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과거 구염락은 금용의 마음만이 진실한 사랑이고 그녀 이후에 만난 여자들은 모두 그의 권세를 노리고 빌붙는 사악한 계집으로 취급했다. 그에게는 천한 금용 따위가 제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계집을 이토록 애지중지할 줄이야. 전생에서 그리 동고동락한 것도 모자라 이번 생에서까지 감히 자신의 앞에서 보란 듯 금슬을 자랑하려는 모양이었다.
‘제길, 그렇다면 지난 몇 년간 내가 들인 공은 무엇이 된단 말인가!’
기분이 언짢아진 장서열이 손에 든 수저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주변에 있던 하인들이 일순간 바닥에 무릎을 꿇고 황공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고정하십시오, 아가씨.”
자신이 낸 소리에 놀란 장서열이 작게 조소를 흘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아직 수양이 부족한 스스로를 반성했다. 또다시 금용이 구염락의 마음을 차지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아무리 혈육처럼 끈끈한 정을 나눴다 해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구염락이 이번 생에서만큼은 금용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걸 믿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두 사람에게 함께 곤경을 헤쳐 나갈 애틋한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상대방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앉는 건 금용이 아니라 자신이어야 했다.
장서열은 언제나 구염락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고 수시로 상을 내렸다. 그런 그에게 어려운 일이 생긴다면 자신에게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금용은 어떻게 구염락이 나서도록 만든 걸까?’
눈을 가늘게 뜬 장서열이 생각에 잠겼다. 어찌 되었든 금용의 우월감은 근본적으로 그 뿌리를 뽑아 놔야 했다.
마음을 가라앉힌 장서열이 다시 수저를 들어 천천히 탕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그릇을 다 비운 그녀가 시녀가 건네 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후 유유히 입을 열었다.
“가서 열셋째 전하를 불러와라.”
“예.”
잠시 후, 구염락이 황급히 달려왔다. 대총관이 방에서 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금용과 함께 방을 나서던 중, 장서열의 부름에 지체 없이 달려온 것이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자신의 부재를 느낄 수 없도록 미리 모든 일을 처리해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듯 그녀가 빨리 자신을 찾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구염락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떠올랐다.
‘역시 서열 누님은 수시로 나를 생각해.’
구염락을 힐끗 한 번 바라본 장서열이 계속해 식사를 했다. 서둘러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 그가 식사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후, 장서열은 오후 복장으로 갈아입고 그에 어울리는 머리를 새로 틀어 올렸다. 곁에서 부채질을 하는 구염락을 향해 장서열이 무심하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말을 마친 그녀가 구염락이 건네는 차가운 음료를 받아들었다가 문득 서풍엽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모든 신경을 장서열에게 집중하고 있던 구염락은 그녀가 자신이 준비한 음료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자 순간 긴장했다. 그녀의 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지? 누님이 마시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에게서 대답이 없자 장서열이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곤란한 일이야? 내 도움이 필요해?”
그녀가 시녀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구염락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손도 대지 않은 얼음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자 전보다 풀이 죽은 목소리를 한 그가 고개를 떨군 채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한 뒤 덧붙여 말했다.
“금용은 정말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에요, 누님. 그러니까 그 애에게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가서 꼭 잘 단속하고 가르칠게요.”
“단속?”
장서열은 구염락의 입에서 나온 ‘금용’이라는 두 글자에 하마터면 가슴 속 깊숙이 쌓인 피맺힌 원한을 몽땅 쏟아낼 뻔했다. 게다가 단속이라니, 굳이 그가 금용을 공들여 단속시킬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일개 계집종에게 대체 무슨 단속을 시키고 뭘 가르친다는 거지? 그게 네 가치를 떨어뜨리고 네 신분을 욕보이는 짓이라는 생각은 안 들고?’
분노한 장서열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역시 그는 정식으로 궁의 법도를 배우지 못한 황자다웠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역시 넌 이번 생에서도 천한 계집종 따위와 뒹구는 게 어울린다고 속 시원히 일갈하고 싶었다.
장서열은 심호흡을 하며 전생에서 구염락을 무시했던 옹졸한 마음을 억눌렀다. 새로 건네받은 물을 한 모금 마시자 그제야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녀가 기억을 더듬어 보는 척 입을 열었다.
“네 거처에 주인이 새로 들어왔던가? 어째서 네가 직접 나서서 사죄를 해. 게다가 단속이며 가르치는 건 또 뭐고. 금용이 누구야? 난 그런 존함을 가진 공주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금용, 네가 다시 이 몸의 머리 위에 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공주라니, 구염락은 어리둥절했다.
“아니요, 공주라니요. 금용은 제 궁녀예요. 누님이 오해하셨어요.”
장서열이 더욱 놀란 표정으로 답했다.
“궁녀? 궁녀인데 어째서 네가 친히 그 애를 데리고 나와 사죄한다는 거야? 그 애 혼자서는 대총관과 이야기를 못 해? 왜 네가 직접 데리고 가는 거야?”
말을 마친 그녀는 두 눈을 깜박이며 정말 모르겠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구염락이 진지하게 설명했다.
“금용은 제 목숨을 구해준 아이예요. 지난번 누님께서 제 거처에 오셨을 때 봤던 궁녀고요.”
아무래도 그녀는 금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물음으로 볼 때, 어쩌면 그녀는 금용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도 같았다. 금용은 부지런하고 수도 예쁘게 잘 놓으니 어쩌면 서열 누님의 손수건에 수를 놓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금용이 누님의 눈에 든다면 그건 금용의 복이었다. 구염락은 내심 장서열이 금용을 좋아해주기를 바랐다.
“그래, 네 목숨을 구해줬구나.”
‘널 구해줬다는 이유만으로 그 계집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사람까지 죽여도 모두 용인했지. 어째서 넌 내게는 그렇게 관대하지 못했을까?’
치미는 화를 억누른 장서열이 비꼬며 말했다.
“그렇다면 난 권서함을 떠받들고, 세자 곁에 있는 노복(老仆, 나이든 하인)을 친아버지처럼 섬겨야겠구나. 노복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해 나를 구했으니 이제 난 그들을 위해 사당을 짓고 그들이 영원히 행복하기를 빌어야겠네.”
그녀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하인에게 주인이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들어 본다는 얼굴이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시녀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가씨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노비는 황송합니다. 주인을 위해 살고 죽는 건 노비들의 본분이지요. 노비가 된 후부터 저는 주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가씨께서는 하늘이 돕는 착하고 귀한 분이시온데, 어찌 노비 같이 천한 것들의 도움이 필요하시겠습니까.”
시녀의 말에 탄복한 장서열이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지?”
‘눈치가 제법이군. 이따가 충분한 상을 내려야겠어.’
시녀는 놀랍고 기뻤다. 수년 간 장서열을 모셔온 그녀는 장서열이 열셋째 구염락 외에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아가씨의 눈에 든 것은 큰 복이었다.
“예, 아가씨. 노비는 납복(纳福)이라 합니다.”
구염락은 장서열과 납복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렴풋이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태생부터 고귀한 장서열과는 달랐기에 정확히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존비귀천과 관계없이 죽으면 사라지는 생명은 결국 모두 동등한 것이 아니었던가. 금용은 자신의 목숨을 구했으며, 사실상 자신의 처지는 금용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금용을 천시하고 자신을 높여야 한단 말인가.
구염락의 표정을 본 장서열은 그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평소 그녀는 그에게 매우 관대했지만 금용과 관련된 일이라면 참을성을 보여줄 수 없었다.
게다가 구염락은 이전부터 이상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노비들의 실수에 지나치게 관대했다. 전생에서 그녀는 하인에게 화풀이하는 일이 잦았는데, 특히 그녀의 곁에서 많은 고초를 겪은 궁녀가 그로 인해 괘씸하게도 구염락의 눈에 든 적도 있었다.
전생의 일을 떠올린 그녀는 순간 온몸이 분노로 가득 차는 걸 느꼈다. 황후의 소관인 내명부의 일까지 간섭하다니!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게 실패한 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일개 궁녀에게 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서열은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노비면 노비답게 굴어. 내가 억지로 노비로 만든 것도 아니잖아? 그녀 역시 인생 최악의 경험과 온갖 염량세태(炎涼世態, 세력이 있을 때는 아첨하여 따르고 세력이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세상인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를 다 겪어 보았지만 그래도 주인은 주인이었다. 과거 진흙탕에 처박혔을 때 그녀 역시 노비나 다름없었다. 타인에게 매달려 삶을 연명하던 그때, 그녀는 체면과 존엄을 대가로 치렀다.
장서열은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극단적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었으나 다행히 구염락 앞에서는 해야 할 일을 잊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금 터져 나오는 원한을 꾹 눌러 참으며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따뜻한 시선으로 납복을 바라보았다.
“어찌 그런 말을 해. 네게도 부모님이 계시고,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을 텐데. 우리가 너희에게 잘하는 게 맞아.”
납복이 더욱 부드럽게 웃으며 예의 바르게 답했다.
“이토록 노비들을 생각해주시다니 아가씨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세요. 하지만 노비들은 감히 선을 넘는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노비들은 궁에 들어올 때 무려 60냥이나 되는 은자를 받았지요. 저는 그 돈으로 제 아우의 목숨을 구했고, 언니에게 그럴듯한 혼수를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는 작은 밭을 사드렸어요.”
납복은 자신의 사연을 계속해서 털어놓았다.
“저희 식구들은 하마터면 몽땅 굶어 죽을 뻔했으나 그 직전에 좋은 기회를 만나 살아난 거죠. 궁은 노비의 목숨 하나로 저희 가족에게 큰 복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주인을 모시며 매달 받는 은자를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보내드리지요.”
“…….”
“그러니 제가 어찌 주인께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다른 노비들의 사정은 어떠한지 모르나 아마 궁핍한 대부분의 집안이 60냥의 은자로 급한 상황을 넘겼을 것입니다. 또한 노비가 마지막으로 주제 넘는 말씀을 드리자면, 매년 궁에서 궁녀를 선발하는 게 노비 같은 이들에게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안 그러면 ‘지저분한 곳’에 팔려가 손발이 닳도록 일해야 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