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책을 늘어놓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는 몹시 묻고 싶었다.
‘무슨 자첩? 내가 너에게 자첩을 준 적이 있던가?’
구염락이 고개를 숙이고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말을 꺼내긴 했지만 왠지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괴로웠다.
“매일 보면서 습자를 했어요. 그런데 금용이 자첩을 넣어 둔 옷을 빨다가 물이 묻는 바람에 더는 쓸 수 없게 됐어요. 누님, 한 부만 다시 써주세요. 이번에는 절대 망가뜨리지 않고 잘 보관할게요.”
고개를 든 그가 물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애원하는 기색과 긴장이 역력했다. 문득 장서열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는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그건 그의 글씨체였다. 모사 연습을 할 필요 없이 단번에 쓸 수 있어야 마땅했다.
그녀가 되도록 그 글씨체를 쓰지 않는 까닭은 황제와 같은 필체를 구사하는 것이 금기였던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구염락은 그 글씨체를 그녀의 것으로 알고, 오히려 그녀를 모방하려 했다.
순간 장서열은 비현실적인 황홀함을 느꼈다. 어떻게 이럴 수가! 거대한 충격에 휩싸인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의 부탁에 응했다. 동시에 그녀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황제와 같은 필체를 쓰는 것은 금기였다.
구염락의 글씨는 강한 개성을 갖고 있었다. 강직하고 박력이 넘쳤지만 또 한편으로는 억누를 수 없는 자유분방함이 깃들어 있었고, 그것은 그만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번 생에서는 자신의 것이 된 걸까.
속이 후련했다. 그녀는 이번 생에서 마음대로 글씨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 문체에 담긴 존엄을 마음껏 유린하고 짓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뿐, 그녀는 한평생 다른 사람의 필체를 모방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서열 누님.”
그녀는 어떻게 썼는지도 모르게 재빨리 글씨를 적어주었다. 과거 그녀는 오로지 그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일념 하에 오랫동안 남몰래 그의 글씨를 베껴 적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셈이었다.
“이름이요. 누님 이름.”
구염락의 고집스러운 손가락이 좌측 하단을 가리켰다. 무척 진심 어린 눈빛이었다. 순간 그녀는 그의 진짜 목적이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미래에 자신을 옭아맬 증거를 확보하는 데 있다고 착각할 뻔했다. 그녀는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심정으로 거의 날리듯 가볍게 이름을 적어 넣은 뒤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분명 나보다 더 잘 쓰게 될 거야.”
구염락은 소중히 자첩을 갈무리한 뒤 조용히 안도의 기색을 내비쳤다. 그는 혹시라도 장서열이 마음을 바꾸지는 않을까 얼른 이를 접어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다시 자첩을 얻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인 건 그녀가 글자 쓰는 걸 싫어하면서 생각보다 쉽게 부탁을 들어줬다는 것이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린 게 의아했지만 그는 감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저 너무나 기분이 좋을 따름이었다.
“누님, 이렇게 글자가 멋진데 어째서 평소에는 잘 안 쓰는 거예요? 누님의 필체는 정말 멋져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요.”
당연히 보기 좋을 터였다. 본디 글씨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구염락과 꼭 같은 필체는 곧 그의 마음을 일컫는 것이니 당연히 그로서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장서열은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말했다.
“이 멋진 글씨 때문에 너무 많은 이들이 날 좋아하게 될까 봐 그러지. 그렇게 되면 너의 세자 형님이 얼마나 바빠지겠니.”
때마침 자리에 앉던 현천기는 장서열의 말을 듣고도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저속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녀의 자신만만한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어차피 장서열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 성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장서열의 주변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를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구염락과 당자, 만정, 그리고 최근 눈에 띄는 헌원상까지.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현천기는 그녀가 사람을 사귐에 있어 분명 그 이상의 다른 속내가 있다고 믿었다.
현 씨 가문의 반독이 어젯밤 갈아놓은 먹물을 꺼냈다.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먹물이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그는 놀라지 않았다. 태연히 다시 두 개의 먹물을 꺼낸 뒤 곧 오전 수업에 필요한 물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구염락은 뒤돌아 현 씨 가문의 반독에게 고개를 숙이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반독은 괜찮다는 듯 마주하여 고개를 숙였다.
현천기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구염락은 매번 뒤를 돌아볼 때마다 정확한 시선을 보내며 감사를 표했다. 현천기는 아직도 자리를 바꾸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장서열이 먹물을 다 써갈 때쯤 구염락은 무려 오십여 명이 모인 학당에서 눈 깜짝할 사이 그들과 가까운 자리를 선점했다.
현천기는 본능적으로 구염락이 매우 위험한 인물임을 감지했다. 하지만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귀하디귀하게 자란 황자와 귀족 자제들이 ‘그들’처럼 하찮은 인물이 벌이는 생존의 몸부림을 이해할 리 없었다. 현천기의 입꼬리가 음흉하게 올라갔다.
‘구염락을 태자로 세운다?’
최고의 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그가 태자가 된다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초혜전의 하루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잠시 소태감이 찾아와 현천기를 불러내 대화를 나눈 것을 제외하면 장서열은 모든 것이 평소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후 수업인 기마 시간은 달랐다. 그늘진 곳에서 몸을 풀고 있던 장서열의 뒤로 느닷없이 누군가 다가왔다. 그녀를 톡톡 건드리는 동작은 매우 가벼웠고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장서열은 허리를 펴며 근처에 줄을 선 구염락과 나머지 친구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권서함? 무슨 일이죠?”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한 줌의 머리카락이 뒤에 선 그를 가볍게 때렸다. 그녀가 얼른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귀 뒤로 넘겼다.
“미안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권서함은 예의 있게 웃으며 이제껏 맡아본 적 없는 좋은 향기를 떨쳐냈다. 그가 자첩 한 부를 내밀었다.
“떨어뜨린 것 같더군요.”
자첩을 내민 권서함은 마치 장서열의 얼굴에서 꽃송이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장서열은 영문도 모른 채 손을 뻗었다. 그러나 몇 번을 잡아당겨도 그가 물건을 내어주지 않자 다소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권 공자……?”
정신을 차린 권서함이 얼른 자첩을 넘겨주었다.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본기가 튼튼하더군요. 여자가 이렇게 힘 있는 글자를 쓰는 건 처음 봤습니다. 글씨체가 강인하고 생기가 넘치는 것이 아가씨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
“미안해요. 내 말이 언짢게 들리지 않았기를 바라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저은 장서열이 수줍은 듯 자첩을 빠르게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 고유의 글씨체가 아니기에 떳떳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권 공자께서 제 글씨를 평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망할 구염락, 감히 물건을 함부로 떨어뜨리다니!’
권서함이 그녀의 소매 속으로 들어가는 자첩을 못내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분명 사정없이 구겨질 터였다. 만약 자신에게 준다면 잘 관리해서 열심히 모사 연습을 할 텐데…….
장서열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공자, 아직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장서열은 그가 왜 가지 않고 버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권서함은 타인과 교류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 친구라고는 여자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류소경 말고는 없었다.
권서함이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난… 내 친구를 대신해 사과할게요. 실은 그가… 열셋째 전하가 눈에 띄게 소매를 가리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손을 댔나 봅니다. 정말 미안해요. 이따 전하께서 내려오면 내가 직접 사과할게요.”
순간 장서열의 얼굴에서 공손한 미소가 사라졌다.
‘호기심에 손을 대? 참 귀족스러운 손버릇도 지녔군.’
장서열은 권서함의 사과를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연히 주워서 돌려주는 것과 훔친 물건을 돌려주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그녀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친구분의 호기심이 참으로 왕성하군요. 퍽 놀라운 기술이네요. 장래에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겠어요. 필시 가문을 빛내겠지요.”
권서함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번 일은 확실히 류소경의 잘못이었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한다고 느낀 권서함은 다소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차갑게 말을 마친 장서열은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그와 거리를 두고 다시 몸을 풀고자 했다.
우두커니 선 권서함은 더욱 어색한 모습이 되었다. 류소경이 벌인 일이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나, 그는 친구를 위해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장서열이라면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그가 우호적이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아가씨의 활쏘기 실력이 훌륭하… 아니, 실은 내가 그 모습을 직접 보았는데 정말 훌륭하더군요. 혹시 기회가 된다면 나와 함께 청산에 가 줄래요?”
말을 마치고나니 왠지 부적절한 발언처럼 느껴졌다. 그가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당자와 만정도 함께요.”
장서열은 문득 그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시죠.”
류소경이 이번 생에서 얻은 가장 큰 재산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권서함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의 누이동생은……. 애석한 일이었다.
권서함은 장서열의 승락에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관대작의 부인을 대할 때보다 더욱 긴장한 스스로에게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혹, 그 자첩에 있는 글귀를 내게도 한 부 써줄 수 있는지요. 잘 보관하겠다고 약속할게요. 아, 오해하지는 말아요. 난 정말 아가씨의 필체가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한 시대를 풍미할 대유학자의 칭찬이니 분명 잘 쓴 것이리라. 그녀는 자신의 서예 실력이 어느 정도 성취를 이뤄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하지만 그 필체는 미래에 구염락의 필체가 될 예정이므로 함부로 남에게 선물할 수는 없었다.
“사실 저보다는 열셋째의 글씨가 더 수려합니다. 다음에 그 아이에게 일러 몇 자 써드리라고 할게요.”
이는 장서열의 입장에서 권서함에게 미래의 제왕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에게는 은인에 대한 보답이었으나 사실상 거절당했다는 것을 안 권서함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는 교양 있는 사람이기에 두 번은 부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