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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60)화 (60/449)

제60화

아이들 사이에서 슬쩍 머리를 내민 헌원상이 쭈뼛쭈뼛 앞으로 나왔다. 그는 구염락을 보살피려 했으나 인파에 밀려 결국 바닥에 쓰러진 채 발에 치이는 신세가 되었다. 헌원상은 눈물을 머금은 채 슬그머니 물러갔다.

초조한 얼굴의 태의들이 분주하게 오고 갔다. 줄곧 끼어들지 못한 송 태의는 아무리 바삐 움직여도 류소경을 구할 기회를 얻지 못하자 그 무리에 끼어들기를 포기하고 마지못해 구염락에게 다가갔다. 그가 구염락을 꾸짖었다.

“대체 어린 꼬마가 물에는 왜 뛰어드느냐. 물이 차가우니 다리에 경련이 난 게지.”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그는 최선을 다해 구염락의 다리를 주무르고 혈도를 눌러 주었다. 머리에 엉켜 있는 수초를 뜯어내며 구염락은 마음씨 좋은 태의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계획대로 원한을 갚은 뒤 그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머리 위 수초도 거슬리지 않았고 하늘도 몹시 맑아 보였다. 이제 류소경만 영원히 사라져 준다면 이 세상은 더욱 눈부실 것이다. 물론 초혜전 시위들은 귀족 자제인 류소경을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터였다.

만약 류소경이 죽지 않더라도 큰 상해를 입었으므로 그는 완벽하게 일을 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구염락은 사경을 헤매는 류소경이 몇 번씩 눈동자를 뒤집고 흰자위를 보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어나지 마, 제발.’

그 시각 장서열은 간신히 구경꾼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사람의 목숨이 걸린 사고였기에 너무 많은 인파가 앞으로 몰려든 탓이었다.

그녀는 그 틈을 끼어드느라 엉망이 된 겉옷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구염락을 발견했다. 온몸이 흠뻑 젖은 그가 의사에게 눌려 바닥에 누워있었다.

놀란 그녀가 순식간에 앞으로 돌진했다. 덕분에 그녀의 뒤에서 몸을 기대어 균형을 잡으려던 권서함은 하마터면 바닥으로 구를 뻔했다. 그는 즉시 자세를 바로잡아 바닥에 넘어질 뻔한 낭패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구염락…….”

긴장하여 달려든 그녀가 순간 구염락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열셋째 구염락의 모습에 그녀는 평소처럼 소리 내어 그를 부를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된 거야…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이잖아! 아주 잠깐이었는데……!’

송 태의가 아리따운 아가씨의 등장에 얼른 손아랫사람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아가씨,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는 괜찮습니다. 통증이 빨리 가라앉으라고 잠시 눕힌 겁니다. 그래야 편히 숨을 쉽니다.”

그러나 장서열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송 태의는 비통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토록 울다니…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저렇게 울지는 못하겠구나.’

“아가씨, 어째서 우시는 겁니까? 사람을 잘못 보신 게 아닐까요? 위독한 사람은 류 공자인데…….”

류소경의 시중을 들 기회를 놓쳤기에 송 태의는 류 씨 가문에서 내리는 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는 정말 운수가 나쁘다고 생각했다. 태의원에서 가장 낮은 직급을 가진 그에게 돌아오는 이득은 별로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굴러들어온 호박을 놓친 게 아닌가.

진작 눈을 뜨고 있던 구염락이 장서열의 오열에 놀라 즉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가 소매로 얼굴을 쓱쓱 닦은 뒤 얼른 웃어보였다.

“서열 누님, 전 정말 괜찮아요. 울지 말아요……. 보세요, 전 당장 뛸 수도 있어요.”

단숨에 송 태의의 손을 뿌리친 그가 얼른 일어나 힘껏 제자리에서 뛰어 보였다.

송 태의는 어안이 벙벙해져 조금 전까지 움직이지 못했던 구염락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의술이 언제 이렇게 발전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장서열은 더욱 슬프게 울었다.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가 죽은 줄로만…….

구염락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쩔쩔맸다. 류소경의 생사 같은 건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장서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서열 누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어요. 누님… 서열 누님… 어서 나를 봐요. 울지 말아요.”

장서열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었다. 희뿌연 시야 사이로 애써 자신을 달래려 노력하는 구염락이 보였다. 손을 내민 그녀가 그를 꼭 껴안은 채 더욱 구슬프게 울었다.

“왜 물에 빠진 거야! 어찌 그리 조심성이 없어……. 어떻게 나를 두고 그럴 수가 있니. 어떻게…….”

수많은 말이 쏟아졌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그것도 너무나 절실하게.

죽음도 불사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대다수의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용포를 걸친 구염락의 매력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한 게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사실을 인정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냉궁에서 보낸 스무 해도 그를 향한 사랑 앞에선 그저 지나간 날들에 불과했다. 만약 그녀의 딸이 그토록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이후로도 줄곧, 맹목적으로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어떤 남자도 그와 같을 수 없었다. 뛰어난 재능과 지략으로 천하를 정복한 그는 세상의 통치자였다. 그가 소유한 것은 단순한 황위가 아닌, 피로 주조한 광휘(光辉)였다. 발이 닿는 어디든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를 사랑한 한 여인일 뿐이었다.

그동안 끊임없이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결국 이 순간 장서열은 깨달았다. 이번 생에서 역시 구염락에게 한 번쯤은 사랑 받기를 원했다는 걸, 그렇게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을 사랑해 줄 강한 남자를 찾고 있었다는 걸.

이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운 짓인가. 스스로 화를 자초하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는 건 자신의 가족을 외척이라는 저울 위에 매달아 두고 시시때때로 세간의 감시와 제약을 받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적은 구염락을 사랑하는 수많은 여인들이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내리고 구염락의 마음 한편을 차지하려던 여인들. 그녀는 이미 참혹한 전쟁을 치렀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무수한 여인들을 베어냈다. 장서열이 여자아이들에게 선뜻 곁을 내주지 않는 이유는 그들 대다수가 과거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다시 스스로를 같은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우매했다. 지난날과 똑같은 길을 걷는다면 과연 미래에 무엇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구염락은 그녀에게 과거 금용의 가족을 보호한 정도의 아량은 베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만큼이나 자신을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건 도박이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아? 그가 정말 날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해? 그토록 총애 받던 금용조차도 결국 형제를 잃었어!’

물속에 잠긴 건 다른 이가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대체 뭘 한 거야…….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했어……. 그에게 버림받은 것도, 사랑을 얻지 못한 것도 결국 인정하지 못했던 거야.’

어리석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너무나 사랑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거나 수치로 여긴 적이 없었다. 몹쓸 남자와 혼인을 했다고 여긴 적도 없었다.

그만큼 모든 걸 내건 사랑이었으나, 이제는 그 사랑을 거둬야 했다.

탐내지 말아야 할 남자였다. 이미 한 번 죽음을 겪은 그녀에게 사랑은 결코 최우선이 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새로운 삶이 있었고, 그보다 더 그녀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가족이 있었다.

다시 구염락이 욕심난다는 이유로 같은 전철을 밟을 수는 없었다. 그를 둘러싼 피바람은 절대로 내명부를 평화롭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인들을 끊임없이 발버둥 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남자의 손을 놓아야 했다. 그녀가 사랑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또 제 손으로 파괴한 그를.

장서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꽂힌 나비 장식이 하늘하늘 움직였다. 희고 보드라운 옷을 입은 그녀의 맑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여전히 아이다운 천진함이 남아 있었다. 구염락의 어깨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놀란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울음을 멈추고 웃어 보였다.

한때 그를 깊이 사랑했던 과거와 그로 인한 모든 일들은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마터면 이번 생에서도 같은 남자를 사랑할 뻔했다.

그녀는 미련 없이 작별을 고하기로 했다.

“서열 누님…….”

구염락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서열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녀는 눈앞의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미래를 떠올렸다. 그는 동정 받을 필요도, 누군가에게 그러한 자격조차 줄 이유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존재와 관계없이 그는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고, 어떠한 상이나 은혜도 필요치 않았다. 그는 어떠한 것이든 스스로 쟁취하면 그만인 제왕이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볼품없는 시절을 함께 했다는 흔치 않은 경험에 만족하기로 했다. 잊고 있었으나 그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뛰어난 사람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그녀가 잘 대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서풍엽과 혼인하여 조용한 일생을 보낼 터였다. 비록 만고에 길이 남을 열렬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흐르는 물처럼 고요한 세월을 보내고, 그들의 자손을 무릎에 앉히며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장서열은 이미 앙숙이 되어 있는 동기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에게 과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구염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초혜전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손을 뗄 때였다.

그때 섭궁개가 난데없이 뛰어들었다. 그는가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불쑥 구염락을 들어 올린 후 손으로 그의 이마를 콕콕 찔렀다.

“죽고 싶은 게냐?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쩌려고 겁도 없이 나서! 네가 누굴 구한다고! 넌……!”

그러나 구염락은 섭궁개를 뿌리쳤다. 그리고 다시 장서열의 옆에 웅크리고 앉아 그녀가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녀가 다시 운다면 그는 자신의 얼굴 껍질을 벗겨 그녀에게 갖다 바쳐서라도 그를 실컷 보게 해줄 요량이었다.

섭궁개는 황당한 얼굴로 텅 빈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손이 다 저릿했다.

장서열은 수많은 감정을 뒤로한 채 기쁜 얼굴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네가 사람을 구했어?”

눈물 자국을 지운 뒤였지만 애처롭고 가련해 보이는 건 여전했다. 곁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권서함은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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