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세상에서 구염락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장서열이었다. 전생에서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한 것은 물론, 이번 생에서도 필사적으로 그에게 온통 신경을 쏟고 있었던 탓이었다.
만약 구염락이 신이었다면 장서열은 진작부터 그의 발밑에 꿇어 앉아 평생토록 향을 피웠을 것이고, 그가 매였다면 한 마리의 뱀이 되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부디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고 오래도록 번성케 해달라고 빌었을 터였다. 이렇듯 그에게 모든 촉각을 곤두세운 그녀가 평소와 다른 구염락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오늘 왜 그래? 정신이 계속 딴 데 가 있잖아.”
수업이 끝난 뒤 장서열이 구염락을 향해 물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쥔 먹을 갈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는 어제 일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고 직접 대총관을 찾아갈 작정이었다. 장서열이 금용에게 안 좋은 인상을 갖게 될까 두려웠다. 금용은 엄살이 심한 편이지만 그래도 자신을 위해 고생할 줄 아는 충성스런 아이였다. 그는 장서열이 금용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갖지 않길 바랐다.
찬찬히 구염락을 살펴보던 장서열은 더는 묻지 않았다. 때마침 만정이 바람처럼 달려와 그녀에게 나가서 놀자고 졸랐고, 만정보다 한 발 늦은 당자는 치사하게 누님을 낚아채 갔다며 만정에게 못된 말을 퍼부었다.
만정과 장서열이 막 문을 나서려 할 때였다. 때마침 권서함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마주했다. 장서열이 먼저 그를 향해 미소 지었고, 뒤이어 권서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연스레 스쳐 지나갔다. 유언비어의 영향 같은 건 조금도 받지 않은,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몇 걸음 달려 나가던 만정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장서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권 공자는 참 소름 돋게 생겼어요. 볼 때마다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다니까요. 어떻게 저렇게 생긴 사람이 있지? 우리 오라버니와 동생은 그를 정말 싫어해요. 비슷한 연배의 아이들만 재수 없게 되었지요, 뭐. 부모님들이 하루 종일 권 씨 도련님을 좀 봐라, 어쩌고저쩌고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하잖아요.”
만정은 자신이 아는 미사여구를 총동원해 제법 그럴 듯하게 그를 묘사했다. 결국 두 사람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봤어? 방금 장서열이 권 공자를 막아서는 거.”
평범한 사건도 유언비어에 홀린 사람 눈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마련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거지. 권 공자에게 그런 수법을 쓰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우리 연경 아가씨들의 수치야.”
어린 여자아이가 제법 매섭게 말을 뱉었다.
“권 공자는 장서열을 쳐다보지도 않았어. 저 계집은 모든 남자가 다 태자와 세자 같은 줄 아나 봐. 저 계집에게…….”
그러나 이들은 태자와 관련된 일을 감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한편, 초혜전으로 들어온 류소경이 권서함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탐색하듯 물었다.
“미인의 은혜가 아주 하늘을 찌르는군. 그러게 내가 뭐랬어. 그 선물은 받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들러붙을 줄 알았어.”
그러나 권서함은 평이한 얼굴로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하며 말했다.
“오해야.”
책상에 몸을 기댄 류소경이 확신하듯 말했다.
“너야말로 오해지. 서함, 사람을 너무 착하게 보면 안 돼. 특히 여자라면 더더욱. 여자들은 하나같이 꿍꿍이가 있지. 게다가,”
류소경이 비웃었다.
“그 아비의 꼴을 봐. 장서열이라고 별다를 게 있겠어? 아마 그녀도 제 아버지와 같은 생각일 거야. 가장 높은 값을 치르는 자와 혼인하겠지.”
권서함은 내심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아이를 그런 식으로 논하는 건 너무 지나쳤다. 그러나 류소경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네 기분이 어떻든 난 말해야겠어. 저런 여자들은 다 죽어버려야 해.”
그가 순간 화가 치민 듯 직설적으로 계속해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네 신분과 저 아이의 신분이 감히 비교나 되는지. 좌상이라 봤자 따지고 보면 하찮은 자리에 불과하다는 걸 너도 잘 알 거야. 그 외조부의 집안도 요즘은 그만저만하고. 그런 가문의 여식이 너와 친분을 맺으려 한다? 이게 다른 마음을 품은 게 아니면 뭐겠어.”
권서함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 다른 마음을 품은 거라면 그날 자신에게 흙탕물을 뒤집어쓰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해명하듯 답했다.
“그저 감사 인사일 뿐이야. 조금 전에도 우연히 마주친 거고.”
“그러니까 이미 서풍엽이 한 걸 왜 또 직접 나서는 거냐고. 우연히 마주쳐? 그게 왜 하필 너일까? 지금 초혜전에 있는 모두가 너와 장서열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어. 넌 이 상황이 정말 우연히 만들어 졌다고 생각해?”
말을 마친 류소경이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나가서 햇볕이나 쬐련다. 계속 파고들다가는 주변 모두가 늑대와 승냥이라는 걸 알게 될 테니!”
권서함은 그대로 고개만 끄덕이며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그는 친구의 말 때문에 장서열을 꺼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류소경을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류소경은 평소 여자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딱히 강자를 믿고 약자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저 한 번 싫은 것은 끝까지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근본적으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그는 누이동생 외에 어떠한 여인도 제 곁에 오지 못하게 했다.
* * *
명절과 같이 중요한 날에만 입는 옷을 차려입은 금용이 휴게전(休憩殿)에 들어와 매끈하게 빗질한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는 신기한 표정으로 주인이 지정해 준 곳에 앉아 방 안 곳곳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녀는 몸에 걸친 옷이 혹시라도 더러워질까 걱정하며 애지중지 쓰다듬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녀는 이 옷을 입을 계획이 없었다. 아껴두었다가 여아절(女儿节, 칠석날)에 입을 생각이었으나, 구염락은 친히 그녀의 옷장을 열고 이 옷을 꺼내어 입으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기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처럼 지위가 낮은 사람은 귀한 옷을 얻기 힘들었다. 그래서 보통 새해에 설을 맞이하여 새 옷을 장만할 때, 얇고 크게 만들어 최대한 입을 수 있는 기간을 늘렸다. 오늘 그녀가 입은 옷은 추울 때는 내의로 입고 봄가을에는 외투로 걸치는 것이었다.
금용은 옷을 몹시 귀히 여기며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털어냈다.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궁녀가 물러간 후 방 안에는 그녀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감탄에 찬 얼굴로 주변을 둘러싼 장식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주인만이 거주할 수 있는 방인 듯했다. 그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똑같은 문양으로 꾸며진 맞춤 침구와 세심한 수공예가 들어간 침대 휘장을 본 적이 없었다. 휘장의 모서리에 매달린 푸른 돌멩이는 그 빛이 매우 진귀해보였다.
오직 비빈들의 침실에서만 본 적이 있는 의자와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받침대는 발을 디디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들이었다. 그녀에게는 마마님들이 이 발받침에 발을 올리는 모습이 더없이 고귀하고 신성해 보였다. 그러나 오늘처럼 자신에게도 밟아볼 기회가 올 줄은 몰랐기에 그녀는 이 상황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향안(香案, 향로를 놓아두는 탁자)과 촛대는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주먹만 한 촛대 밑으로 공작대(孔雀台)가 보였다.
‘어째서 공작대가 하나만 있는 걸까? 분리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붙어있는 걸까?’
금용은 감히 자세히 바라보지 못하고 얌전히 자리에 앉아 눈으로만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곳을 이 방의 계집종처럼 스스럼없이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방의 크기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작은 편인 데다 장식도 간단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오히려 주인의 일관된 성격을 보여주기 때문에 금용은 평소 방의 주인이 쉴 때 오는 곳이리라 확신했다.
금용이 쓸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전하가 어째서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그 자들이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게 못 견디게 싫었다. 그러나 전하는 매번 그들을 자신의 앞에 데려와 사과하게 만들었다.
금용은 그러한 상황이 불편했지만 평소 거만했던 대태감들의 울부짖는 얼굴을 보면 그들이 다시는 자신을 얕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은근히 통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전하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이전까지 자신을 괴롭힌 자들과 달리 초혜전의 태감과 궁녀는 그 지위를 초월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궁인들 중 유일하게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각 궁의 심복들이기도 했다. 그녀는 한 번도 최고 대태감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전하께서 자신을 위해 나서준 것이다.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금용은 차분히 자리에 앉아 어서 전하의 수업이 끝나 자신의 억울함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아무리 빌고 또 빈다 한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 *
작열하는 태양이 대지를 비췄다. 점점 강해지는 열기가 이미 여름이 왔음을 짐작케 했다. 오전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빠른 걸음으로 뛰어나와 연신 부채를 부쳐댔다. 그들은 시종에게 땀을 닦으라 하며 몸에서 땀 냄새가 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장서열은 점심 식사 자리에 구염락이 없자 곁에 있는 시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황급히 몸을 숙이고 공손하게 답했다.
"아가씨께 아룁니다. 전하께서는 대총관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동시에 그녀는 장서열이 즐겨 쓰는 식기를 골라 꺼내 놓았다. 구염락이 미리 장서열의 취향을 일러주고 간 덕분이었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했어도 아가씨는 전하의 부재를 금방 눈치챈 모양이었다.
장서열이 젓가락을 들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상아 젓가락이 아니었지만 굳이 시녀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열셋째 전하는 무슨 일로 대총관을 찾아갔다더냐?”
시녀가 얼른 답했다.
“예, 아가씨. 전하 밑에 있는 궁녀 하나가 대총관께 잘못을 저질러 전하께서 친히 데리고 가 사죄를 시킨다고 들었습니다.”
“궁녀?”
장서열이 ‘궁녀’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되물었다.
“궁녀를 데리고 왔다고?”
시녀가 황급히 덧붙였다.
“예, 어제 대총관께 잘못을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이어 일의 상세한 경위를 설명한 그녀가 결론짓듯 말했다.
“전하께서는 아랫사람에게 참 자상하시지요. 어린 계집종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몸소 데리고 가서 사죄를 하시다니, 어찌 그리 체면을 세워 주셨을까요.”
장서열은 탕을 마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계집종이라면 그가 전생에 줄곧 싸고돌던 금 대귀비를 말하는 것이리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람을 데리고 사죄를 하러 가다니. 다소 의외의 행동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