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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61)화 (61/449)

제61화

구염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본심에 어긋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일을 사실대로 고한다면 주변에 있던 모두가 자신을 죽을 만큼 두려워하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송 태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 아룁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그는 눈앞의 어여쁜 아가씨가 황제 폐하께 깊은 총애를 받고 있는 좌상부의 여식이며, 자신이 방금 구한 이는 그녀의 반독인 구염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열셋째 전하께서는 매우 용감했습니다. 류 공자가 물에 빠지자 홀로 물에 뛰어들어 구명하려 했습니다. 그야말로 용기 있는 소년의 모범입니다.”

순간 감격한 장서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방금 전까지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천지를 뒤흔들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정말 네가 사람을 구했어? 장하다. 역시 난 네가 다를 줄 알았어. 우리 열셋째는 용감하고 착해.”

이런 아이가 어떻게 패도정치를 벌이는 무정하고 냉혈한 영덕제(赢徳帝)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번 생에서 열셋째는 분명 온화하고 우아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인덕황제(仁德皇帝)가 될 것이다.

장서열은 구염락을 위해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의 성격이 변하는 것만큼 그녀를 안심시키는 건 없었다. 이는 그녀의 가족이 장차 무사하리라는 걸 의미했다.

구염락 역시 장서열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바보 같고 맹목적인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순간 깊은 공포와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는 당장이라도 구덩이를 파고 스스로를 묻어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저지른 불미스러운 일들이 서열 누님의 눈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급히 달려온 당자가 구염락을 홱 밀어낸 뒤 긴장한 얼굴로 장서열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가 돌연 겁에 질려 소리쳤다.

“울었구나! 정말 울었어!”

바닥에서 일어난 구염락이 다시 조용히 장서열에게 다가갔다. 장서열은 당자의 말에 얼굴을 닦았다.

“울다니? 진작에 그쳤는걸.”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꼼꼼하게 얼굴을 닦은 뒤 고개를 들었다.

“어때? 이제 감쪽같지?”

당자가 머리를 움켜쥐고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다 죽일 테다! 누님을 울게 만든 망할 자식은 이 몸이 불구로 만들어 주겠어!”

그는 서풍엽에게 가슴을 두드리며 맹세했었다. 장서열을 잘 보호할 것이며, 그녀를 괴롭히는 이는 머리를 잘라 그에게 보내 주겠노라고.

그러나 자신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그녀가 울고 말았다. 그것도 몹시 상심하여 울었다. 그는 서풍엽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장서열은 당자가 지르는 고함 소리에 모여드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흘겨보았다.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당자를 잡아당기며 자리를 벗어났다.

구염락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송 태의는 부귀영화를 누릴 복이 없는 스스로에게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뒤 다른 이와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상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당자의 귀를 꼬집은 장서열이 서둘러 그를 멀리 떨어뜨렸다.

“또 무슨 요란을 떠는 거야! 난 하마터면 구염락이… 그가… 어쨌든, 아무 일도 없었어.”

당자는 자기도 모르게 장서열의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구염락이 죽은 줄 알았구나!”

장서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다문 건 제왕과 관련된 일을 입에 올리지 않던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내버려 두자. 어차피 훗날 기회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당자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그렇다고 울면 어떻게 해! 세자 형님이 알면 분명 상심할 거야.”

당자의 말에 장서열은 자신을 바래다주던 서풍엽의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순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알았어. 널 용서해 달라고 말해볼게.”

“정말?”

당자가 즉시 과장된 몸짓으로 그녀를 껴안았다.

“악!”

곧바로 발을 부여잡은 당자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발을 밟다니! 누님을 걱정하는 나를 어떻게 밟을 수가 있어? 난 누님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달려왔는데 이제 보니 전부 저… 앗, 다른 쪽 발은 밟지 마! 알았어, 그만 할게!”

구염락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만약 장서열이 당자의 발을 밟아 놓지 않았다면 그가 직접 나서서 당자를 떼어냈을 것이다.

구염락이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억눌렀다. 충동이 가신 후에야 비로소 조심스레 고개를 든 그가 여전히 소란스러운 그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파 왔다.

“황제 폐하께서 명하시길, 호수나 강가에 머물지 말고 모두 학당으로 돌아가라 하십니다.”

아이들은 전각으로 돌아갔지만 류소경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새로이 스승으로 임명된 태자태보(太子太保)는 감히 그들을 단속하지 못했다.

* * *

류소경은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권서함은 류소경의 곁을 지키며 그가 무사히 가족을 만난 뒤에야 비로소 학당에 돌아와 남은 수업을 들었다. 모두들 권서함에게 류소경의 안부를 물어보고 싶어 했지만 감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섭궁개는 전전(前殿)에 나아가 황제와 류 씨 가문에 사고의 경위를 고했다. 태자태보는 자습을 명한 후 아이들을 전각에서 쉬게 하면서 외출을 금지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반독들은 각자의 주인을 위해 오후 다과를 받으러 갔다.

한편 장서열은 쉬는 틈을 타 권서함에게 다가갔다.

“그는 괜찮아요?”

그녀는 곧 초혜전을 떠날 예정이었다. 새로 사귄 친구에게 예의와 관심을 보여주는 게 좋을 듯했다.

권서함의 주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감히 말을 걸지 못하던 아이들은 장서열이 나서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자 했다. 만정은 장서열과 가까운 덕분에 비교적 당당하게 엿들을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권서함은 장서열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며 반독의 자리에 앉았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녀에 대한 존중을 엿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

“괜찮아졌어요. 알다시피 태의원에는 출중한 의원들이 많으니까요. 태의 말이 꾸준히 약을 복용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다만 기력이 쇠했기 때문에 몇 년은 요양을 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요양하며 지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죠.”

장서열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류소경은 구염락이 구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다행이네요. 향심호는 워낙 위험한 곳이니 그만하기를 천만다행이에요.”

“그래요. 폐하께서 류 후야(柳侯爷, 류소경의 아버지)께 향심호 정비를 명하셨다고 해요.”

장서열은 실제로 향심호가 정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는 향심호의 연꽃을 매우 좋아했기에 제위를 물려준 이후에도 그곳은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이후 여러 비빈의 자녀들이 적지 않게 죽어 나가며 호수는 차츰 모두가 기피하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알 수 없는 실족사가 발생하지 않았다. 모두들 행여나 구염락의 노여움을 사게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순간 장서열이 놀란 눈빛으로 권서함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그곳의 지형을 이용하여 류소경을 해하려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각을 읽은 권서함이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우연이었어요. 류소경도 깨어난 후에 자신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라고 인정했어요.”

장서열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 또한 음모의 낌새 같은 건 느끼고 싶지 않았다. 가까운 주변부터 그리 위험하다면 대체 어느 곳이 안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불의의 사고였군요.”

“그렇죠.”

사실 권서함은 여전히 사고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현장에는 류소경이 급히 고삐를 당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토록 갑작스럽게 고삐를 당겨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속도가 너무 빨라서 놀랐을 리 만무했으며, 만약 땅에 있던 무언가가 말을 놀라게 한 것이라 해도 깨어난 류소경이 이를 몰랐을 리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권서함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이해가 될 때까지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다과를 들고 오던 구염락은 권서함의 책상에 앉은 장서열이 그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했다. 품위 있는 소년과 우아한 소녀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순간 구염락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통제하기 어려운 사나운 감정이 폭풍처럼 그를 덮쳐 왔다.

구염락은 애써 이건 옳지 않은 감정이라 되뇌이며 있는 힘을 다해 충동을 억눌렀다.

구염락을 몰래 따라 나갔던 당자는 다시 전각으로 들어오려다 앞에 선 구염락이 움직이지 않자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곧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확인한 당자가 별안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이 몸은 누님의 매력이 끝이 없을 줄 알았어. 권서함 저 애늙은이 정도야 서열 누님에게는 식은 죽 먹기지! 역시 장서열이야.”

세자 형님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말투였다. 당자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구염락을 툭툭 쳤다.

“권 공자에게 밉보이지 마. 미리 귀띔해 주겠는데 권서함 저 녀석은 나도 못 건드려. 신분이 높기도 하지만 일단 능력이 아주 뛰어나거든. 눈치 빠른 놈들은 어떻게든 녀석과 친분을 쌓으려고 하지. 너도 잘 사귀어 두면 나중에 이득 좀 보게 될 거야.”

‘특히 네가 나중에 황자로서 봉부를 하사 받고 출궁하는 날엔 더더욱 말이지.’

마지막 말을 삼킨 당자가 그를 재촉했다.

“어서 가자. 뒤에 줄이 잔뜩이다.”

구염락은 발걸음을 옮기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당자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또 누군가와 서열 누님을 나누게 되었는데 대체 무엇이 이득이란 말인가. 서열 누님의 관심을 받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그만큼 자신을 향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뜻이었다.

구염락과 당자가 오는 모습을 본 권서함이 예의 바르게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그는 비록 사람들과 왕래가 많지 않았지만 한 번 친해지면 어울리기 편한 사람이었다.

권서함은 구염락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류소경의 일로 구염락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이 분명하므로, 그는 친구를 대신하여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명가의 자첩 몇 부를 선물로 내밀었다.

“모두 명필가가 쓴 기록이니 한 번 훑어보십시오. 혹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걸 드리겠습니다.”

구염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한 선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권서함은 장서열에게도 일부를 선물했다. 결국 구염락의 눈에 권서함은 장서열의 체면을 생각해 자신에게 잘해 준 사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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