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장서열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당자가 음흉하게 웃으며 소곤거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낚았나 봐? 구염락에게 호노(胡老)의 작품까지 아낌없이 꺼내 구염락에게 뇌물로 바친 걸 보면 확실해.”
“말 좀 곱게 할 수 없어?”
“이건 다 누님을 위해서야. 세자 형님이 위기의식을 느끼도록 말야. 안 그래, 열셋째?”
구염락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 역시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장서열이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황당한 논리군. 그나저나 만정은? 어서 만정에게 물 좀 갖다 줘.”
만정은 사람들에게 방금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치 누각 위로 날아오를 듯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구염락에게 가라고 해.”
당자가 다리를 쭉 뻗은 채 장서열의 옆에 앉으며 구염락에게 명령했다.
“네가 가.”
매우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당연하게 여기는 당자의 태도에 유난히 곤두서 있던 구염락은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 순간 그는 반독인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자각하게 되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잘해 준다면 그것은 자신이 서열 누님의 반독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서열 누님에게 쏟는 정성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구염락은 최근 들어 몹시 풀이 죽어 있었다. 당자는 장서열의 모든 간식을 책임졌고 권서함은 그녀에게 온갖 진귀한 물품들을 선물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신을 제외하면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이 서열 누님에게 기쁨을 주는 것 같았다.
매번 장서열의 감탄을 얻어내는 당자, 권서함과 달리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최근 며칠간 장서열은 초혜전에 매우 늦게 오고 아주 일찍 떠났다. 구염락은 감히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가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구염락은 권서함과 당자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녀가 초혜전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권서함 역시 몹시 놀란 것 같았다.
“소리소문 없이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아직 몇 달 남아 있는데, 어째서?”
당자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기 있는 게 뭐가 즐겁겠습니까. 안 오는 게 낫죠.”
“스승님께서 태자 전하를 가르치게 된 건 남다른 식견을 가진 당대의 학자이기 때문이야.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를 모실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아.”
“그거 들어 봐야 어차피 이해 못해요.”
잎사귀를 입에 문 당자가 권서함의 말에 반박했다.
“그런 기회는 개나 물어가라죠, 뭐.”
못 알아듣는 건 당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장신성은 예복도 벗지 않은 채 성큼성큼 내원에 들어섰다. 그는 조옥언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열이를 초혜전에서 나오게 만들다니!’
초혜전에서의 수학은 높은 신분의 상징으로 그 자체만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그만 두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내막을 아는 이들이야 스스로 물러났음을 이해하겠지만 멋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그의 딸이 볼썽사나운 일을 저질러 초혜전에서 쫓겨나는 꼴일 터였다.
장신성은 문 앞을 가로막는 여종을 밀치며 곧장 걸음을 옮겼다.
“조옥언!”
그러나 장신성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중앙에 앉은 노부인을 발견한 그가 얼이 빠진 얼굴로 서둘러 자세를 고쳐 잡았다.
“장모님…….”
조국공(赵国公) 노부인의 엄숙한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래.”
선명한 남색 옷에 자단목 염주를 목에 건 그녀가 마치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으로 꼿꼿하게 그를 훑었다.
올해 여든아홉에 접어든 그녀는 고명부인(诰命夫人, 황제가 내리는 봉호를 받은 부녀)이자 조국공부에서 눈에 띄게 장수 중인 노부인이었다. 지난해 부군이 작고한 후 그녀는 지금껏 자녀들의 효도를 받고 있었다.
“왔는가.”
긴장한 장신성이 정중하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아내를 경멸할지언정 노부인에게는 감히 삿된 마음을 품을 수 없었다. 그는 노부인을 존중하고 두려워했다.
그가 노부인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친히 기 씨를 자신의 곁으로 보내준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녀를 두려워하는 건 노부인의 말 한 마디가 관직 생활의 희노애락을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조 노부인은 입궁을 즐겨했으며, 그녀가 궁에서 나올 때면 반드시 한 명은 관직을 잃곤 했다.
“장모님께서 오실 줄 몰랐습니다. 미리 알고 시중들지 못해 송구합니다.”
오랫동안 그를 응시하던 노부인이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찻잔을 들었다.
“가족끼리 법도를 차려 무엇 하겠는가. 내 갑자기 생각나서 건너왔다네. 자네 아들 서전이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참이야.”
“심려 끼쳐드렸습니다.”
노부인은 장신성의 고분고분한 태도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딸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일찍 돌아온 것일 테지. 자네는 가서 일 보시게.”
장신성은 더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조옥언을 힐끗 바라본 뒤 달갑지 않은 얼굴이 되어 물러났다. 조옥언은 시종일관 찻잔을 든 채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잠시 후, 조 노부인은 우렁찬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찻상 너머에 있는 딸의 머리를 움켜잡으려 했다. 힘이 넘치는 동작이었다.
“부부 사이가 이 지경이 되다니, 대체 언제까지 걱정하게 만들 작정이냐! 남편을 깔아뭉개는 네 자신이 그리 대단하더냐? 내가 널 이리 가르쳤더냐! 이 어리석은……!”
조옥언은 익숙하게 어머니의 손길을 피했다. 홍촉은 이미 하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하인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상부 주인의 위엄을 잃을 뻔했다.
“어머니, 저도 나이를 먹었습니다. 아직도 손을 대려 하시다니요.”
“나이 먹은 줄은 아는구나!”
조 노부인은 이제 할머니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딸의 나이를 생각하며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네 꼴을 보거라. 내 방금 전 제 아들에 대해 얘길 했는데도 장신성 그 작자는 눈 하나 깜짝하질 않더구나. 두 내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헤어지기라도 할 셈이냐? 연경의 웃음거리가 될 게야?”
“그는 감히 그러지 못합니다.”
조옥언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렇다면 빈손으로 나가야겠지요.”
귀가 밝은 조 노부인은 그 즉시 의자에서 내려와 다시 한 번 딸을 때리려다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일단 참았다.
“넌 아직도 너만 옳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래, 감히 널 어쩌지는 못하겠지. 본처가 너여야 제 자리도 계속될 수 있다는 걸 잘 알 테니 말이다. 그런데 후일은 어쩔 것이냐? 네가 곱게 보이지 않는데 네 자식들이라고 곱게 보일 리 만무하지 않느냐. 네가 먼저 죽기라도 하면, 그 때는? 가산을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지가 그에게 달려 있다는 걸 왜 몰라!”
“설령 제가 먼저 죽는다 해도 제 살아생전에 서전이가 받습니다.”
조옥언은 기 씨의 자식들이 제 자식의 것을 빼앗도록 두고 볼 마음이 없었다. 조 노부인은 딸의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뜯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거라. 나도 지쳤다. 서열이가 앞으로 집에서 수학한다고 하니 제대로 가르칠 생각이나 하거라!”
모친의 태도가 누그러지자 조옥언이 얼른 가까이 다가가 좋은 말로 그녀를 달랬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서열이는 제 딸이에요. 어찌 소홀히 하겠어요.”
조 노부인은 방금 전 장신성의 태도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교양 있고 온화하던 소년은 어느새 세파에 찌들어 있었다.
“서열이가 장신성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면 그가 지금처럼 아껴 주지 않을 거라는 네 말이 어쩌면 맞는지도 모르겠구나.”
조옥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오늘 그녀가 조 노부인을 집으로 모신 건 어머니를 통해 태후를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태후의 윤허만 얻는다면 장서열은 정식으로 집에 머물 수 있었고 더는 태자와 엮이지 않을 수 있었다.
“역시 어머니가 최고세요. 다 제 잘못이에요. 그가 딸아이에게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 뭘 몰랐다는 게야? 뭐든 할 수 있다 믿었겠지. 네가 집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니 그를 조종할 수 있다고 믿은 게 아니냐! 허나 남자라는 게 어디 조종한다고 조종당하는 존재더냐!? 어리석은 것!”
그녀가 더한 욕을 하지 못한 채 삼켰다. 고개를 숙인 조옥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뭐든지 할 수 있을 리가요.”
순간 할 말을 잃은 조 노부인이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는 더는 딸을 나무라지 않기로 했다. 과거 궁에서 벌어진 그 사건은 딸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주었다.
조옥언에게도 잘못이 있었지만 조 노부인과 조 노야(老爷子, 조 노부인의 죽은 남편)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태자비 선발을 위하여 첫 간택에 들어갔을 때, 누군가 마마(嬤嬤)들을 사주하여 딸아이의 처녀성을 잃게 만들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문의 체면이 걸린 일이었기에 차마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일은 결국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으나 결과적으로 조 씨 가문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조옥언은 당시 황제와 얼굴을 붉히며 다툴 정도로 분노했다.
그러나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조 씨 가문은 그 해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인물을 급히 사위로 맞아들였다. 세월이 흘러 장신성은 어느 정도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으나 슬슬 처가댁을 향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 노부인은 변화한 그의 모습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장신성이 계속 나약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면 그녀는 오히려 그를 어딘가 모자란 인간으로 여겼을 것이다.
“서열이가 아니라면 아닌 게지. 내가 가서 태후께 얘기하마.”
학업을 다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초혜전을 떠나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주어진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무엄하게도 황실의 교육을 가벼이 여겼다는 모함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조 노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딸아이보다 몇 배는 더 아리따운 외손녀가 떠올랐다. 그녀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미모가 없는 것이 어쩌면 덕일 수도 있다. 조 노부인의 외모는 평범했지만 딸과 외손녀는 공교롭게도 이미 세상을 떠난 조 노상야(老相爷, 조 노야)를 꼭 빼닮아 있었다.
어머니의 말에 조옥언이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관음보살이나 다름없으시온데, 전생에 죄라니요.”
“말은 잘하는구나. 그래도 네가 일의 경중을 알아 다행이다. 충왕부와의 혼사는 잘한 일이지. 풍엽이는 분별 있는 아이니 그가 서열이 곁에 있으면 장신성도 감히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 나도 마음 놓고 네 아버지를 따라 갈 수 있을 게야.”
조옥언이 즉시 반박했다.
“어머니는 백 세까지 장수하실 거예요.”
“몹쓸 것, 네가 내 속만 덜 썩인다면 이 어미는 정말 백 세까지 살 수 있을 게야.”
어렸을 때부터 애지중지하며 키운 딸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어여삐 여긴 탓에 결국 오늘과 같은 성격으로 자라고 말았다. 조 노부인은 그래도 외손녀인 장서열이 딸을 닮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외손녀가 부디 딸의 전철을 밟지 않기만을 바랐다. 우선 태자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와는 거리를 두는 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