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58)화 (58/449)

제58화

구염락의 머릿속에 이미 권서함이 보인 정중한 태도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권서함과 셀 수 없이 자주 마주쳐 왔지만 단 한 번도 오늘처럼 정중한 태도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가 속으로 비웃었다.

‘당연히 서열 누님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겠지.’

한편, 섭궁개는 다시 돌아오는 구염락을 바라보며 화가 치밀어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구염락! 지금 당장 마장 오십 바퀴를 돌아라.”

순간 구염락의 눈에 말 위에서 날아갈 듯 질주하는 류소경이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류소경에게 달려가 그를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구염락! 내 말 안 들리나? 여든 바퀴다!”

섭궁개의 미움을 사지 말라고 했던 장서열의 말을 떠올리며 결국 그는 걸음을 옮겨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류소경을 향한 채였다. 빨리 벌을 해치우고 다음 단계인 장애물 경주를 하러 가야 했다. 그는 류소경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참이었다.

섭궁개는 흡족과 감탄이 뒤섞인 얼굴로 날 듯이 뛰는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구염락처럼 우수한 제자를 두다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한편, 버들가지가 휘날리는 반대편에서는 모여든 이들의 열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시합이 시작됐다.

화살촉을 바라보는 장서열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활시위를 당긴 팔에는 안정감과 힘이 느껴졌다.

그녀의 궁술 실력은 매우 탄탄했다. 여러 해에 걸쳐 밤낮으로 연습한 결과였다. 화려한 동작이나 보기 좋은 아름다움 없이 오로지 결과로 증명하는 실력이었다. 장서열은 활시위를 당긴 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활을 쏘았다. 화살은 붉은 원이 그려진 과녁 정중앙에 박혀 꼬리를 흔들었다.

권서함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의 궁술은 안정적이며 중후했다. 그가 주저하는 기색 없이 팔을 들자 순간 무한한 폭발력이 팔에 집중되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단련을 거쳐 온 결과였다. 이어 그가 용맹하게 일격을 가했다. 단숨에 날아간 화살은 과녁 정중앙의 붉은 원 안에 박혔다.

장서열이 의아한 눈길로 권서함을 바라보았다. 그의 궁술은 예상과 달리 주저하는 면이 없었으나 천재가 무의식적으로 가볍게 쏜 흔적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묘한 중후함이 있었다. 수없이 연습을 거듭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실력. 그녀는 만사형통인 권서함이라면 분명 타고난 천재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권서함이 장서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손을 폈다가 다시 오므리자 손바닥에 박힌 두꺼운 굳은살이 보였다. 장서열의 의혹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사실 권서함은 총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고, 누군가 그 모습을 보며 비웃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모든 능력은 그렇듯 한 발 한 발 걸으면서 쌓아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장서열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흥미로운 상대를 좋아했다.

두 번째 시도에서 그녀는 과녁을 보지 않고 오로지 손의 감각에 의존하여 화살을 쐈다. 첫 번째 화살의 자리를 뚫은 화살촉이 정확히 그 위에 박혔다. 몰려 있던 아이들이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도 그녀가 두 번째 화살까지 명중시킬 거라고 예상치 못한 듯했다.

권서함의 눈빛이 더욱 진지해졌다.

‘이번에는 서로의 감을 겨룰 차례인가?’

조금 전 그녀의 동작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에 가까웠다. 이는 앞서 보여준 첫 번째 화살이 수천 번의 단련 끝에 일구어낸 실력이라는 걸 감안할 때 전혀 다른 양상이었지만, 그 실력만큼은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문득 권서함은 그녀가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궁술을 연마해 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이어 활시위를 당긴 권서함이 마찬가지로 오로지 손의 감각에 의지해 화살을 날렸다. 그의 두 번째 화살 역시 첫 번째 화살의 뒤를 이어 무사히 과녁의 정중앙에 박혔다. 장서열과 동일한 결과였다.

권서함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나만큼이나 연습을 거듭한 것인가. 여자아이의 팔이 그 압력을 감당할 수 있다고?’

“권 공자, 최고다!”

“멋져요!”

“여자라고 양보해줄 필요 없어요!”

권서함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공중에서 부딪친 두 사람의 시선은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장서열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좀 더 어렵게 하죠.”

권서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숫자를 셀게요.”

“좋아요.”

눈을 감은 두 사람이 동시에 활시위를 당겼다.

권서함이 셋까지 세자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놓았다. 두 개의 화살이 중앙에 놓인 버드나무를 향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화살은 거의 동시에 도착해 버드나무를 명중시켰고, 채 가시지 않은 힘에 의해 화살은 부르르 꼬리를 흔들었다. 장서열이 권서함을 진심으로 칭찬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궁술은 전생에서부터 단련해 온 결과였다. 장서열은 이번 생에서 쌓은 실력만으로는 권서함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걸 인정했다.

권서함은 권서함대로 완전히 얼이 빠졌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무례하다는 것도 잊은 채 여자아이의 손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속도와 힘을 기르는 방법에 지름길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권서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리 없었던 장서열이 일부러 팔을 내보이며 흔들었다.

“어때요? 저랑 팔씨름이라도 한 판 해보실래요?”

권서함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정신을 차린 그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잘난 체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아가씨야 말로 나를 놀라게 하는군요. 여자아이들 중에…….”

장서열이 그의 말을 잘랐다.

“말끝마다 여자아이, 여자아이 하지 마세요. 여자아이들 중에도 대단한 사람은 많아요. 권 공자가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을 뿐이에요.”

권서함이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우매했군요.”

“그걸 모르셨나요?”

곧이어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은 서로가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더 이상 거리를 둘 필요가 없어진 두 사람은 아이처럼 솔직하게 서로의 궁술 실력과 그로 인해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권서함은 장서열이 그토록 나이 어린 시절부터 활을 잡았다는 것에 놀랐으며, 장서열은 권 씨 가문의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 방식에 몹시 놀랐다. 그의 말에 의하면 권 씨 가문의 자녀들은 유년 시절이랄 게 없었다.

비록 한 사람은 숨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져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경하던 이들은 진작 흩어졌으나 그들 사이 술렁임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럼 장서열의 궁술이 권 공자와 맞먹는 거야?”

“사실 따지고 보면 장서열은 정말 대단해. 지난 번 청산에서의 일도 그렇고.”

“감쪽같이 몰랐군. 평소 나약한데다 사람과 접촉을 꺼리기에 나는 그녀가…….”

“뭐, 그녀가 너희처럼 나비나 잡고 꽃이나 감상하는 줄 알아? 서열이는 스스로를 감출 줄 알지. 굳이 능력을 과시하지 않는 진정한 실력자야.”

그 말은 방금 전까지 장서열에게 호감을 표하던 여자아이들의 기분을 완전히 상하게 만들었다.

“그게 그리 대단한가? 지체 높은 가문의 여식이라면 마땅히 자수를 놓고 꽃을 가까이 해야지, 사내들처럼 무기나 가지고 노는 게 뭐가 좋아!”

“맞아. 듣자 하니 그 애는 집에서 희자(戏子,연극배우)를 끼고 산대. 그런 계집이라면 뻔하지.”

“원래부터 품성에 문제가 있었어!”

이야기는 순식간에 우호적인 여론을 뒤집었다.

“장서열이 희자를 끼고 산다고? 세자가 그걸 가만 둬?”

“거짓말이겠지. 여자애들은 헛소리를 잘하니까.”

“아니야. 걔는 정말 희자를 데리고 산대. 남자, 여자 다 있다던데?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그 애와는 가까이 하지 말라셨어.”

“네 모친께서는 걔랑 같이 있으면 네 못생긴 용모가 두드러져 시집을 못 갈까 봐 걱정하시는 거야.”

“봉황간!”

장서열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두 진영으로 나뉜 아이들이 서로 논쟁하기 시작했다.

현천기는 점점 더 격앙되는 분위기가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려 하자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옮겼다. 하릴없이 남의 뒷담화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이들과 멀어지기 위함이었다.

장애물 경주는 그로부터 머지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녹음 짙은 경주로에 맑은 바람이 불었다. 구염락이 진지한 얼굴로 말 위에 올라 고삐를 쥐었다.

다시 한번 구염락의 옆자리를 배정 받은 당자는 오늘따라 재수가 옴 붙었다고 생각했다.

“너 이 녀석, 작작 좀 해. 날 자극하는 건 상관없어. 그런데 말들을 뚫고 후진하는 건 죽으려는 거나 마찬가지야!”

왼쪽 손목에 말고삐를 한 바퀴 휘감은 구염락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동시에 그의 눈은 류소경을 좇고 있었다.

구염락은 일부 구간에 소나무 길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 길의 옆에는 향심호(向心湖)라는 호수가 있었다. 소나무 길은 대략 삼 미터, 호수까지의 거리는 그보다 두 배 정도였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류소경을 물에 빠뜨리려면 그가 세 번째쯤 돌 때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구염락은 말고삐를 풀었다가 다시 움켜쥐면서 류소경 외의 나머지 사람들을 어떻게 따돌릴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들은 한 발 늦추고, 자신은 한 발 앞서 달려야 했다.

당자는 구염락의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그에게 ‘일’이라 함은 그저 장서열과 관련된 것뿐이었다. 무심코 양궁장을 바라본 당자의 눈에 금세 장서열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 생각지 못한 인물이 있었다.

“저 둘이 대체 무슨 일이지?”

의외의 풍경이었다. 당자는 권서함이 뭘 잘못 먹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눈에는 권서함이 장서열에게 들러붙은 것처럼 보였다.

“서열 누님이 권서함과 활쏘기 시합을 했어요. 제가 가서 누님께 필요한 게 있는지 보고 올게요.”

‘고작 그런 이유로 가겠다고?’

당자가 구염락을 비꼬았다.

“하여간 넌 이 세상 둘도 없는 충직한 반독이야.”

속이 개운해진 당자는 구염락의 말에 흥미를 느끼고 얼른 되물었다.

“그래서 누가 이겼는데?”

구염락이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평온하게 답했다.

“서열 누님은 지지 않아요.”

당자가 청산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서열 누님과 활쏘기로 대결을 펼치다니. 권서함도 참 멍청하군. 지면 꼴사납고 이겨도 명예롭지 못한 대결이잖아. 그가 이번에야말로 참 어리석을 일을 저질렀어.”

당자의 비웃음에 구염락이 그를 바라보았다. 구염락은 당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권서함이 왜 멍청하다는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