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50)화 (50/449)
  • 제50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서열은 반드시 금용을 무너뜨리겠다고 결심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기필코 금용에게 좋은 물건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그래서 구염락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고, 금용은 쥐구멍으로 숨고 싶을 만큼 송구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녀는 후에 구염락을 위시한 금용의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낮출 생각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지. 금용, 널 죽이지는 않으마. 하지만 이 몸 앞에서 평생을 시녀처럼 납작 엎드려야 할 것이다.’

    납복은 의아한 눈길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아가씨가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바깥에 나도는 유언비어 때문인가? 이상하다. 그런 일로 화를 내실 분은 아닌데.’

    눈치껏 방에서 물러난 납복은 문밖을 지키던 태감을 불러 무어라 귓속말을 전했다. 소태감은 그 즉시 목패(木牌)를 들고 출궁했다.

    잠시 뒤, 그녀를 데리러 서풍엽이 도착했다. 장서열이 서풍엽의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어쩜 이렇게 딱 맞춰 올 수가 있죠? 궁에 첩자를 심어 놓은 거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요.”

    서풍엽이 마차의 휘장을 걷었다. 하늘색 망포(蟒袍, 금색의 이무기가 수놓아져 있는 예복)를 걸치고 가슴에 머리카락을 드리운 모습은 기품과 위엄을 동시에 내보이고 있었다.

    “예예, 꼬마 어르신. 목소리 좀 낮추시죠. 안 그러면 정말로 요절할 지도 몰라.”

    마차가 연경의 널찍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서풍엽은 마차에 오른 뒤 줄곧 멍한 얼굴로 앉아있는 그녀의 앞에 찻잔을 내밀었다. 그가 격려하듯 미소 지었다.

    “대체 누가 우리 아가씨의 심기를 어지럽혔을까?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네.”

    서풍엽에게서 찻잔을 받아든 장서열이 짐짓 그를 흘겨보았다.

    “내 얼굴이 그다지 화사하지 않았나봐요?”

    서풍엽이 마음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너무 화사해서 나의 귀여운 정혼자가 억울한 일을 당했구나 생각했어.”

    마차에 몸을 기댄 장서열이 서풍엽을 한 번 바라보았다. 차를 마실 기분이 사라진 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까닭 없이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 건 퍽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진심으로 자신을 생각해줬다.

    “별일 아니에요.”

    시끌벅적한 창밖의 인파와 그들 각각의 일상을 바라보던 그녀가 돌연 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

    뜻밖의 질문에 서풍엽은 약간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서열이를 저토록 시무룩하게 만들다니, 태자도 제법 머리가 커진 모양이었다.

    턱을 괸 그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여쁜 것 외에는 뭐 하나 뛰어난 게 없는 것 같아.”

    “서풍엽!”

    “발로 차지 마! 알았어, 농담이야.”

    재빨리 몸을 피한 덕분에 화를 면한 그가 바보처럼 웃으며 사색에 잠겼다.

    “음, 도도한 성격이야. 솔직히 말하면 좀 차갑지. 아아, 또 화내지는 말고. 상처받은 내 마음은 전혀 위로해주지 않는다든지… 하하, 또 입술 삐죽거린다.”

    서풍엽이 얼른 보충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말 남의 말을 안 듣지.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또 그걸 죽어도 고치지 않는 냉담한 성격이랄까. 너무 솔직히 말한 나를 용서해줄래?”

    초혜전을 통틀어 그녀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채 다섯 명도 되지 않을 터였다.

    화가 난 장서열이 옆에 있던 등받이 베개를 그에게 집어 던졌다.

    “이 몸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정혼자를 바꾸시지요!”

    서풍엽이 웃으며 단숨에 장서열을 껴안은 뒤 무릎 위에 앉혔다. 그가 분노를 내뿜는 그녀의 코를 귀엽다는 듯 톡톡 두드렸다.

    “아가씨,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어.”

    장서열은 더는 그와 옥신각신할 기분이 아니었다.

    “굳이 사생취의(舍生取义, 정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다) 할 필요 없어요.”

    “고사성어도 쓸 줄 알다니 아주 훌륭해. 학식 있는 부인을 얻겠군.”

    장서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연경에서 그녀가 무식하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전생에서 그녀를 정의하는 말은 ‘바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약점을 감추기 위해 이번 생에서만큼은 숨죽여 살았고, 타인과의 교제도 삼갔다. 덕분에 듣기 거북한 소문은 나지 않았으나 다른 면에서 경박한 여자라는 꼬리표를 얻게 되었다. 어쩜 이렇게 재수가 없는지 모를 일이었다.

    “왜 그래?”

    서풍엽은 장서열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사과했다.

    “잘못했어. 난 입이 방정이라니까. 나 같은 건 맞아도 싸. 울지 마. 정말 장난이었어. 우리 서열은 똑똑하고 예쁘고 정의감까지 넘치는 연경 제일의 귀녀(貴女)야.”

    도도한 표정으로 서풍엽을 힐끗 바라본 그녀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서풍엽이 다시금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더욱 꼭 품에 안았다.

    “바보야, 이제 말해 봐. 누가 성질도 부릴 줄 모르는 우리 아가씨를 괴롭혔지? 이 부군이 가만 두지 않을게.”

    순간 그가 진지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더는 대답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물밀 듯 덮쳐오는 설움을 느꼈다. 서풍엽의 너그러운 눈빛을 마주하자 지난 몇 년 동안 한결 같았던 그의 지극정성이 새삼 다시 피부에 와닿았다. 그의 관대함을 이용해 원수 같은 구염락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온 자신은 어쩌면 배은망덕한 사람이었다.

    구염락이 서풍엽보다 나은 게 뭐지? 누가 서풍엽만큼 자신을 이해해 준단 말인가.

    장서열은 어리광을 부리듯 서풍엽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그의 목에 머리를 기댄 뒤 애교스럽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학당 사람들은 정말 나빠요. 걸핏하면 내 험담을 해요. 내가 대체 뭘 했죠? 여자아이들보다 예쁘게 생기고, 남자아이들에 앞서 태자의 눈에 든 것뿐인데. 마치 내가 그들의 기회를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굴어요. 불여우 취급이라구요.”

    서풍엽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다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자신의 착한 정혼자를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본인이 예쁘다는 사실은 아는군.”

    그녀도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당연하죠.”

    그녀가 서풍엽을 끌어안은 채 계속 소곤거렸다.

    “그리고 구염락이…….”

    구염락의 이름을 들은 서풍엽이 잠시 멈칫했다. 그가 뭘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보아하니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장서열은 금용을 데려다 줄 때 기뻐하던 구염락의 표정을 떠올리자, 마치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그때의 기분을 서풍엽에게 토로했다.

    “그동안 내가 더할 나위 없이 잘해줬는데, 남이 잘해준 것만 기억하고 있었어요. 진작 알았다면 상종도 하지 않았을 텐데.”

    서풍엽은 그녀의 푸념을 들으며 생각했다.

    ‘잘됐네. 그 참에 서로 죽을 때까지 보지 않고 사는 건 어때?’

    서풍엽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없이 경청했다. 장서열이 구염락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지금은 그녀가 구염락에 대한 불만을 쏟아놓고 있다 해도, 다른 사람이 그를 비방하는 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대체 나는 뭐죠? 방해꾼? 언젠가 내가 그 시녀를 꾸짖기라도 하면 그는 날 환생한 마귀라며 처형할지도 몰라요!”

    근거 없는 맹목적인 분노였다. 서풍엽은 구염락이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장서열을 화나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그 둘이 죽었다 깨어나도 서로 사랑하라고 저주하겠어요!”

    ‘그게 무슨 저주야?’

    서풍엽은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치 처남과 싸우는 모양새라 그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나쁜 놈이 될 것이다.

    “왜 웃어요? 난 화가 나 죽겠어요! 배은망덕한 녀석! 기껏 챙겨주면 뭐해, 그대로 가져가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주는데! 나중에 높은 사람이 돼서 날 뭐라고 욕할지 알 게 뭐람. 어쩌면 내가 녀석이 잘 될 거라는 걸 미리 알아서 흑심을 품고 잘해줬다 떠들고 다닐지 모를 일이죠!”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심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계집종 따위에 밀렸다는 사실에 마치 패배한 듯한 기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서풍엽은 이해할 수 없었다. 구염락이 서열이보다 높은 사람이 된다고?

    “그럴 리 없어. 너에 대한 녀석의 마음은 하늘과 땅이 다 아는걸.”

    중재의 말 한 마디 정도는 괜찮을 터였다.

    “헛소리. 하늘과 땅이 안다고요? 그저 배은망덕한 녀석일 뿐이에요.”

    서풍엽은 차마 불난 집에 부채질은 하지 못하고 그녀의 말 속에 담긴 내용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일단 계집종과 관련된 일인 건 분명한 듯했다.

    ‘구염락 정도는 되어야 서열이를 질투하게 만들 수 있나 보군. 아니, 서열이는 지금 과연 질투하는 게 맞을까?’

    한참을 생각하던 서풍엽은 장서열이 질투보다는 총애를 다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풍엽은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다. 그는 구염락이 여태까지 황궁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한스럽기만 했다.

    “그의 눈에 난 그 천한 년만도 못한 거야!”

    그녀는 서풍엽의 앞에서 조금도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따귀 두 대를 치고 신형사로 보내 버려. 심리적, 신체적 괴로움을 주는 거지.”

    순간 장서열의 두 눈이 반짝였다. 역시 자신의 마음을 아는 건 풍엽뿐이었다.

    물론 서풍엽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염락에게만큼은 언제나 관대했다.

    태자가 어떻게 장서열을 이토록 화나게 만든 것인지 의아했던 서풍엽은 이제야 비로소 진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문득 검지를 세운 장서열이 서풍엽을 쳐다보았다.

    “혹시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장서열은 울적해졌다. 자신은 천성부터 어리석게 태어나 남을 이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닐까? 두 생애 모두 이토록 실패하다니. 그렇다면 다른 이가 빛나도록 희생양이 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서풍엽이 가슴을 두드리며 큰소리쳤다.

    “네 억지를 받아주는 게 나의 존재 이유잖아.”

    장서열이 빙그레 웃으며 그를 꼭 껴안았다. 마음이 포근해진 그녀가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풍엽, 내게 정말 잘해주네요. 내가 너무 마음이 좁고 옹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아니. 나였다면 그런 자는 골백번도 더 죽였을 거야.”

    순간 그녀가 꽃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행복으로 가득 찬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가늘어졌다. 희고 부드러운 손이 서풍엽의 목을 휘감았다. 그녀가 그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난 풍엽 오라버니가 제일 좋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