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열셋째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하지요. 헌데 아가씨께서는 혹 소생과 활쏘기를 겨뤄볼 용의가 있으신지요?”
권서함이 여유로운 얼굴로 물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절친한 친구를 대할 때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를 힐끗 바라본 장서열이 잠시 뒤 답했다.
“좋아요.”
이유야 어떻든 상대가 자신에게 선의를 보인다면 소중히 여길 가치가 있었다. 친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권서함이 진심 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는 장서열이 특별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적어도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만큼은 피곤하지 않았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네, 공자께서 제게 진 뒤 분풀이를 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지요.”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는 상대를 향한 존중과 존경이 담겨 있었다.
이들은 각자 시종에게 활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모두 서둘러 상대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장서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점잖고 고상한 권서함이 과거 전쟁의 국면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때 전장을 누비고 다녔던 그와 실력을 겨룬다는 건 큰 영광이었다.
권서함 또한 장서열을 매우 존중했다. 그날 청산에서 보여준 그녀의 활약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간 그는 또래 아이들 중 자신과 대적할 만한 적수는 없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그날 장서열이 쏜 화살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권 공자와 장서열이 활쏘기 시합을 한대.”
“권 공자가? 말도 안 돼!”
“권 공자가 활을 쏠 줄 알기는 해?”
“평소 책벌레처럼 책상에만 붙어있는 그가 어떻게 활을 쏜다는 거야?”
“또 장서열이야? 도대체 하루라도 조용히 지내면 어디가 덧나나. 태자와의 일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권 공자인가보군.”
“어쩌겠어, 상대가 장서열인걸.”
말을 마친 아이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청산에서 ‘낙마 사건’을 직접 목격한 이들은 시합 소식을 듣자 즉시 하던 일을 중단하고 구경을 왔다. 섭 장군의 눈앞에서 기마 수업 중인 아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모인 듯했다.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아이들은 성별에 따라 제각기 다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아이와 그저 재미난 구경거리로 여기는 아이, 혹은 엄숙하게 지켜보거나 놀라워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물론 천진한 얼굴로 숨김없이 질투를 드러내는 아이도 있었다.
관리인들은 행여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모여든 인파 사이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보통 황자와 귀족 자제들은 앞으로 몰려드는 것과 같은 돌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높은 신분을 지닌 아이의 경우 태감이 준비한 의자와 간식을 펼쳐 놓고 보기 좋은 장소를 비워 친구들을 모이게 했다.
같은 시각, 마장에서는 정식으로 경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승자는 섭궁개에게 직접 궁술을 배울 수 있었다. 대장군에게 개별 지도를 받는 특권을 얻기 위해 모두가 전력을 다해 경기에 임했다.
구염락은 자신보다 한두 살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말을 몰았다. 그는 쏜살같이 앞 사람을 추월해 나갔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찬 기세와 용맹함을 내보이며 그는 전방을 향해 질주했다. 귓가를 스치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온몸에 힘이 솟았다.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손쉽게 당자를 제치고 일등이 된 구염락이 뒤를 돌아 당자를 향해 찬란하고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못된 녀석 같으니, 이 몸이 너 하나 못 다룰 줄 알고!’
그 모습을 본 당자가 말을 재촉했다. 그러나 두 바퀴를 돌 무렵, 이미 구염락은 당자보다 세 배는 더 멀리 앞서 있었다.
구염락은 마치 말과 한 몸인 것처럼 달려나갔다. 이등인 당자를 추월하는 건 정말 쉬웠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점에서 기마가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당자를 향해 다시 웃어 보인 그가 습관처럼 소매를 쓰다듬었을 때였다.
놀란 구염락의 낯빛이 파랗게 변했다.
‘자첩이 사라졌어!‘
즉시 말 머리를 돌린 그가 돌연 거꾸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주 중인 말의 무리를 쏜살같이 빠르게 뚫고 지나갔다.
이를 지켜보던 섭궁개는 놀라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아니, 오히려 기절초풍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열 필의 말이 한꺼번에 달리는 상황에서 뒤를 돌다니! 섭궁개는 거의 불을 뿜어낼 듯 화를 냈다.
“구염락, 지금 뭐 하는 게냐! 당장 경주로로 돌아가! 말이 달리고 있는데 후퇴를 하다니!”
그러나 구염락의 귀에 그 말이 들릴 리 없었다. 그는 자첩을 또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당황과 불안, 두려움 등 온갖 감정이 한데 엉켜 휘몰아쳤다.
‘대체 왜? 어떻게 그걸 잃어버릴 수가 있지?’
섭궁개는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의 애제자가 거침없이 말의 틈 사이를 파고들며 능수능란하게 비집는 모습에 넋을 잃었다. 구염락이 역으로 질주하는 말들을 뚫고도 어떠한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을 때, 섭궁개는 이미 모든 할 말을 잃은 후였다.
대단한 실력이었다. 섭궁개는 자신조차 한 치의 실수 없이 그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엄청난 일을, 겨우 여덟 살인 구염락이 해낸 것이다.
한편 자첩을 찾지 못한 구염락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잃어버릴까 염려되어 분명 소매 안쪽에 단단히 고정시켜 넣어두었다. 어떻게 떨어뜨릴 수가 있단 말인가.
섭궁개는 이 소동에 말을 멈춘 아이들을 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멈추지 마라! 멈추는 자는 황제 폐하께 고할 것이다!”
말을 마친 그가 이글대는 시선으로 구염락을 바라보다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기재(奇才,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다. 진정한 기재로다! 드디어 대주국이 문치(文治, 학문과 법령으로 나라를 다스림)로 다스리는 천하가 아니겠구나!’
말에서 내린 구염락은 우선 마음을 가다듬은 뒤 장서열을 향해 달려갔다. 말에 오르기 전 소매를 더듬었을 때만 해도 자첩은 분명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서열 누님과 있다가 곧바로 마장으로 갔으니 분명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구염락은 장서열에게 달려가는 와중에도 오로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샅샅이 살폈다. 그는 주변에 걸리적거리는 모든 걸 피하지 않고 전부 훑어보았다.
그러나 장서열을 마주할 때까지 그는 자첩을 발견할 수 없었다.
순간 구염락이 새로운 긴장에 휩싸였다. 그는 장서열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며 그녀가 손에 화살을 쥐고 있다는 것조차 보지 못한 채 그대로 몸을 부딪쳤다. 놀란 장서열이 얼른 활을 거뒀다.
“구염락! 정신이 나갔구나!”
고개를 든 구염락은 곧바로 무슨 일이냐 묻는 장서열의 눈빛과 마주했다. 그는 그대로 울고 싶었다. 억울했고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어째서 잃어버린 걸까. 차라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첩만은 잃어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누님… 서열 누님, 혹시… 제 자첩을 못 보셨…….”
장서열은 곧 울 것 같은 그의 얼굴에 서둘러 활을 내려놓은 후, 소매에서 자첩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순간 두 눈을 번쩍 뜬 구염락이 미친 듯이 기뻐하며 황급히 자첩을 받아들었다.
‘정말 다행이다. 서열 누님이 주웠구나!’
구염락이 애지중지하며 자첩을 어루만졌다. 이미 구겨져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자첩을 조심스레 펼친 뒤 다시 둘둘 말아 자신의 소매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그는 자첩을 꺼내어 다시 펼친 뒤 고이 접어 이를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시합을 준비 중이던 권서함은 구염락을 보고 다가와 다른 황자들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절을 올린 뒤 사과의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계속 소매에 신경을 쓰시는 것을 보고 류소경이 전하의 물건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너무 노여워 마시길 바랍니다.”
구염락은 순간 멍해졌다. 세도가의 도련님이 자신에게 절을 올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생전 처음 맞이한 놀랍고도 기쁜 이 순간을 기억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뒤에 이어진 말에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의 귀에 남은 건 오로지 ‘가져갔다’는 말뿐이었다. 자첩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도둑맞은 것이었다.
‘이런 천인공노할 자가!’
구염락에게 류소경은 자신의 피와 살을 먹은 원수나 다름없었다. 이제껏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 류소경 역시도 가만둘 수 없었다.
권서함이 계속해 온화한 목소리로 사과를 이어갔다.
“호기심이 강한 친구입니다. 가져온 물건을 확인한 뒤에야 못난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 역시 마장에서 경주 중이니 아마 조금 전 마주치셨을 겁니다. 시합이 끝나면 직접 사과드리겠다고 하니 성의를 봐서라도 그에게 기회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조금은 놀란 듯한 장서열의 눈길이 권서함을 향했다. 그녀는 권서함이 구염락에게 예를 갖춰 절을 올리던 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매사에 적을 만들지 않는 그가 역시 세도가의 자제답다고 생각했다.
“나도 방금 전해 들었어. 공자께서 내게도 사과했고. 그 류 공자는 기백이 넘치는 사람이야. 이렇게 미리 사과를 들었으니 나중에 네게 종이와 먹을 선물하는 걸로 사과를 대신하라고 해.”
그녀의 말에 구염락이 마치 사소한 일이 되었다는 듯 웃었다.
“좋아요.”
구염락이 권서함을 향해 아이 같이 웃어 보였다.
‘먼저 서열 누님을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고? 누님은 너무 착해. 이런 것들은 교훈 없이는 반성할 줄도 모를 텐데.’
장서열은 무탈하게 상황이 마무리되자 다시 발을 구르고 몸을 풀었다. 그녀가 가볍고 상쾌한 기분으로 구염락을 밀어내며 말했다.
“자, 이제 난 권 공자와 활솜씨를 겨뤄볼 거야. 여자도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겠어.”
권서함이 활시위를 당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아가씨의 실력이 기대되는군요.”
권서함 역시 이번 절도 사건을 그다지 큰일로 여기지 않았다. 구염락의 성격으로 볼 때 류소경이 잘못을 시인한다면 엄하게 추궁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따 다시 구염락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자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순간, 갑자기 장서열이 놀란 듯 소리쳤다.
“열셋째, 너 경주하고 있던 거 아냐?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녀가 마장 쪽을 바라보았다.
“감히 도망을 나오다니! 당장 돌아가. 섭 장군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구염락은 그녀의 말에 안절부절 못했다. 서열 누님이 화가 났어. 구염락은 자리를 떠나기 전 옆에 선 권서함을 힐끗 바라보았다.
‘류소경도 마장에 있다니 잘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