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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55)화 (55/449)
  • 제55화

    구염락은 오늘 차려입은 옷차림을 후회할 정도로 주변의 시선이 몹시 불편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겨우 가라앉힌 그의 초조함이 다시 생기게 만들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그들이 빨리 없어지기를 바랐다.

    순간 다시 한 번 등골이 서늘해진 장서열이 뒤를 돌아보았으나, 구염락은 본능적으로 티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공연한 걱정이라 생각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그를 끌어왔다. 그리고 자신보다 한 걸음 앞서 걷게 하고 좀 더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자신이 오해한 것이라 확신한 그녀는 미안한 마음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풍엽이 작성한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내가 금용에게 보내려고 생각하는 선물 장부야. 네가 먼저 보고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해줘. 보충할게.”

    일순간 구염락의 눈에 세상이 환히 빛나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음이 멀어지고, 마음을 가득 메운 불안이 걷히는 듯했다. 어디선가 맑은 바람이 불어와 그의 마음에 짙게 깔린 안개를 흩뜨리고, 따스한 햇살을 가득 채워 넣었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매만지자 장서열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그녀의 향기가 밴 머리를 오래도록 씻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장서열이 그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바보 같기는. 내 말 들었어? 정신을 대체 어디에 두고 온 거야.”

    도대체가 멀리 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구염락이 속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누님이 좋다면 저도 좋아요.”

    일개 궁녀에게 주는 선물까지 서열 누님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장서열은 웬일로 구염락이 이치에 맞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넓은 아량을 베푸는 척할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그래도 네가 봐야지. 네 시녀가 뭘 좋아하는지는 네가 가장 잘 알 테니까.”

    장부는 대충 훑어보아도 모두 값지고 좋은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어젯밤 금용이 벌인 일을 떠올린 구염락은 그녀가 서열 누님의 후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님 말대로 할게요. 하지만 계집종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 같아요. 이렇게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면 오히려 화를 불러올 수 있으니까요.”

    입을 다문 장서열이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녀석의 성격이 변했다. 그것도 겨우 하룻밤 사이에.

    ‘왜 태도가 바뀐 거지? 어제까지만 해도 그들에게 선물을 내린다는 말에 그렇게나 신나했으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풍엽에게 밤을 새면서까지 장부를 작성하라고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마음이 아프군.’

    그 순간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당자가 엄청난 속도로 그녀를 향해 부딪쳐왔다. 그 기세에 하마터면 쓰러질 뻔한 장서열을 당자가 얼른 뒤에서 껴안았다.

    “하하, 드디어 따라잡았다! 세자는 참 의리도 없어. 좀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기어코 마차를 빨리 몰다니! 그가 학당에 안 나와서 참 다행이야. 아니면 난 영원히 그의 뒤만 따라다녔을 테니까.”

    구염락의 시선이 곧바로 장서열의 허리를 감싼 당자의 손을 향해 꽂혔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손이었다. 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구염락이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을 주의 깊게 쳐다보지 못한 채 일단 당자한테서 벗어나 그를 발로 걷어찼다.

    “놀랐잖아! 네가 넘어지는 건 상관 안 해. 하지만 내가 넘어져서 앞니라도 부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그렇게 되는 날엔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게다가 뒤만 쫓은 건 순전히 네 기마술이 부족한 탓인데 왜 풍엽을 탓하지?”

    당자가 코웃음을 쳤다.

    “아직 혼인 전인데 두둔하는 모습은 벌써 한통속이군.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래놓고 내 기량이 떨어진다고? 뻔뻔하기는. 감히 황궁에서 경주를 하려고 하다니. 그러다 어사(御史, 탄핵을 관장하는 벼슬)들이 단체로 누님의 부군을 탄핵할 수도 있어. 조심하라고. 어라?”

    당자가 그제야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너 이 녀석, 오늘 많이 달라 보인다.”

    그의 주위를 한 바퀴 돈 당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굉장하네. 난 네 나이 때 연사(软丝)를 입어도 이만큼 잘 어울리지 않았어. 역시 유유상종이라고 내 형제답구나! 아주 멋져. 우리 집에 이런 옷이 몇 벌 있지. 너무 여성스러워서 입지 않았는데 내일 전부 갖다 줄게. 연경 제일의 미남 황자가 되겠어.”

    구염락이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은 달콤하다 못해 마치 피가 뚝뚝 떨어질 것처럼 과장되어 보였다.

    만정이 황당해하며 입을 열었다.

    “당자, 정말 뻔뻔하구나. 열셋째가 예쁜 옷을 입은 걸 네 자랑으로 승화시키다니. 참 대단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듯 당자가 허풍을 떨었다.

    “열심히 보고 배워. 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니까.”

    구염락은 여전히 웃기만 했다. 방금 전까지 드러낸 살벌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장서열의 뒤에 선 그가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불쑥불쑥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쉴 새 없이 스스로를 설득하는 중이었다.

    ‘당자는 단지 서열 누님과 스쳤을 뿐이다. 고의는 아니었을 거야. 분명 고의가 아니었어.’

    “자, 어서 가자. 우리만 늦으면 큰일이야.”

    장서열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만약 이들과 지각을 한다면 만정처럼 착하고 얌전한 아이가 지각을 한 건 다 장서열과 함께 어울려서라고 구설수에 오를 게 뻔했다.

    장서열의 손을 잡은 만정이 당자를 보며 화를 냈다.

    “열셋째에게 저 옷이 멋지게 어울리는 건 다 그가 잘생겼기 때문이야. 너는 작약꽃 옷을 입어도 변변찮아 보일걸!”

    그러나 당자는 만정과 생각이 달랐다.

    “수준 떨어지기는. 누가 요즘 꽃무늬 옷을 입냐? 비유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게다가 열셋째는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야. 내 동생이 잘생겼으면 나도 잘생긴 거야. 그게 바로 의리라는 거지.”

    만정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의리? 그게 네 얼굴을 잘생기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거야?”

    “당연하지! 정이 깊고 두터우면 가능해.”

    “누가 너랑 정이 깊대?”

    티격태격하며 걷는 사이 만정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녀는 당자의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얼굴을 뜯어보고 싶을 정도로 잔뜩 성이 났다. 당자는 남자의 깊이를 운운하며 은근히 만정의 속을 긁었다.

    구염락은 자신이 그 대화의 주인공이 된다는 게 조금 거북했다. 사실 그가 옷차림에 신경을 쓴 진짜 이유는 장서열에게 새로 글씨를 받기 위함이었다. 손 공공은 여자아이에게 부탁할 때는 잘 차려입어야 쉽게 응해줄 거라고 귀띔했었다.

    하지만 구염락은 자신이 없었다. 처음 글귀를 간직한 이후 그녀가 학당에서 같은 필체를 사용하는 일은 드물었고, 심지어는 그 필체를 싫어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오늘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지 알 수 없었다.

    초혜전에 들어서자마자 만정과 당자는 서로에게 질렸다는 듯 황급히 떨어졌다.

    대청 안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성적이 좋지 않은 당자는 가장 뒷줄에, 만정은 중간에 앉았으며 나이가 찬 장서열은 가장 앞줄에 앉았다.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에게서 벗어나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구염락은 앞으로 한 시진 동안 장서열이 오로지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자리에 선 채 열심히 그녀의 물건을 정리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늘어났지만 그는 그저 태연할 뿐이었다. 이윽고 서서히 소곤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그 구염락이 맞아? 못 알아보겠어. 꾸미니까 꽤 그럴 듯한데? 물론 출신이 비천해서 고귀해보이진 않지만.”

    아니꼬운 말투의 남자아이가 곁에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쪽에서 누군가 조용히 속삭였다.

    “열둘째 전하, 자세히 보니 두 분이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십이황자의 얼굴이 순간 흙빛이 되었다.

    ‘감히 누가 누구랑 닮았다는 거야!’

    여자아이들은 구염락이 저렇게 잘생긴 줄 몰랐다며 입을 모아 소곤거렸다.

    금지된 이야기를 시작하는 아이들의 귓속말이 더욱 작아졌다.

    “참, 저 아이 모친의 신분을 잊고 있었군. 미색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폐하께서 그런 실수를 하셨을 리 없지.”

    그러나 아무리 작은 목소리라도 구염락의 귀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누군데? 죄인?”

    누군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나도 집안 어른들이 몰래 하는 이야기를 엿들은 거야. 저 아이의 모친은 군에서 매우 명망이 높아서 한번 만나보려면 머리에 피가 터질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더군. 밤새 줄을 서도 힘들었대.”

    모두가 아주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체 무슨 줄인데 밤을 새?”

    사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두루뭉술한 소문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아이들에게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저속한 일까지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따라서 말하는 아이조차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짐짓 어른인 척 친구의 의혹을 풀어주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장사가 잘 된다는 뜻일걸.”

    당연한 말이었다. 장사가 안 되는데 줄이 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구염락은 자신이 천성적으로 소리에 민감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걸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부모가 누구인지를 따지는 문제는 갓 태어난 아이더러 걸을 수 있는지를 묻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구염락에게 기쁘게 들린 말도 있었다. 오늘 입은 옷이 정말 잘 어울린다는 말이었다.

    물건을 정리한 구염락은 아직 수업이 시작되지 않은 틈을 타 조심스레 장서열에게 다가갔다. 가슴을 꼿꼿이 편 그가 기대 반 걱정 반인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나 멋져요?”

    그가 커다란 눈에 절실함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잠시 놀랐으나 이내 그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응. 반듯하고 당당한 소년 같아.”

    활짝 웃어 보인 그가 머리를 매만졌다. 장서열의 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정말로 멋지게 변했다고 믿게 했다.

    “비단 옷을 입은 건 처음이에요. 피부에 닿는 느낌이 차가워요.”

    구염락이 기분 좋게 옷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칭찬에 그는 진심으로 이 옷이 좋아졌다.

    살짝 미소를 지은 장서열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구염락은 물질적인 것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전에 누려보지 못한 호사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줄곧 좋아해 온 소박한 것을 배척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감이 강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사람이었고,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세상에서 잘난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인, 그야말로 제왕 중의 제왕이었다.

    고개를 숙인 구염락은 새 옷을 만지작거리느라 장서열의 시선이 자신을 떠났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 실은 누님이 써준 자첩이 망가졌어요. 다시 한 부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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