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서풍엽이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힌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다. 어둡고 깊어진 그의 눈빛이 어린 연인을 바라보았다. 애써 충동을 억누른 그가 조금 더 일찍 정혼자를 낳아주지 않은 장모님을 원망했다.
한숨을 내쉰 그가 사랑하는 그녀를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하고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자는 벌을 내리면 그만이야. 구염락은 당연히 네게 고개를 숙여야지. 감히 방자하게 굴 수 없어.”
서풍엽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었지만 그 말은 그를 매우 관대하고 좋은 사람으로 느껴지게 했다. 장서열이 삐죽이며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가 금용과 소리자에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노비를 위한답시고 나를 괴롭힌다고요.”
그 말에 서풍엽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말 녀석이 그 정도로 자각이 없다면 네 곁에 있을 필요가 없어. 노비가 네 심기를 언짢게 했다면 어떤 처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을 터, 어찌 감히 반대할 수 있다는 거지?”
그녀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서풍엽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장서열의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구염락 같은 이는 자신과 영원히 소통이 불가능했다. 구염락은 온종일 자신을 심란하게 했고, 그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장서열의 일거수일투족은 온통 구염락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만히 서풍엽의 품에 기대어 있던 장서열이 갑자기 그를 꼭 껴안았다.
“미안해요. 나 앞으로는 오라버니에게 잘할게요.”
다시는 자신의 마음을 배은망덕한 녀석의 발에 차이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서풍엽은 그녀가 방금 전 이야기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겼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기분이 좋았다. 훈훈하고 편안했다.
“부인의 총애를 받으니 어쩔 줄 모르겠군.”
서풍엽을 한 번 쏘아본 장서열이 다시 가만히 그의 품에 기댔다.
“그 마음, 영원히 변치 않을 건가요?”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 능력이 없어도,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더라도, 서풍엽만큼은 구염락과 다를 것인지 궁금했다. 누구도 자신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막아줄 수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서풍엽을 단단히 끌어안은 장서열이 기대에 찬 시선을 던졌다.
서풍엽은 순간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자신을 의지하는 장서열의 모습이 그를 설레게 했다. 그가 얼른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널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네게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화를 내려는 그녀를 꿋꿋이 품에 안은 채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넌…….”
서풍엽이 살며시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머니께 말하면 안 돼. 넌 내 어머니보다도 마음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네가 좋은 사람이든 아니든 넌 내 아내야. 내 마음은 이미 네게 있고 이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녀가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순간 장서열은 서풍엽을 만나기 위해 이번 생을 기다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더욱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바보 같아서 싫지 않아요?”
“내 남은 생은 널 똑똑하게 만드는 데 바칠게.”
“만약 끝까지 똑똑해지지 못하면요?”
“그럼 더 좋지. 바보 같은 부인은 집에서 부엌데기로 쓰고, 밖에서는 하고픈 대로 맘껏 누리며 살 수 있을 테니까.”
“서풍엽!”
장서열이 서풍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서풍엽은 마땅히 그 고통을 감내했다. 부드러운 몸이 그를 향해 떨어지자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장서열은 그대로 서풍엽을 누르며 괴롭혔다.
서풍엽은 그녀의 손을 꽉 쥐며 반격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아플까 봐 세게 잡지는 못했다.
“어라?”
마침내 그를 놓아준 장서열이 고개를 들었다.
“집에 도착할 때가 됐는데, 어딜 가는 거죠?”
“풍월루(风月楼)에 가는 길이야. 우리 아가씨를 극진히 모셔야지.”
“정말요?”
신이 난 장서열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전생에서는 가보지도 못한 곳이었다. 그런 호사를 누리기도 전에 금용과 싸우다 죽고 말았다.
“내게 이렇게 잘해주다니. 난 양춘면(阳春面, 맑게 끓인 닭국물에 국수를 넣은 요리)을 세 그릇 먹겠어요.”
정신을 차린 서풍엽이 곧 엄숙히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장난을 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
과거 수많은 호걸들을 무릎 꿇게 한 조옥언의 딸답게 그녀는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서풍엽은 자기도 모르게 계속 구염락을 떠올렸으나, 그는 겨우 여덟 살 먹은 꼬마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마차가 멈추자 마부가 공손히 휘장을 열어주었다.
서풍엽은 곧장 앞으로 뛰어내리려는 장서열의 모습에 황급히 먼저 마차 밖으로 뛰어내린 뒤 그녀를 안아서 내려주었다.
“천천히 가.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장서열은 이미 걸리적거리는 서풍엽의 손을 벗어난 뒤였다. 금세 표정이 어두워진 서풍엽이 부하에게 명했다.
“납복에게 다녀와라. 가서 구염락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하라.”
“네.”
* * *
수업이 끝난 후 구염락은 곧장 장서열의 거처로 향했다.
“서열 누님!”
그러나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넋이 나간 구염락이 소리쳤다.
“납복, 납복! 서열 누님은? 누님이 없어졌어!”
납복이 황급히 옆방에서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세요?”
놀라서 허둥지둥하는 구염락을 본 납복은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방금 전 서풍엽의 말을 떠올리고는 성난 어조로 말했다.
“없어지다뇨. 세자께서 아가씨를 데려가셨지요.”
‘갔다니? 내가 누님을 배웅하지도 않았는데?’
구염락은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누님은 자신이 배웅해주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이었다.
‘내 수업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마차에 태워 보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혼자 갔다는 거지?’
구염락이 급히 발걸음을 옮겨 전각 바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가 나왔을 때 이미 마차들은 줄지어 떠나고 있었다. 익숙한 휘장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갑자기 의지할 곳을 잃은 사람처럼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구염락은 그대로 넋을 잃은 채 서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서열 누님이 뛰어나와 괜찮냐고 물어봐 줄 것만 같았다.
구염락을 본 당자가 마차의 휘장을 걷었다.
“열셋째. 왜 혼자야? 서열 누님은?”
구염락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당자를 바라보았다.
“서열 누님은… 먼저 갔어요.”
“그래? 그럼 너도 이만 돌아가라.”
별일 아니라는 듯 당자가 휘장을 내렸다. 마침 늘어선 마차의 대열 속에 있던 류소경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권서함을 힐끗 바라보았다.
“봤어? 충심이 아주 지극하네.”
권서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초혜전 바깥은 모두가 떠난 후 구염락 혼자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오늘 장서열이 자신의 배웅 없이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 * *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다. 붉게 물든 구름은 연경의 하늘을 반쯤 물들였다가 곧 황급히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길가에 문을 연 노점이 늘어났고, 시원한 저녁 바람이 사람들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낮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연경의 대로는 야시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가장 소란한 거리를 지나면 막강한 군대가 지키는 내성(内城)이 있었다. 칼을 쥔 사병들은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주변을 오갔다. 이곳은 황성의 경계로, 거주하는 이들은 모두 하늘을 찌를 만한 권세를 가진 귀족들이었다. 한 줄로 세워진 패루(牌楼, 장식용 아치 건축물)는 세도가와 평민 사이에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 이들의 생활권을 명확히 구분지었다.
내성의 세도가가 위치한 백상가(白橡街)에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저택이 하나 있었다. 오래된 대문은 몇 대에 걸친 보수 끝에 두 배나 넓어진 길이를 자랑했고, 험상궂은 독수리는 돌사자만큼 커다란 크기로 만들어져 있었다. 압도적인 대문 외에도 ‘현부(玄府)’라는 두 글자는 두려울 정도로 번쩍이는 빛을 발했다.
수많은 이들이 마을에 들어오고 떠나고를 반복했지만 ‘현부(玄府)’ 두 글자는 드넓은 저택에 언제나 변함없이 자리했다.
새로 이주한 이들은 대저택의 귀족과 친분을 쌓고 싶어 했지만 좀처럼 만날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도 퇴색되어 갔다. 마을을 드나드는 누구도 대저택의 주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대저택의 주인인 현 씨 가문은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고요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2품 고관 자리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현 씨 가문의 후계자는 그 품성이나 용모와는 관계없이, 마치 그 관직 자체가 그들 가문을 위해 존재하는 양 언제나 2품 관원에 임명되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이들 문중에서는 대대로 꼭 한 명만이 조정에 진출했으며,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거나 세간에 오르내리는 불상사를 일으키는 일도 없이 그저 조용히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다소 독특한 성 씨를 제외하면 사람들에게 기억될 만한 어떠한 특징도 없는 가문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전혀 쇠퇴한 적 없는 이 저택이 어느덧 황위를 노릴 만큼 커졌다는 것을.
석양에 비친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현천기의 작은 몸뚱이가 길고 긴 외랑을 지나 내원으로 돌아가는 수레에 올랐다. 모든 과정은 조금의 기척도 없이 귀신처럼 조용히 이뤄졌다.
그는 거리에서 유행하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윗옷의 두 섶을 겹치지 않은 채 가운데를 단추로 채우는 적삼의 겉에는 군포(群袍)를 걸치고 있었는데, 색채가 없고 무늬도 없어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현천기는 남의 눈에 띄지 않았다. 머리는 이미 속발(束发, 15세가 되어 묶은 머리)하여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낸 것 같았다. 게다가 곁에 지나간다 해도 기억하기 힘들 만큼 특징이 없고 평범한 얼굴이었다.
흑칠목(黑漆木)으로 만든 서재의 문이 열렸다.
현천기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작은 몸은 움직임이 가뿐했다. 한눈에 봐도 내가(内家, 내부에 무공을 감추거나 내공이 주를 이루는 무술가)의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현부(玄父 현천기의 아버지)는 커다란 홍목 가구 뒤에 앉아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책장은 서재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책장 위의 책들은 몹시 낡았지만 쉽게 구할 수 없는 유일본이었다. 모든 책들은 백 번은 족히 읽었을 만큼 그 모양이 남달랐고 내부는 서책 향기로 가득했다.
현천기와 같은 생김새를 한 현부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기억에 남지 않을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현천기는 아버지보다도 자연스러운 몸짓을 터득해 타인의 눈에 더욱 띄지 않았다. 현부의 담백하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책들을 넘어 방 안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