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납복은 굳이 ‘청루(靑樓, 창기(娼妓)나 창녀들이 있는 집)’라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만일 이 일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신형사(慎刑司)에 끌려갈 것이다.
장서열은 감탄했다. 납복이 무슨 이유로 이러한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환심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장서열은 납복을 눈여겨보았다.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초혜전 일방(一房) 대궁녀의 지위에 오른 사람답게 말솜씨가 대단했다.
“그래?”
납복이 온화하게 웃었다.
“그럼요. 게다가…….”
납복이 무언가를 알려주듯 열셋째 구염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노비는 노비일 뿐이지요. 좋은 노비는 결코 주인을 나서게 하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자비로운 주인을 만났다 해도, 노비라면 결코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인께서 베풀어 주신 은덕을 잊는 건 주인께 노비의 목숨을 넘겼다는 사실을 잊는 것과 같지요.”
장서열은 겉으로는 순진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계속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납복처럼 주인의 은혜를 헤아릴 줄 아는 노비가 몇이나 되겠는가. 주인에게 목숨을 넘기는 건 영예와 치욕이 공존하는 선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주인을 자식처럼 키운 유모가 아니고서야 하인이 주인을 친자식처럼 아끼는 건 불가능했다. 따라서 장서열은 하인의 진심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각자의 책임만이라도 다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 역시 갖은 고초를 겪었던 탓에 이들이 더 좋은 환경을 위해 잔꾀를 부리는 것까지는 탓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금용 또한 순수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 역시 노비로서 대가를 지불했기에 이후의 삶을 존귀하게 보낼 수 있었으며 결점이 있어도 너그럽게 용서받았다.
장서열은 지금 당장 구염락으로 하여금 금용을 처벌하게 만들 자격이나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건, 금용이 자신을 죽인 뒤에도 여전히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권력에 눈이 먼 금용은 결국 만정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구염락이 과연 몰랐을까?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좋았던 기억에 기대어 언제나 금용을 비호했고, 금용은 순진한 척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우겼다.
장서열은 금용이 걸었던 길을 걷기로 했다. 먼저 은혜를 내릴 것이다. 살길은 그 이후에 자연히 생길 터였다. 지금 금용을 곤경에 빠뜨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고개를 기울인 장서열이 천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남 좋은 일을 시켜야 하는 스스로에게 욕지거리가 나왔다.
“납복, 금용은 다르다. 열셋째에게 매우 잘하거든. 게다가 열셋째의 목숨까지 구했다는구나.”
장서열의 말에 구염락이 감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낭랑하고 산뜻한 목소리를 들은 그의 마음은 몹시 편안해졌다. 그는 역시 서열 누님은 과연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오직 그녀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생각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시선이 마치 찌르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당연히 본심이 아니었다. 그녀는 당장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 숨고 싶었지만 이내 속으로 냉소를 터뜨렸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선명해지는 듯했다.
지난 생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도 지금처럼 분별 있게 군 적이 없었으니까. 장서열이 개운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게 다 뭐라고.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게지.’
그녀는 전생에서 구염락에게 지은 죄가 있었지만 그 빚은 이미 과거에 다 청산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번 생에서 그를 이용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그를 평탄한 길로 인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금용은 달랐다. 금용은 그녀에게 빚이 있었다. 그녀는 반드시 금용을 불리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물론 복수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번 생에서만큼은 고단하게 계산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고, 싫어하는 사람은 마음껏 미워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 힘껏 좋아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니 구염락, 우리도 부디 이번 생에서는 서로에게서 벗어나 각자 편안한 삶을 살기로 해.’
미소를 머금은 납복이 장서열의 심중을 헤아리다가 답했다.
“이러면 어떨까요, 아가씨. 열셋째 전하께서 금용의 가족에게 상을 내리는 거예요. 전하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요. 그렇게 하면 노비에 대한 고마움도 전할 수 있고 그 가족들의 체면도 세울 수 있을 테니, 상 자체보다 더 값진 선물이 되지 않을까요?”
‘은혜를 재물로 환산해 준다?’
장서열은 말재주가 좋고 주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납복이 매우 유능하다고 생각했다. 구염락이 부자연스럽게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에게는 은자도 없었고 귀한 물건도 없었다. 장서열이 깊이 생각하는 척 구염락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열셋째는 남자아이이고 또 궁 안에만 있었기 때문에 여자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지 못하지. 바깥의 상황도 잘 모를 것이고…….”
“…….”
“차라리 이러면 어떨까? 금용에게 보낼 선물은 내가 준비할게. 그동안 정성을 다해 네 시중을 들어준 것에 대한 나의 보답으로 말이야.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보낼 선물은 풍엽에게 맡기자. 그는 보고 들은 게 많으니 우리보다 더 잘 할 거야.”
구염락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서열이 그를 대신해 감사 선물을 보내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네, 그런데…….”
구염락이 쑥스러운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소리자도 그간 열심히 시중을 들었는데…….”
장서열이 그의 머리를 콕콕 두드렸다.
“너도 참 못 말리는구나. 그래, 소리자도 함께 상을 내리자. 자, 그럼 이만 금용은 돌려보내도록 해. 별 일도 아닌데 그 아이더러 직접 사죄하라는 건 너무한 처사야."
장서열이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어 보이자 기분이 좋아진 구염락이 의자에서 뛸 듯이 내려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누님, 그럼 저는 이만 금용이랑 돌아갈게요. 하루 종일 기다리느라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장서열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래, 어서 가 봐.”
장서열이 이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그 아이에게 줄 만두 좀 가져가. 분명 배가 많이 고플 거야.”
그러나 그 말을 듣지 못하고 구염락은 이미 저만큼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던 장서열이 손수건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성격도 급하기는. 납복, 주방에 가서 금용에게 음식을 보내거라.”
납복이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서는 참 상냥하세요. 노비가 바로 가겠습니다.”
뜰 안의 초목을 바라보던 장서열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햇볕 아래 활짝 만개한 꽃송이를 보던 그녀가 문득 시선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매일 구염락을 마주하느라 자신의 천성이 어떠한지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가면을 쓰고 비열한 수작을 부리면 정말 이번 생은 평안하게 보낼 수 있을까…….
“꺄!”
순간 깜짝 놀란 장서열의 몸이 굳었다. 보드랍고 덥수룩한 작은 발이 그녀의 목에 닿아 있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하얗게 질렸다. 한편, 본의 아니게 그녀를 놀라게 만든 구염단신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난……!”
햇빛 아래 태자의 망포(蟒袍, 금색의 이무기가 수놓아진 도포)가 번쩍거렸다. 평소와 달리 침착함을 잃은 그가 황급히 손에 안고 있던 강아지를 놓은 채 장서열에게 다가왔다.
“서열아, 미안하다. 일부러 놀래키려던 생각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창문에서 뛰어내리지 말 것을!’
놀란 납복이 뛰어왔지만 주변에 있던 시녀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서열을 달래는 태자의 모습에서 이 상황이 그가 부린 술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태자는 오랫동안 초혜전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으나 지금껏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한 모양이었다. 납복이 서둘러 태자의 손에 붙들린 장서열을 강제로 빼낸 후 부축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한편, 장서열의 외침을 들은 구염락이 금용을 남겨 둔 채 부리나케 다시 달려왔다.
“서열 누님! 어떻게 된 거예요?”
도착한 구염락은 그 즉시 장서열을 부축하던 납복의 손을 뿌리친 후 그녀를 넘겨받았다. 무척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 소란에 사람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다 태자를 확인하고는 다시 황급히 고개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들 모두 작은 틈새를 통해 하나도 빠짐없이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장서열은 이미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정신을 차린 뒤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많이 나아졌어요.”
그녀의 말에 구염단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원래는 그녀에게 깜짝 선물을 전해주려던 것이었다. 태자는 일이 틀어진 게 못내 안타까웠다.
“괜찮느냐? 태의를 부를까?”
태자의 말에 장서열이 구염락의 손을 놓고 몸을 굽혀 절을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전하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구염단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너까지 내게 이러느냐…….”
그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장서열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입가에 맴돌던 말을 억지로 삼키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고개를 든 장서열이 태자를 향해 웃어보였다. 그녀는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봐, 나는 고작 이런 사람이야. 권세에 빌붙어 이익만 취하고 해가 되는 건 피하려는 사람.’
태자가 권력을 갖고 있는 한, 그녀는 감히 그를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고작 그 정도의 담력조차 없었다.
구염단신이 마음 아파하며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장서열을 억지로 웃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열아, 난…….”
장서열은 긴장했다.
‘무슨 짓이지. 태자가 총애하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니 나와 풍엽은 잠자코 견뎌야 한다는 건가. 아니면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게 청혼이라도 하려고? 혹은 내가 너무 미워서 혼인도 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속내와 달리 장서열이 더욱 환하게 웃었다.
“예쁜 강아지네요. 제게 선물로 주시는 건가요?”
장서열이 별안간 입술을 삐죽거렸다.
“풍엽은 제가 강아지를 기르도록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정말 못됐다니까요.”
금세 좋아졌던 태자의 안색은 그녀의 말에 이전보다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태자는 이내 소매를 떨치며 자리를 떠났다. 있지도 않은 옷의 먼지를 털어낸 장서열이 태연하게 방으로 돌아갔다.
‘내가 널 무서워할 것 같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