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이 일은 곧 날개 달린 듯 퍼져 나가 앞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장서열과 권서함의 유언비어를 제치고 단숨에 초혜전을 휩쓸었다.
“태자는 역시 장서열에게 마음을 못 접었나 봐.”
“태자가 선물한 강아지는 범 양제가 계속 달라고 조르던 거라더군.”
“그 말인 즉, 태자의 마음 속 태자비는 여전히 장서열이라는 거지.”
“세자만 불쌍하게 됐네.”
“쳇, 얼굴 좀 반반하다고 여기서는 권 공자, 저기서는 태자와 놀아나다니. 이제는 하다하다 태자께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흘려 태자가 신분도 불사하고 선물하게 만들었잖아. 장서열은 하루라도 사건을 일으키지 않으면 어디가 덧나나.”
누군가 머뭇거리며 쭈뼛쭈뼛 말했다.
“내… 내 생각에 장서열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러자 모든 이가 벌떼처럼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네가 뭘 알아! 그 애가 너한테 웃어주기를 해, 아니면 득이 되기를 해? 네 혼을 쏙 빼놓은 것밖에 없잖아. 앞으로 좀 멀리하도록 해. 걔는…….”
이렇듯 근거 없는 말은 날개를 달고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류소경이 책을 읽고 있는 권서함을 향해 다가왔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권서함의 귓가에 머리를 대고 말했다.
“봤지? 그새 널 잊고 다른 사람을 찾았다잖아.”
순간 차갑게 표정을 굳힌 권서함이 손에 든 책을 탁 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류소경이 즉시 항복했다.
“내 입이 워낙 가벼워야 말이지.”
그리고는 이어 중얼거렸다.
“하긴, 서풍엽도 아무 말 안 하는데 왜 내가 마음을 쓰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내 부인이 바람이 난 것도 아닌데 말이야.”
권서함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그간 여러 일이 있었지만 서풍엽은 한 번도 파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시 책을 편 그가 익숙한 글자들을 바라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은 책을 떠나 있었다.
자신 역시 한때 유언비어의 중심에 있었지만 소문처럼 장서열이 단정치 못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녀는 다른 귀족 여자아이들과 비교해 타인과 쉽게 교류하지 않았고 괜한 논쟁을 피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서열이 매번 소문의 중심에 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권서함은 의아해졌다. 대체 장서열의 어떤 점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청산에서의 일만 해도 그랬다.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아무 것도 못 본 사람처럼 굴었다. 그들 중 오직 당자만이 그녀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했고, 다른 사람들은 장서열의 이름조차 불러보지 못했다.
사람을 가리던 장서열의 모습과 그런 그녀의 등 뒤에서 길길이 뛰는 아이들을 동시에 떠올리던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장서열은 확실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 * *
오는 길에 바깥에 퍼진 풍문을 전해 들은 당자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잠시 못 본 사이에 또 소문의 중심에 서다니, 이쯤 되면 그녀는 천성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문을 닫은 당자가 장서열이 앉은 의자 주변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태자는 대체 무슨 속셈이래? 이미 정혼자가 있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태자면 다야?”
만정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열 언니가 또 이런 일을 당하다니. 정말 운이 나빠. 세자께서 유언비어를 믿지 않기만 바라야지.”
동시에 만정은 열셋째가 장서열에게 부쳐 주는 부채를 빼앗으려 했다. 구염락은 아예 만정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슬쩍 몸을 피한 뒤 근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자가 한쪽에 있던 촛대를 쾅 소리가 나게 집어 던진 후 불같이 노하여 소리쳤다.
“하찮은 유언비어는 그렇다고 쳐! 진짜 문제는 세자가 태자를 싫어하게 되는 거야!”
말을 마친 당자가 장서열의 손에 들린 사과를 빼앗았다.
“지금이 사과가 목구멍에 넘어 가? 상대는 태자라고!”
장서열이 알 수 없는 눈길로 당자를 바라보았다.
“알아. 상대가 태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걱정 안 해.”
거절 의사를 밝혔을 때 이미 태자의 미움을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태자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장서열이 빼앗긴 사과를 다시 가져왔다.
“그만 하고 아이들과 함께 수업에 가. 난 좀 놀라서 안정이 필요하니 오후 수업에는 안 갈 거야.”
“안 간다고?”
“왜 안 간다는 거야!”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아이들은 더욱 수군거릴 게 뻔했다. 구염락이 얼른 입을 열었다.
“저도 안 갈래요. 누님 곁에 있을게요.”
그의 말에 장서열이 사과를 먹던 동작을 멈췄다.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사실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구염락이었다. 그는 계집종 하나 이기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못난 실패자인지를 시시때때로 일깨워 준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장서열은 겉으로는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가 그를 달래며 말을 이었다.
“괜찮아. 너는 가 봐야지. 네가 수업에 오지 않으면 스승님께서 마음 아파하실 거야.”
당자는 눈을 흘겼다. 그는 장서열의 시원찮은 모습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누님, 일부러 꾀를 부리는 거죠?”
“당자, 악의적으로 헐뜯지 마.”
* * *
“장서열은 안 왔어?”
낮은 소곤거림이 울려 퍼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잖아.”
“그냥 아예 초혜전에 오지 말라고 해.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험담을 두려워하다니. 난 오히려 범 양제 쪽이 태자비가 될 그릇이라 생각해.”
“여기저기 함부로 집적거리는 버릇을 고치는지 두고 보겠어.”
“쉿, 스승님께서 오신다.”
권서함은 아무 것도 못 들은 체했다. 그들이 아무리 입이 닳도록 떠들어 봐야 당사자인 장서열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무시했다.
‘그나저나 어째서 수업에 나오지 않은 걸까…….’
한편, 초혜전 밖에 선 금용은 으리으리한 황실의 정원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작은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오전 내내 기다린 그녀에게 구염락은 아무런 소식도 보내오지 않았다. 구염락은 그들을 찾아가지도 않았고, 결국 그녀를 찾아와 사과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줄곧 방 안에 앉아 있었으며 가끔씩 방에 들어와 그녀를 보며 웃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분명 그녀를 비웃은 것이었으나 당시 이를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그들을 향해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금용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 단정하게 차려입고 오게 한 이유가 고작 남의 눈치를 보게 하기 위함이었다니? 심지어 그녀는 방을 나설 때 자신을 괴롭힌 자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나돌아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 여기까지 올 이유가 무엇이었단 말인가. 다시 비웃음을 당하기 위해?
금용은 주인에게 하사 받은 식사 꾸러미를 손에 들었다. 마음이 시큰하게 아렸다. 오전 내내 앉아 있다가 얻은 것이 고작 이 점심밥 하나라니…….
‘내 억울함은? 이제 전하는 상관없는 걸까?’
금용은 혹시 전하께서 누군가에 의해 손발이 묶였거나, 방의 주인이 전하께 나서지 말라고 지시한 게 아닐까 의심했다. 방을 나서며 우연히 들은 유언비어가 떠올랐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만한 그 내용은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전하는 그렇게 수치도 모르는 주인을 따르게 된 걸까? 혹시 그 여자가 늙은 태감 마냥 전하께 추파를 던지는 게 아닐까? 역겨워! 몇 살이나 되었다고! 전하께서는 분명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셨을 거야.’
금용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미리 알았다면 전하를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전하를 곤란하게 하다니…….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가여운 전하께서 어떻게 높은 사람과 싸울 수 있겠는가. 공연히 전하만 비웃음을 사게 된 꼴이었다.
금용이 손에 쥔 꾸러미를 꽉 움켜쥐었다.
‘뒤에서 태자가 받쳐주고 앞에서는 세자가 비호하니 우리를 무시하는 거야. 아무리 호화로운 곳에 살아도 썩은 마음은 감출 수가 없지. 겨우 밥 한 끼로 입을 다물게 하려고? 꿈 깨시지!’
금용은 구염락을 걱정하는 것과 동시에 권세를 가진 사람들을 향해 분개를 터트리며 그 불쾌한 전각을 서둘러 떠났다.
* * *
장서열은 초혜전에 마련된 비단 침대에 홀로 누워 있었다. 금용을 데려온 구염락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녀는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꼈다.
“납복.”
납복이 휘장을 걷었다.
“예, 아가씨.”
“금용은 갔느냐?”
납복이 즉시 웃으며 답했다.
“예, 아가씨. 갔습니다. 정말 예쁘게 생긴 계집이더군요. 열셋째 전하께서 아끼시는 것도 당연해요.”
입술을 삐죽 내민 장서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용의 외모는 익히 알고 있었다. 비천한 신분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만인이 바라 마지않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전생에 한 조정 대신이 금용을 아내로 맞이하려 한 적도 있었으나, 그녀는 구염락을 택했다.
금용을 떠올리자 장서열의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장서열은 자신이 한발 늦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차지했어야 할 자리를 이미 금용이 꿰차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구염락과 금용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깨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금용에게 손을 대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여기서 장서열이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은 금용이 본능적으로 구염락을 극진히 모신다는 점이었다. 구염락이 자신에게 아무리 고마워한다 한들 그가 계속해서 금용을 소중히 여긴다면, 금용이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구염락이 그녀를 멀리할 리 만무했다. 이 시점에서 둘의 관계를 깨뜨리려 한다면 오히려 구염락의 반발을 살 수도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지난 수년간 구염락에게 들인 노력들이 스쳐 지나갔다.
‘금용을 죽이는 게 과연 지난날의 수고와 맞바꿀 가치가 있을까?’
하지만 금용에 대한 원한을 깨끗이 잊고 포기하는 건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전생에서 금용은 황후인 자신의 자리를 노렸다. 심지어 그때까지 그녀는 금용을 괴롭힌 적도 없었다.
장서열은 전생은 전생으로 남겨 두고, 이번 생에서는 과거의 원한을 삼켜야 하는가 고민했다. 이대로 금용을 방해하지도, 금용과 충돌하지도 않으며 온전히 금용의 뜻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차라리 금용을 깨끗이 죽여버리는 편이 나았다.
과거 그 사악한 계집은 구염락의 마음을 좀 더 일찍 얻었다는 이유만으로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악랄하게 제거했다. 어쩌면 자신 역시 후에 금용의 눈에는 방해물로 인식될 수 있었다. 반드시 먼저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