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무지몽매한 여인들 같으니라고!’
장신성이 거칠게 서재의 문을 닫았다. 동시에 그는 책장 앞에서 까치발을 한 채 책을 꺼내던 장서영을 발견했다. 밖에 사람이 있는지를 살핀 그가 얼른 되돌아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널 들여보내 줬느냐?”
장서영이 책을 내려놓고 초승달 같은 눈을 깜빡이며 분별 있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아무도 모르게 들어왔어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장신성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나 착하고 똑똑한 딸인데 겨우 장서열에게 굴복하며 살아야 하다니…….
“착하구나. 이번에는 무슨 책을 찾으러 왔느냐?”
장서영이 독서를 즐겨 한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그는 딸이 서재에 들어오는 걸 허락했다.
“《치론(治论)》이요.”
장서영이 고개를 숙이며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면 그녀를 무척이나 예뻐했다. 나이를 먹으며 아는 것도 늘어난 장서영의 눈에 아버지는 남들 앞에서는 잘해주지 못했지만, 사석에서는 큰언니에게 해주는 것보다도 더 잘해주었다.
딸의 땋은 머리를 바라보던 장신성의 마음이 푸근해졌다. 용모로만 보면 장서영은 장서열처럼 화려하게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청순하고 단아해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쉽게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외모였다.
순간 장신성의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초혜전을 나온 서열이를 대신해 서영이가 그 자리에 들어간다면?’
장서영은 장서열보다 총명했고 사랑스럽게 굴 줄 알았다. 또한 장서영은 성실하고 배움을 좋아했으며, 시와 작문에서 놀라울 만큼 출중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널리 좋은 평판을 얻기에 제격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구미가 당겼다. 장서영은 이리도 말을 잘 듣고 똑똑하니 초혜전에 남은 빈자리를 그녀에게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장서영의 온순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본다면 어쩌면… 그녀가 태자의 눈에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신성은 모든 게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에 몹시 흥분했다.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비록 장서열은 태자의 마음을 제대로 잡지 못했지만 장서영은 달랐다. 장서영은 착할 뿐만 아니라 그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딸이었다. 또한 서출인 장서영이 신분 때문에라도 분명 아비를 위해 많은 일을 해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서영이 적임자였다.
과거 그는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던 조옥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살면서 고개 한 번 숙일 줄 모르는 그녀에게 질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풍엽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지금은 딸에게 마음을 빼앗겼지만 그건 아직 혼인 전이기 때문이리라. 장서열을 아내로 맞이하고 나면 그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의 아내가 그녀의 모친처럼 외모 외에는 별 볼 일 없는 여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버지…….”
문득 정신을 차린 장신성이 더욱 상냥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또 어떤 책이 읽고 싶으냐. 겁먹지 말거라. 비록 네 어머니는 집을 떠나 있지만 이 아버지가 너희 삼 남매 모두 어떤 고생도 하지 않게 잘 돌봐 주마."
장서영이 철이 든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현재 아버지와 어머니가 힘든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독서는 유일한 취미였다.
“큰오라버니가 《풍토치(风土治)》에 관한 책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도 읽어보고 식견을 넓히고 싶어요.”
“우리 서영이는 정말 대단하구나. 《치론(治论)》과 같은 책도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장신성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장서전, 장서열 두 멍청이는 대여섯 살이 되어서야 겨우 아버지의 이름을 외웠다. 반면에 그와 기 씨 사이에 태어난 장서양과 장서목은 훨씬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그들의 총명함이 전부 자신에게서 물려받은 재능이라는 걸 모르는 학당 사람들은 없었다.
장서영이 수줍은 듯 붉게 달아오른 앙증맞은 얼굴을 들었다.
“매우 간단한걸요…….”
“네 언니는 너만 할 때 희극만 봤다.”
장신성은 장서열이 희극에 빠져있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조옥언은 딸이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딸의 평판이 더욱 훼손되기를 바라는 꼴이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또 화나셨어요? 언니는 희극 보는 걸 좋아하니까 괜찮아요. 대신 제가 안 볼게요.”
“착하기도 하지.”
장신성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가 인정하는 세 자식은 그와 마찬가지로 재능과 학문을 겸비했지만 신분이 비천했다. 그는 이미 그런 삶을 살았지만, 적어도 아이들에게만큼은 똑같은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서자라 해서 아들들을 아무 여자와 혼인시키지 않을 것이며, 딸 서영 역시 별 볼 일 없는 남자와 맺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세 아이에게 적자와 동일한, 근사한 미래를 안겨줄 작정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딸을 껴안고 다른 한 손에는 《치론(治论)》 두 권을 손에 들었다.
“가자. 아버지와 함께 학당에서 돌아오는 두 오라버니를 마중 나가자꾸나.”
“좋아요! 아버지가 최고예요.”
장서영이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역시 그의 마음에 쏙 드는 건 장서영이었다.
* * *
조 노부인이 손을 쓴 후, 장서열은 서서히 초혜전에서 모습을 감췄다.
구염락은 망연자실했다. 조 노부인이 입궁해 태후를 만난 뒤부터 장서열은 초혜전에 잠시 들러 물건만 가지고 갈 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그와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깨끗이 자리를 정리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게 벌써 이틀째였다.
구염락은 주변이 텅 빈 것만 같았다. 매일 같이 기대하던 초혜전에서의 생활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빠졌다. 모든 수업이 어수선하게 느껴졌고 점점 수업에 흥미를 잃어 갔다. 그는 멍하니 앉아 있다 장서열의 물잔을 채우기 위해 습관처럼 주전자를 들었고, 곁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곤 했다.
장서열은 자신의 자리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책상 위에는 평소 심심할 때마다 그녀가 몰래 새겨놓은 그림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흔적은 깊지 않았지만 다분히 고집스러운 데가 있었다. 물론 그는 더 이상 오지 않는 장서열을 탓할 수 없었다. 이미 그녀에게서 충분한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에게 이제 다 컸으니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처럼 잘 해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너무 추웠다. 곁에 머물던 의기양양한 얼굴이 사라지자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서열 누님.
그녀는 고작 팔 년밖에 되지 않은 그의 생애에서 절반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을 함께 했지만 그의 모든 희로애락을 앗아가 버렸다.
과연 그녀가 돌아올 수 있을까. 그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 봉부를 받지도 못했는데 어째서 그녀는 갑작스레 떠난 걸까.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서열 누님은 이제 나를 필요치 않는다.’
그는 다시 구석에 버려졌고 병든 하인처럼 잊혀졌다. 그런 그를 누구도 찾지 않았다.
초혜전도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평소 공기처럼 말이 없던 장서열의 공백이므로 그다지 영향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초혜전에는 마치 생기가 사라진 듯했다.
여자아이들은 더 이상 한데 모여 누군가의 옷차림을 폄하할 동력을 잃었으며 남자아이들은 몰래 바라보던 대상을 잃었다. 초혜전의 모두가 마치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무료해졌다. 여자아이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장서열을 바라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아이들은 학업에 소질도 없던 장서열이 초혜전에서 가장 빛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풀밭에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린 몸에 산들바람이 스치자 그녀가 허리를 살짝 굽혔다. 여름날이 가을처럼 청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토록 환히 빛나던 장서열은 이제 떠나고 없었다. 아이들은 그제야 주변의 색채가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혜전은 며칠간 쥐죽은 듯 고요했고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철이라도 든 양 공부 외 다른 일에 몰두하지 않았다.
‘장서열은 정말 얄미운 사람이었을까?’
아이들은 마침내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녀는 영리했으며 사리를 분별할 줄 알았다. 누군가 자신을 험담할 때에도 그녀는 결코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조용했고 사람을 멀리했을 뿐, 그녀는 사람들의 원망과 분노를 살 만한 일을 벌인 적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고요함은 때로는 모든 아이들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그녀에게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이든 내보이고자 했다. 이러한 조바심이 쌓이면 언젠가는 돌연 폭발하기 마련이었다.
장서열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은 그나마 그녀의 부적절한 행적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마치 그 악행을 밝혀야만 기분이 나아질 것처럼 과거의 일을 소문내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그녀의 빈자리가 주는 허전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중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봉황간이 떠드는 이야기였다.
봉황간은 장서열의 못된 일화와 관련하여 거의 입을 다물지 않는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그녀가 처음 초혜전에 들어왔을 때 태자를 등에 업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혔는지가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동기를 무시했고, 여자아이들에게는 특히나 더욱 거만하게 굴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녀가 구염락을 몹시 괴롭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그럴 리가? 구염락에게 큰소리 한 번 친 적 없던 장서열이 그를 괴롭혔었다고?
“정말이에요? 그녀가 정말 구염락을 괴롭혔다고요?”
“보나마나 거짓말이겠지.”
대다수가 믿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지난 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소수의 선배들은 갑작스레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중요 인물이 되었다.
봉황간이 단정 지어 말했다.
“진짜라니까! 어렸을 때 장서열은 지금처럼 유순하지 않았어. 눈 한번 깜짝 않고 사람을 때렸지. 그녀의 첫 번째 반독은 뺨를 맞고 쫓겨났어!”
“네?”
다시 한 번 경악하는 아이들의 반응에 봉황간이 더욱 득의양양해졌다.
“그때는 구염락도 지금처럼 대단하지 않았어.”
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의 구염락은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걔는 예전에 흙만 가지고 놀았거든. 엄청 더럽고 못생겼었어.”
“그럴 리가…….”
“너희는 모르겠지만 걔는 처음 왔을 때 손으로 밥을 집어먹었어.”
말을 잇는 것과 동시에 그가 손으로 밥을 집어 먹는 동작을 선보였다.
“누군가 먹다 남긴 음식이 있으면 마구 달려들어 쟁반을 통째로 훔쳐갔지. 그걸 먹는 모습은 정말 역겨웠어.”
“…….”
“됐다, 됐어. 그만 하자. 어차피 아주 오래전 일이야. 그때 구염락은 장서열의 신발을 드는 시늉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정말이에요?”
그의 후배들은 딱히 구염락이어서가 아니라 누군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분명 선배가 자신들을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장서열이 거만하게 구는 모습이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