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우연이더냐, 아니면 실수더냐?”
아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현부가 손에 든 서책을 뒤적이며 물었다. 현천기가 공손하지만 서먹한 투로 답했다.
“우연입니다, 아버지. 장서열이 그날의 계획을 알았을 리 없습니다. 세자 또한 우연히 그녀를 데리고 나타난 겁니다. 단지…….”
현천기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흐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충왕부는 상당히 철저합니다. 정보를 알아내다가 우리 측 두 명을 잃었습니다.”
현부가 책을 덮었다. 그는 기꺼운 안색은 아니었으나 아들의 일처리를 질책하지는 않았다.
“장신성의 딸에게 그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태자는 어떠하냐. 오늘 오후에 흠천감(钦天监)에 갔다던데.”
고개를 끄덕이던 현천기는 아버지가 자신을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스로 죽을 짓을 하지 않고서야 죽을 일이 있겠습니까. 태자는 지금 충왕부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현부는 잠시 생각에 잠겨 한숨을 내쉬었다. 황가의 혈통도 아닌 충왕부가 오늘날까지 건재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단순한 왕부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미숙한 태자는 충왕 서율의 세력을 가늠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그를 도발했다. 아들의 말처럼 이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에 불과했다.
“결국 행동에 나서는구나.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그래서는 큰 그릇이 되기 힘들지. 자리 보존은 힘들겠다.”
현천기는 감히 대답하지 못했으나 이 일이 여자와 관계가 있다는 데 동의하지 못했다. 태자는 그저 능력이 부족한 것뿐이었다. 현부가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일이 터지면 서북쪽의 계획은 일단 진행하는 수밖에 없겠군. 단지 구염락만…….”
과연 그는 황제의 재목인가. 그러나 다른 방안은 없었다. 그를 황위에 앉혀야만 이들의 계획이 성공할 터였다.
“넌 구염락에게 접촉해 보거라.”
“네.”
“황제 쪽은 내가 맡을 테니 너는 그에게 집중하고.”
마음을 정했다면 계략은 제대로 세워야 했다. 제위가 바뀌는 동안 언제까지고 현 씨 가문이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부귀영화는 스스로 쟁취하는 자의 몫이었다.
“구염락과 장서열의 사이가 가깝다고 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현천기가 한 발 앞서 말했다.
“좌상부에서 손을 쓰는 건 아닐 겁니다. 장서열은 헌원상에게도 매우 잘하니까요. 단지… 소자는 그녀 쪽에 사람이 없다고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녀는 딱히 여러 사람과 친분을 쌓지는 않습니다. 헌원상도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고요.”
순간 현부가 눈을 부라렸다. 평소 온화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두 자루의 칼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현천기의 얼굴을 베어버릴 듯 주시했다.
“서자인데 장 씨 계집이 특별히 대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헌원상이 아무리 못났다 해도 호부의 유일한 아들이야. 그 이유 하나만으로 헌원상서를 통제할 수 있어!”
현천기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소자가 이미 사람을 보내 주시하고 있습니다.”
현부가 조금 누그러진 기색으로 아들을 쳐다봤다. 현천기는 비록 화를 돋우지만 조정에 등용시킬 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황제께서 장서열에게 무언가 일러준 것은 아니고?”
황제는 조옥언에게 맹목적일 만큼 강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황제는 조옥언의 딸과 혼인하는 황자라면 누구든 그 즉시 황위에 올릴 것이다.
“소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소자는 오히려 장서열이 구염락을 선택했다고 봅니다. 열셋째 구염락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분명 구염락이 황위에 오르는 데 힘을 실어줄 겁니다.”
황제가 더 이상 구염락을 죽이려 들지 않은 배경에는 그를 특별히 대한 장서열의 태도가 주효했다. 여인에 대한 황제의 안목을 비웃으며 현부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현천기는 아버지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공손히 물러나왔다.
서재를 나온 현천기는 자신의 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공손한 자세를 거뒀다. 차분하고 냉담한 눈빛은 조금 전 아버지의 말 같은 건 조금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환심을 사지 못한들 어떠하랴. 현부는 이미 일흔 살이 넘은 노인으로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받던 큰형님은 관직에 올랐으나 인생의 전성기에 임무를 수행하다 죽음을 맞이했고, 둘째와 셋째 형님은 비어있는 후계자 자리를 다투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났다. 넷째 형님은 어렸을 때부터 허약하여 생활이 자유롭지 못했고, 나머지 형제들 역시 별 볼 일 없었다. 여덟째 형님은 태생이 우매한 데다 아홉째 형님은 너무 곱상한 외모가 문제였다.
결국 가장 적합한 후보는 현천기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냉소를 흘리며 얼굴에 쓴 인면피구(人皮面具, 사람 가죽으로 만든 가면)를 어루만졌다.
‘아홉째 형님, 모질지 못했던 스스로를 탓하십시오. 여덟째 형님을 죽여서 현 씨 가문이 제일 좋아하는 얼굴을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형님도 최고의 조건을 지닌 후계자가 될 수 있을 텐데.’
* * *
저녁 무렵, 충왕부에 화려한 등불이 켜졌다. 서풍엽의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인 시종이 뒤를 돌아 물러났다.
‘금용?’
서풍엽이 두 글자를 음미하듯 곱씹었다. 계집종과 주인이라……. 그는 구염락이라면 천한 시녀 따위와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정혼자는 그 시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봐라.”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지만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시시비비를 가려 그 아이에게 교훈을 주거라.”
서풍엽이 말함과 동시에 충왕비 장소접이 아들의 방에 들어왔다. 가장 아끼는 왕비 정복을 입고 예닐곱의 시녀를 거느린 채 거들먹거리며 들어온 그녀는 조금도 말을 가려서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들, 누구에게 교훈을 주겠다는 거니? 이 어미도 끼워주렴. 흠씬 두들겨 패줄 테니.”
서풍엽이 쓴웃음과 함께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어머니.”
그는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를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예비 며느리는?”
충왕비의 아름다운 얼굴에 실망이 드러났다. 지나치게 보양을 잘한 덕분에 희고 보드라운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기색이 어려 꼭 아이 같았다. 고귀하고 우아한 왕비복을 입었지만 꼭 아이가 어른 옷을 걸친 듯한 모양새였다.
“네가 서열이를 돌려보냈니?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묵게 하라고 했잖니. 옥언 언니도 동의한 것을…….”
서풍엽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서열이는 아직 어립니다.”
“그래, 그렇지. 내가 열넷에 네 아버지와 혼인을 했으니 최소한 서열이가 열셋은 되어야 며느리로 맞이할 수 있겠구나.”
서풍엽은 시종들 앞에서 어머니가 선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황급히 큰 상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머니, 뭘 그렇게 많이 가져오셨어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서열이는 이미 부족한 게 없어요.”
충왕비가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런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야.”
“그럼 이 아들이 선물할 기회도 좀 주세요. 어머니가 다 해주시면 저는 뭘 선물하라고요.”
아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모름지기 선물이라면 당사자가 해야 진정으로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이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가져온 선물을 기분 좋게 아들의 방에 놓아두었다.
“똑똑하기는. 역시 네 아버지보다 낫구나. 혹시라도 서열이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조심하고. 참, 내일부터 서재로 옮겨가 머물거라. 이제 슬슬 신방을 꾸며야지. 삼 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시간이 충분할지 모르겠구나.”
서풍엽은 순간 하늘로 치솟아 오를 만큼 행복해졌다.
“역시 어머니뿐이에요. 앞으로 제가 서열이와 효도할게요.”
뒤에서 어머니의 허리를 껴안은 그가 응석을 부렸다.
충왕비는 한동안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며느리의 환심을 사야만 아들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니. 인생은 참 고달픈 것이었다. 그녀가 옷감 상자를 열라고 지시한 후 비단 한 필을 아들의 몸에 갖다 대며 말했다.
“난 옥언 언니의 딸에게 효도 받을 생각 없다. 네가 며느리가 언짢아 할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족하단다.”
서풍엽이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역시 인생이란 희망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시각, 구염락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남소원에 기름등이 커졌다. 저녁에 물을 긷고 나온 그는 손 공공에게 몇 가지를 물어본 뒤 거처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은 후 글씨 연습을 하려던 그는 돌연 소매 속에 넣어둔 자첩(字帖 서첩, 글자첩)이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로 간 거지? 항상 옷소매에 넣어두었는데!’
당황한 구염락은 이곳저곳을 뒤지며 자첩을 찾기 시작했다. 놓아둘 만한 곳과 그럴 리 없는 곳까지 전부 다 찾아보았지만 자첩의 행방은 묘연했다.
방 안을 한바탕 뒤집은 후 바닥까지 전부 떼어낼 기세로 살폈지만 지첩은 어디에도 없었다. 손바닥만 한 남소원에서 잃어버릴 리 없는 물건이었다.
‘대체 왜 없는 거야?’
긴장한 소리자가 식은땀을 흘렸다. 함께 찾으려다 주인에게 거절당한 뒤 그는 조용히 옷을 꿰매며 주의 깊게 구염락의 표정을 살폈다. 전하가 아끼는 그 지첩은 평범한 종이에 불과했다. 부디 전하가 제풀에 지쳐 포기하기만을 바라던 소리자는 무언가 크게 부서지는 소리에 순간 깜짝 놀랐다.
땅을 더듬으며 지첩을 찾던 구염락이 앞을 가로막던 의자를 부순 것이다.
부서진 의자를 본 소리자는 더 이상 바느질에 집중할 수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은 바늘을 제대로 쥐지도 못했다. 전하는 자첩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저토록 화를 내고 있었다. 만약 이 일의 진상을 알게 되면, 그리하여 그 종이를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느 정도로 화를 낼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소리자는 이미 자첩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금용이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사실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자신들이 조금 고생스럽게 사는 한이 있더라도, 전하께서 부귀영화를 위해 몸을 팔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리자가 고개를 숙였다. 전하가 직접 묻지 않는 한 그는 끝까지 옷을 꿰매는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손가락을 부여잡고서라도 꿰매야 했다.
잠시 뒤, 바깥의 정리를 마친 금용이 수를 놓기 위해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구염락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모습을 본 그녀가 물었다.
“전하, 무얼 찾으시나요? 노비가 도와드릴게요.”
구염락이 책상 아래로 머리를 내밀었다.
“내 자첩을 못 봤느냐? 내가 매일 베껴 쓰는 그 종이 말이다. 분명히 소매 속에 넣어둔 기억이 있는데 어찌 안 보이는지 모르겠구나.”
금용이 기억난다는 듯 답했다.
“노비가 오늘 전하의 옷을 빨았사온데 혹시 그때 씻겨 나간 게 아닐까요?”
바구니를 내려놓은 그녀가 자첩을 찾으러 급히 밖으로 나갔다. 구염락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빨래를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 금용이 어떻게 그러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금용은 세심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