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구염락은 차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자첩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정말로 종이 한 장이 두 사람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건 어젯밤 자신이 정말로 그들을 해치려 했다는 사실이었다.
구염락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기 자신조차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가족 같은 이들을 죽이려 했다. 자신은 냉혈한 이기주의자였다.
‘역시 군기(军妓, 군대의 기녀)의 자식은 별 수 없는 건가.’
그를 행실이 더럽고 사상이 천박하다고 놀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나는 더럽고 아무 것도 아니야. 나 같은 건 사람 노릇할 자격도 없다. 이제 와서 반성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제 겨우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금세 부패해 바보가 되어버렸구나.’
구염락의 눈이 어두워졌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어둠이 캄캄한 강물에 잠긴 듯 짙은 눈빛이었다.
주인의 변화를 눈치챈 금용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녀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침대 옆에 몸을 웅크린 채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 금용은 그 순간 주인이 자신에게 어떠한 온정도 느끼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지난 몇 년간 그가 자신들을 온화하게 대했었다는 것조차 실감나지 않았다.
금용은 자첩을 없앤 것을 무척이나 후회했다. 주인이 본래 육친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무정한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어째서 거만하게 굴었을까. 금용은 두려움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한편, 구염락의 머릿속에서는 흑과 백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는 장서열이 준 약을 그들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렇듯 귀한 약을 다른 이가 사용하게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리자를 응시하는 구염락의 눈동자 뒤로 두 가지 생각이 줄다리기를 벌이며 그의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렸다.
* * *
초혜전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구염락이 손에 든 약상자를 쳐다본 뒤 소리자에게 달려갔다.
“소리자, 조금만 참으면 금방 나을 거야. 전에도 경험해 본 적 있잖아.”
약상자를 연 구염락이 능숙한 솜씨로 하얀 연고를 소리자의 머리에 발라준 뒤,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다시 상처를 싸매주었다.
겁에 질린 채 한쪽에 움츠려 있던 금용은 주인이 이전의 모습을 되찾자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물과 가위를 나르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전하, 옷을 갈아입으세요. 초혜전에 가실 시간이에요.”
구염락은 서두르지 않았다. 초혜전이 열렸어도 서열 누님은 언제나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도착했다.
“손 공공에게 가서 태의를 부르고 해열제를 처방해 달라고 해라. 약 달일 때 태우지 말고.”
금용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만약 누워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과연 주인이 지금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기별을 받은 손 공공은 지체하지 않고 태의원으로 가 몰래 말석 의사를 불러왔다. 처방 받은 약을 달여 소리자에게 먹인 뒤에야 비로소 구염락은 흙과 피로 얼룩진 옷을 갈아입었다.
고개를 숙인 금용이 창백한 얼굴로 그의 시중을 들었다. 평소처럼 옷을 꺼내 주인에게 건네주려 했으나, 구염락의 시선은 옷장 맨 아래에 있는 옷을 향해 있었다. 옷감이 좋고 화려해 평소에 감히 꺼내지 않던 옷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옷으로 줘.”
잠시 후 구염락은 전과 같이 약간 수줍음을 타기도, 또 한편으로는 남의 비위를 맞출 줄도 아는 해맑은 아이로 변해 있었다. 준수하고 빼어난 이목구비에서는 고상함이 느껴졌다.
몽롱한 정신으로 잠에서 깨어난 소리자는 자신을 보러 온 주인을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침착한 태도로 그를 자리에 눕힌 구염락이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내 잘못이야.”
소리자는 주인의 사과를 받을 수 없었다. 이제 막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그가 황송해하며 말했다.
“다 노비의 잘못입니다. 노비가 쓸데없는 말을 한 탓입니다. 금용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그런 잘못을……. 노비는 벌을 받아도 쌉니다. 전하께서 벌을 내리신 건 노비의 복입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손 공공이 얼굴에 간드러지는 웃음꽃을 피우며 고개를 끄떡였다.
‘타고난 노비로군.’
털썩 무릎을 꿇은 금용은 감히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구염락은 오히려 대범하게 말했다.
“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야. 난 이만 가 볼 테니 또 열이 오르면 손 공공에게 부탁해. 초혜전에 와서 나를 찾으라고 해.”
손 공공이 억울한 듯 왼발을 굴렀다.
“사람을 부려먹는군.”
구염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떠나는 모습은 마치 눈부신 봉황이 날개를 펼치는 모습인 양 매우 단정하고 기품이 있었다.
금용과 소리자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녹초가 된 입을 열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 같았다.
* * *
이른 아침, 맑은 매미 소리가 귀를 울렸다.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인 상쾌한 아침이었다. 이 시간은 앞을 오가는 마차들로 인해 초혜전이 가장 붐비는 시간이기도 했다.
장서열은 성가시게 달라붙는 서풍엽을 달래어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외치는 걸 잊지 않았다.
“아예 내 자리까지 데려다주지 그래요?”
서풍엽은 상심한 얼굴로 매몰찬 꼬맹이와 작별을 고했다.
마차에서 내린 장서열에게로 열셋째 구염락이 다가왔다. 두 눈을 반짝이는 그의 모습은 준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린 신선이 속세로 내려온 듯 여유롭고 수려한 자태는 그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장서열은 순간 넋을 잃었다. 하마터면 그녀는 이 순간의 열셋째를 몇 년 후의 구염락으로 착각할 뻔했다. 이건 그의 미소와는 다른 문제였다. 일종의 느낌이었고, 그와 수년간 함께 생활하고 같은 베개를 베고 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직감이었다.
“열셋째…….”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러운 눈길로 구염락을 바라보자 그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시선이 몹시 쑥스러웠던 그는 그저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이제껏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귀한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자신이 없기도 했다.
“날씨가 조금 서늘해진 것 같아서…….”
구염락은 아무런 계산도, 꾸밈도 없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장서열을 대했다.
그녀는 속으로 안도하며 잠시나마 그를 오해했던 자신을 비웃었다.
‘조금 차려입은 걸 가지고 함부로 오해하다니.’
하지만 원인 모를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자꾸만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무성한 잡초로 뒤덮인 냉궁의 계단, 그를 쓸어내리던 바람, 그리고 그 아래 가득하던 푸른 이끼…….
이내 그녀는 전생의 기억을 떨쳐내며 지나친 상상은 금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온종일 구염락만 생각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잖아. 그래 봐야 그의 속은 알 수 없을 테고, 오히려 나만 답답해질 뿐이야.’
치맛자락을 든 만정이 급히 뛰어왔다. 그녀의 머리에 달린 오색 비단끈이 춤을 추며 휘날렸다. 살짝 홍조를 띤 작은 얼굴은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장서열의 어깨에 매달렸다.
“아직 지각은 아니라 다행이에요! 어라? 열셋째, 너 오늘 좀 달라 보인다.”
장서열의 어깨에서 내려온 그녀가 생기발랄한 얼굴로 마치 감상하듯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만정이 감탄을 내뱉었다.
“이제 보니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분위기도 멋지잖아!”
그러나 구염락은 장서열에게 보여주기 위해 차려 입은 것일 뿐, 다른 사람의 감상은 필요 없었다.
장서열은 만정의 말에 동의했다. 구염락은 오늘 특히나 멋있었다. 살구색 윗옷에 광택이 나는 유군(襦裙)과 그 위로 복잡한 꽃무늬가 수놓아진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허리춤에는 새하얀 옥패 두 개가 매달려 있었다. 새까맣고 영명한 눈동자는 정갈하게 묶은 머리, 그리고 희고 작은 얼굴과 퍽 잘 어울렸다. 웃음기가 없을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엄이 드러나 순식간에 주변 아이들을 마치 짚신처럼 보잘 것 없게 만들었다.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구염락의 선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은 마냥 귀여워야 했다.
‘내가 또 괜한 생각에 빠진 걸까? 왜 그가 지나치게 황자처럼 보이는 거지?’
장서열은 어렴풋이 구염락이 비단이나 가죽 옷을 싫어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황제가 된 뒤에도 그는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전생의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세상이 짐을 기억할까 두려워’ 눈에 띄는 옷을 입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정은 구염락이 그저 보기 좋았다. 열셋째는 평소에 유순했지만 특별히 꾸며 입은 오늘은 특유의 날카로움이 돋보였다. 만정은 나비처럼 열셋째 주위를 돌며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서열 언니, 열셋째 참 멋지죠? 우리 열셋째가 이렇게 잘생긴 줄 몰랐어요. 반할 것 같아요.”
장서열이 속엣말을 삼켰다.
‘만정, 넌 이미 그에게 반해 있었잖아. 나 몰래 그에게 좋은 물건을 주고 딱한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걸 내가 몰랐을 리가. 하지만 이 언니는 널 응원할게. 네가 금용을 쓰러뜨리고, 장서영을 누르고, 귀비가 되어 마지막엔 황후 자리에 오르기를.’
만정이 입술을 삐죽였다.
“언니, 왜 그렇게 웃어요? 어째 좋게 보이지 않아요.”
“그럴 리가. 너에 대한 이 언니의 마음은 해와 달처럼 순수하단다.”
만정은 흑심을 품거나 계략을 세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가 해맑게 말했다.
“정말요?”
구염락이 얼른 앞으로 나가 장서열의 물건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팔짱은 끼지 않았다.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정 누님, 누님도 오늘 늦었네요.”
만정이 작은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누님‘도’라니? 난 일부러 서열 언니가 오는 시간에 맞춰 온 거라고!”
만정이 머리에 매달린 비단끈을 휘둘렀다.
“넌 아침에 한숨 더 자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지? 참, 그나저나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멋지게 차려입은 거야? 설마 매일 이 미녀와 함께 있다 보니 자극이라도 받은 거야?”
말을 마친 만정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의 많은 시선들이 그들에게 닿았다. 처음에는 만정을 향하던 시선이 어느새 구염락을 향해 갔다. 눈에 띄는 저 사내아이가 대체 누구인지 한참을 생각하던 아이들이 문득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서열이 바늘이라면 실이나 다름없는 반독 구염락이었다.
그가 어떻게……?
구염락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늘어났다. 전각에 가까워질수록 그를 쫓는 사람은 더욱 많아졌다. 인파 속에는 단연 여자아이들이 많았으나 그중에는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남자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