 더욱 심하게 맞았다.

    “구염락을 심하게 때렸나요?”

    봉황간은 그날 비참했던 구염락의 모습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입에 담을 수조차 없을 만큼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아픈 내색조차 없던 그의 눈빛은 더 큰 주먹을 불러왔지만, 그는 오히려 맷집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 주었다.

    사실 구염락이 초혜전에 나타난 건 훨씬 오래전 일이었다. 초혜전에 버려지는 음식이 많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마치 방목하며 기르는 짐승인 양 매번 남는 뼈다귀를 기다리곤 했다. 이를 떠올린 봉황간은 드디어 알맞은 표현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는요?”

    봉황간이 느릿느릿 말했다.

    “결국 그는 전각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어. 문 밖에 서있었지. 그가 들어오려고 하면 장서전이 가만 두지 않았어. 아, 너희는 장서전이 누군지 모르지? 태자가 있던 재밌는 시절을 놓치다니 안타깝구나.”

    “그럼 손수건은요? 장서열에게 돌려줬어요?”

    “어림없는 소리! 장서열이 누군데 거지가 만졌던 물건을 만지겠냐. 곧바로 호수에 갖다 버렸어. 태자가 새 손수건을 선물로 줬고.”

    그러나 아이들은 태자라는 단어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이 반문했다.

    “대체 장서열은 어떻게 구염락과 가까워진 거예요?”

    “맞아요. 둘은 어떻게 친해졌어요?”

    봉황간은 난처했다. 더는 아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점은 그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해 온 터였다.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자신이 이제껏 말해 온 소녀가 정말 장서열이 맞는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사실 봉황간도 떳떳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장서열의 주위를 맴돌던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토록 호감이 가는 여자아이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단지 그녀의 입이 조금 거친 게 문제였을 뿐이었다.

    “다 지난 일이야. 이제 그만! 해산이다.”

    “그녀와 열셋째 구염락이 어떻게 사이가 좋아졌는데요?”

    “맞아요! 말해주기 전까지 안 갈래요. 어서 말해 줘요. 모두 기다리고 있잖아요.”

    “형님!”

    봉황간의 얼굴에 그제야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모른다니까!’

    그렇다. 모두가 알지 못했다. 누가 그 시절 구염락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겠는가. 장서열과 구염락은 갑자기 가까워졌다. 언제부터인가 구염락은 항상 장서열의 뒤에 붙어 있었고, 장서열은 모든 이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더는 남을 때리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어느덧 그녀는 초혜전에서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은 권서함의 귀에 봉황간의 이야기가 생생히 들려 왔다. 갑자기 매우 흥미가 생긴 그는 본래 그녀의 자리였으나 이제는 그녀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책상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이 없는 자리는 여전히 어색했다. 권서함 역시 처음 장서열을 본 뒤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대체 언제부터 구염락과 가깝게 지냈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아마 여운이 쫓겨난 뒤였을 것이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추던 구염락은 장서열에게 신임을 얻어 황자 신분으로는 최초로 반독이 되었다. 하지만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미 이전부터 구염락은 장서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여운이 나간 뒤에야 성공한 걸까?’

    권서함은 자리에 외롭게 앉아있는 구염락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최근 현천기는 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기분이 좋았다. 책상 위에 영문 모를 벼루가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세 점의 벼루를 바라본 후 다시 자신의 반독을 쳐다보았다.

    현천기의 반독은 착오가 있었음을 깨닫고 서둘러 벼루를 치웠다. 매번 벼루를 슬쩍 가져가던 사람이 사라지자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듯했다. 현천기는 반독이 벼루를 치우는 것을 확인한 후 벌써 두 시진 째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현천기는 지금 구염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걸어온 길이 비슷했으므로 현천기가 구염락의 마음을 알아맞히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구염락은 수업은 안중에도 없이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음이 어지러운 게 분명했다. 그러나 유별난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제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까운 사람이 떠나 의지할 곳을 잃고도 여전히 차분하게 수업에 임할 수 있다는 것은 구염락이 쉽게 괴롭힘을 당할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었다.

    현천기는 그가 하루빨리 태자로 옹립되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무료한 일상에 재미를 더해 주기를 바랐다. 그때가 되면 야심을 가진 자들의 나날은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한편 구염락의 기분은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누군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저녁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침에는 사람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앞으로 장서열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그는 막연함과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 그는 어떤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걸음을 떼도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며칠 동안 구염락은 매우 조용했다. 수업을 듣거나 장서열의 자첩을 베껴 쓰는 것을 제외하면 그저 먹을 갈 뿐이었다. 그는 혹시라도 자첩에 먹물이 묻을까 두려워 먹물을 말안장 밑에 숨겨두었다가 다시 꺼내면서 손을 긁혔다. 자첩은 새 것처럼 반질반질했다. 그 위로 장서열이 써준 글이 있었다.

    ‘오직 나를 위해 써준 글.’

    구염락은 어린아이처럼 우쭐한 얼굴이 되었다.

    * * *

    어느 날, 구염락은 고개를 숙인 채 남소원으로 돌아왔다. 문 밖에서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던 소리자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는 안중에도 없이 황급히 주인을 향해 뛰어갔다.

    “전하! 전하! 큰일 났습니다! 상의국(尚衣局)에서 금용이 실을 잘못 가져갔다고 고변하는 바람에 신형사에서 그녀를 잡아갔습니다! 전하, 그동안 시중을 든 정을 생각해 금용을 구해 주십시오!”

    소리자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전하, 소리자가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금용이 끌려간 지 벌써 한 시진이 지났습니다!”

    이어 그가 바닥에 쿵쿵 머리를 찧었다.

    “전하!”

    소리자에게 옷자락을 잡힌 구염락이 순간 정신이 들어온 듯 형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구염락의 시선이 소리자의 머리를 감고 있는 붕대에 머물렀다.

    “전하…….”

    소리자는 주인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주인의 눈빛이 이상한 것을 발견한 그가 곧 오들오들 떨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한시 바삐 금용을 구해야 했던 소리자가 다시 이마를 땅에 조아렸다.

    “전하, 금용을 구해 주십시오! 신형사에서 온 사람들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들은 말도 없이 금용이 수놓은 물건들을 모조리 거둬갔고, 그녀가 삿된 물건을 갖고 입궁했다고 했습니다.”

    소리자가 급박하게 말을 이었다.

    “금용이 갖고 온 건 음식이었고 모두 허가 받은 것들이었습니다, 전하…….”

    순간 소리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주인이 자신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자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그제야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소리자는 문득 전하가 지난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기력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자 상태가 온전치 못한 전하가 발작을 일으킬까 걱정되었다.

    “전… 전하…….”

    하얀색이어야 할 붕대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붕대에 피가 물든 흔적을 본 구염락은 갑자기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마치 사사건건 자신을 좌절시키고 만사를 짜증나게 만들려는 듯, 자신의 물건에 싫어하는 색채가 더해져 있었다. 구염락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러워졌구나. 더러워졌어…….”

    당시 구염락은 태의원을 찾아가 가장 좋은 붕대를 가져왔었다. 소리자가 아프지 않고 깨끗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새것으로 다시 머리를 싸매도록 하거라.”

    혹시라도 구염락이 다시 화낼까 걱정이 된 소리자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전하, 노비가 잘못했습니다. 노비가 스스로 몸을 잘 돌보겠습니다! 그러니 전하…….”

    “빨리 가서 붕대를 바꾸지 않고 뭐하고 있는 거냐.”

    구염락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그가 신형사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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