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소리자도 더는 모른 체할 수 없었다. 황급히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나선 소리자는 금용이 그대로 이실직고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전하가 금용이 일부러 자첩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결코 가벼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정원은 칠흑같이 깜깜했다. 쏟아 버린 물은 이미 지하로 흘러들어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금용이 머뭇대며 말했다.
“전… 전하, 아무래도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노, 노비가…….”
금용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구염락은 방으로 뛰어 들어가 기름등을 꺼내왔다. 모래 한 알까지 샅샅이 살피던 그가 자첩의 조각이라도 남아있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바닥을 훑었다. 그 모습에 놀란 금용이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전하. 이러지 마세요……. 노비가 잘못했습니다. 노비는 그 종이가 소매에 있는지 정말 몰랐습니다.”
“…….”
“전하, 어서 일어나세요. 바닥이 차가워요. 차라리 노비를 벌하세요. 노비가 일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금용은 기름등을 든 채 무표정한 시선으로 빨래터를 살피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노비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노비가…….”
땅까지 파가며 자첩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애쓰던 구염락은 갑자기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으며 땅에 엎드렸다.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챈 금용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녀와 소리자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신분도 잊은 채 구염락의 팔을 끌어안으며 크게 소리쳤다.
“전하! 정신 차리세요, 전하! 노비는 금용이고 그는 소리자입니다, 전하!”
그들은 구염락이 땅을 파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 굶주린 나머지 땅을 파서 먹을 것을 찾은 적이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뛸 듯이 기뻐하며 홑옷만을 걸친 채 지렁이가 기어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잡아먹었고, 지렁이가 아닌 벌레는 남김없이 죽였다. 그때의 어두운 기억이 남아 있는지 그는 매번 땅을 팔 때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얼굴에 핏기가 가신 두 사람이 죽을힘을 다해 구염락의 팔을 붙잡았다.
“전하! 전하! 정신 차리세요, 전하!”
그러나 구염락이 팔을 한 번 휘두르자마자 그들은 쉽게 나가 떨어졌다. 순식간에 땅을 파헤친 그의 눈빛이 갑자기 음울하게 변했다. 그가 충혈된 눈으로 멀지 않은 곳에 나가떨어진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녹초가 되어 주저앉아 있던 소리자와 금용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질려 차마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초점 잃은 눈으로 다가온 구염락이 금용을 때리려 하자 소리자가 몸을 날려 금용을 감쌌다. 흘러내린 피가 소리자의 귀를 타고 내려와 금용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금용이 비명을 질렀다. 자첩 하나가 전하로 하여금 자신들을 해치게 만들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일순간 주위는 조용해졌고 구염락의 얼굴에서 음침한 미소가 사라졌다. 금용은 머리가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소리자가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 것이다. 한기를 느낀 금용이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금용, 어서 일어나 천을 가져와라. 소리자의 지혈을 해야겠다.”
금용이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평소 그녀에게 잘해 주었던 손 공공이 몹시 탈진한 듯 숨을 헐떡이며 이미 혼절 상태인 구염락과 소리자를 차례로 눕히고 있었다.
“이 아이가 또 발작을 했구나.”
‘어찌 소리자와 금용까지 다치게 했을꼬. 평소에는 그리 감싸던 아이들인데.’
눈물을 닦으며 일어난 금용이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가 지혈제를 찾기 시작했다. 주인의 침상 위에 장 씨 아가씨가 준 고급 지혈제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감히 그것을 가져갈 수가 없었다. 그것에 손을 대는 건 또다시 사지에 몰릴 수도 있는 도박이었다.
장 씨 아가씨가 준 자첩 때문에 이 사달이 나지 않았는가. 조금 전 전하의 모습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금용은 더는 생각지 못한 채 황급히 밖으로 달려가 소리자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공포 섞인 눈물이 피와 한데 어우러져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금용의 울음소리에 손 공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들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큰일날 뻔했다.
격앙되어 두서없이 약을 바르는 금용은 매우 겁에 질려있었다. 이를 본 손 공공이 맞은편 단칸방을 향해 소리쳤다.
“곽 공공! 썩 방 안에서 나오지 못해? 두 아이가 이리 놀랐는데 뭘 하고 있어!”
곽 공공이 조용히 머리를 내밀었다. 악마가 누워있는 것을 확인한 그가 그제야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왜 소리를 질러? 나도 놀라서 숨어있었다고!”
“됐으니까 어서 이 아이 지혈 좀 하시게. 금용, 넌 그만 쉬거라.”
곽 공공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들의 옆으로 다가왔다. 금용을 흘겨보던 그가 목청을 가다듬는 것도 잊은 채 곧바로 꽥꽥대며 소리쳤다.
“뭘 잘했다고 울어! 그러게 왜 녀석의 보물을 건드려? 종이 한 장이 뭐라고 그걸 없애느냔 말이다! 주제를 알아야지, 꼭 일이 터져야만 깨닫는 게야?”
“…….”
“마침 잘 됐구나. 겂도 없이 감히 주인의 보물에 손을 대다니! 앞으로도 그렇게 잘난 체해 보거라. 이 녀석이 잘해 주니 너희가 정말 주인의 보물이라도 되는 줄 알았느냐?”
금용이 덜덜 떨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평소 예쁘고 곱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말괄량이가 악을 쓰며 우는 모양새였다. 겁에 질린 탓이었다. 그들의 주인은 가끔 행동이 괴팍하긴 했지만 이제껏 그들에게 화풀이를 한 적은 없었다.
손 공공은 그제야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곽 공공의 말을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말로 두 아이가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한 모양이었다. 평소 성심껏 열셋째의 시중을 들던 아이들이 어째서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 수 없었다.
곽 공공은 한바탕 욕을 내뱉고도 마음이 후련하지 않았다. 조금 전 방에 숨어 있던 그는 놀라서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불길하니 그만 그쳐라! 그러게 가만히 있지 왜 일을 벌려!”
“그만하시게.”
구염락의 뒷덜미를 만져본 손 공공은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망이를 세 번이나 내려친 뒤에야 기절한, 참으로 끈질긴 녀석이었다.
“말을 아껴. 열셋째가 깨어나면 후회할 수도 있다고. 지금 이들에게 미움을 사면 나중에 곤란해져.”
“이 녀석들이 저 물건을 왜 악마로 만들었는지는 알고?”
곽 공공이 비꼬듯 금용을 향해 말했다.
“태생부터 고귀한 여인과 천한 노비 중 누가 더 중요한지 꼭 말해줘야 아느냐? 네가 그리 선녀처럼 예뻐서 네 주인이 너만 보면 껌뻑 죽고, 뭐든지 너희만 위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야? 주제를 알아야지!”
듣다 못한 손 공공이 나섰다.
“그만 하래도! 아직 어린아이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군.”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곽 공공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두 태감은 넋을 잃을 정도로 울고 있는 금용을 보며 대화를 멈췄다. 지혈이 된 소리자를 침대로 옮긴 후, 두 태감은 서로 말없이 눈짓을 보내고 자리를 떠났다.
금용은 소리자의 침대 끝에 웅크리고 앉아 텅 빈 눈으로 자신의 몸뚱이를 꼭 껴안았다. 지금은 두 사람을 돌보기는커녕 스스로를 돌볼 여유조차 없었다. 눈을 감자 전하가 피 묻은 돌멩이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고자 필사적으로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검은 호랑이로 변해 순식간에 그녀를 물어뜯어 조각내 버렸다. 놀란 그녀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노비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노비가 전하의 물건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어요. 노비가 찾아드릴게요, 반드시 찾아드릴게요…….”
금용은 멍하니 소리자를 지나 밖으로 나갔다. 구덩이를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며 황급히 방으로 뛰어들었다.
“악!”
막 잠에 들려던 곽 공공이 비명 소리에 놀라 화들짝 깼다. 그는 금용을 몽둥이로 다스리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 * *
새벽빛이 어두컴컴한 대지를 비추기 시작했다. 모든 어둠이 씻겨 나가자 땅 위로 생기가 솟아났다. 이른 아침, 잎사귀 위에 뿌려진 이슬이 초목을 무성하게 했다. 꽃이 피었고, 가지마다 열린 열매는 활기찬 광경을 만들어냈다.
황궁은 일찌감치 분주했다. 날이 완전히 밝자 궁녀들은 혹여나 잠을 못 잔 주인이 일찍 일어나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남소원에도 누군가 막 눈을 뜨고 있었다. 두통을 느끼며 일어난 구염락이 머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가 자리에 일어나 앉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자…….”
문득 어젯밤의 기억이 물밀듯이 떠올랐다. 사라진 자첩, 새까만 구덩이, 소리자의 머리를 내리치던 돌, 그리고 두 사람.
구염락의 눈빛이 일순간 차가워졌다. 이불을 젖히고 일어난 그가 소리자의 방으로 향하다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가 장서열에게 받은 약상자를 열었다.
옆방에는 피 묻은 옷을 입은 금용이 침대 옆에 꿇어 앉아 소리자의 열을 내리기 위해 수건을 짜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한 시진이 넘도록 이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익숙한 일이었지만 아직 어린 나이인 그녀에게 긴 시간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금용의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정신을 가다듬은 금용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침대에 누운 소리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예전에도 주인이 발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녀는 피비린내 정도에 기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놀란 이유는 주인이 그들에게까지 손을 뻗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구염락이 작은 문을 열어 젖혔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순간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들이 그의 마음에 뒤섞였다. 그는 분명 힘이 닿는 한 소리자와 금용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리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누워 있었다.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으로 꼬박 한 달간 침대에서 자리보전을 했던 그였다. 구염락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금용은 구염락이 방에 들어오자 몸을 움츠렸다. 억눌렀던 공포심이 다시 그녀를 덜덜 떨게 했다.
“전… 전하…….”
구염락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리자와 금용은 그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다. 주인과 노비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구염락은 소리자를 아우로, 금용은 누이동생으로 여겼다. 먹을 것이 생기면 반드시 그들과 나을 때에도 두 사람은 그를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했다. 두 사람의 진실된 마음을 그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