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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5)화 (45/449)
  • 제45화

    소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금용은 그간 빼어난 외모 때문에 많은 괴롭힘을 당해왔으며 심지어 나이를 먹을수록 용모는 연민이 들 정도로 더욱 어여뻐지고 있었다. 아직은 그녀의 나이가 어려 큰 문제가 없었지만 궁 안에는 변태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도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랫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따라서 구염락은 좀처럼 그녀를 남소원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없었다. 그는 금용에게 억울한 일이 생길 때면 몇 배로 갚아주었고, 괴롭힌 자들을 벌벌 떨게 만들어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자신의 노비들에게 일말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확실히 금용을 잘 보호해 왔다.

    최소한 남소원에서 금용은 의식주가 부족했던 것 외에는 구염락에게 푸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가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일을 그녀의 뜻대로 하게 했다. 그렇듯 융숭한 대접을 받다가 돌연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상심하고 울 만도 했다.

    소리자는 만약 태감이 그녀를 몇 번 쓰다듬은 정도라면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식사를 가져가다가 장방(章房)의 대총관(大總管)에게 놀란 것뿐이다. 대총관은 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돌려보낸 것이고, 밑의 소태감은 윗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금용에게 못되게 군 것뿐이므로 크게 소란을 피울 일이 아니었다.

    “네가 억울한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잖아. 울지 마라. 전하께서 곧 오실 거야. 전하께서는 서열 아가씨께 의지해 사시는데, 네가 이러면 전하께서 난처하시지 않겠어?”

    그의 말에 금용은 더욱 구슬프게 흐느꼈다. 그럼 그냥 당하고만 있으란 말인가. 하지만 소리자의 말처럼 전하가 장 씨 아가씨에게 의지하고 있는 한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억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너무 속상해요.”

    소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알아. 하지만 이러는 건 보기 좋지 않아. 그만 울래도.”

    소리자는 곽 공공에게 얻어 온 설기떡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울지 마. 계속 울면 얼굴이 미워진다. 네가 좋아하는 설기떡을 가져왔어. 한 조각에 20문이나 주고 사온 거니까 다 먹어야 해.”

    터무니없이 비싼 금액이었다. 일부러 괴롭히려는 수작인 걸 알고 있었지만 값을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금용은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소리자가 안타까운 눈으로 설기떡 조각을 바라보았다. 식으면 맛이 없을 터였다. 일단 그는 떡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럼 어서 가서 얼굴부터 씻고 와. 전하께서 보시는 일 없게.”

    그러나 소리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그들의 주인이 나타났다. 우느라 퉁퉁 부어 애처로운 모습을 한 금용을 보자 순간 구염락의 마음에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 누가 감히 여기서 행패를 부렸느냐?”

    ‘죽고 싶나 보군.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리다니!’

    주인이 일찍 돌아올 거라 미처 예상치 못한 소리자와 금용은 그가 불같이 화를 내자 당황했다. 자신들이 장서열의 사람과 충돌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구염락은 분명 혼란스러울 것이므로 절대 그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남소원에서 행패를 부렸다고 오해한다면 더 큰 화를 부를 수도 있었다.

    소리자가 민첩하게 바닥에 꿇어 앉아 설명했다.

    “전하, 그런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금용이 빨래를 하다 좋아하는 옷을 찢어 속상해서 운 겁니다.”

    금용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하. 노비가 실수를 범했습니다. 궁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우는 모습까지 보여드리다니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구염락은 바보가 아니었다. 내명부에서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둘러대면 둘러댈수록 구염락은 그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확신했다. 그들을 줄곧 형제처럼 여겨온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구염락은 더욱 화가 났다.

    “그런 수법은 내게 안 통해. 점심은 왜 보내지 않았지? 그 자들이 또 식사를 보내주지 않은 게냐? 곽공공 그 자식을 당장……!”

    순식간에 탁자의 다리를 부순 그가 이를 주워든 채 곧장 원흉에게 돌진할 기세로 일어섰다. 당황한 소리자가 즉시 주인을 껴안고 다급하게 외쳤다.

    “전하, 제발 고정하세요! 그런 게 아니라 사실… 사실은……!”

    구염락은 어리둥절했다. 그게 아니라면 금용은 왜 울었단 말인가.

    “고하라.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소리자는 이 일과 관계없으면 입 닫고 있거라. 금용! 네가 말하라!”

    겁에 질린 금용이 힐끗 소리자를 바라보다 더는 숨기지 못하고 점심에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고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억울함에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얼이 빠진 구염락이 멍해졌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손에 든 몽둥이가 사라졌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평소 그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 발생했지만 구염락의 분노는 오히려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금용을 위해 굳이 나서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구염락은 더는 금용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어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금용과 소리자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화가 난 게 아닐까 간담이 서늘해진 두 사람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금용은 왠지 두려웠다. 평소와 달리 전하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소… 소리자, 전하께서는 혹시 내가…….”

    소리자 역시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지만 우선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걱정 마. 전하께서는 분별 있는 분이잖아. 별일 없을 거야.”

    ‘아무 일 없겠지…….’

    * * *

    등잔불이 켜졌다. 남소원에서 등잔불은 구염락이 글자 연습을 할 때에만 켤 수 있는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물자를 아끼기 위해 등잔불 아래 금용은 수를 놓았고 소리자는 옷을 꿰맸다.

    금용은 저녁 내내 전전긍긍했다. 얼음찜질을 했지만 눈의 붓기가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더 붉게 부어올라 그녀는 더욱 불쌍해 보였다. 그녀는 분노하지 않는 주인의 모습에도 속으로 어처구니없는 기대를 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는 지난번처럼 자신을 위해 나서 줄지도 모른다. 주인은 언제나 그녀에게 잘해줬고, 그녀가 어떤 억울한 일도 겪지 못하게 해주었다. 이번 일도 예외일 리 없었다.

    그간 주인이 보여준 모습을 떠올리자 금용은 더욱 통쾌해졌다. 그녀는 주인이 자신을 괴롭힌 자들을 아예 없애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앞으로 그들은 다시는 날뛰지 못할 것이고, 자신을 희롱할 일도 없을 것이다.

    바늘을 쥔 소리자가 조용히 금용을 바라보았다. 표정 변화를 통해 그녀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주인이 그녀를 아끼는 건 사실이지만 시종으로서 그 고충을 주인에게 고하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일반적인 주인을 모시는 상황이었다면 그녀는 진작에 쫓겨났을 것이다.

    구염락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베껴 쓴 글자들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낙관 위에 찍힌 글자를 바라보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장서열.

    일필휘지로 쓰인 세 글자는 필치가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이 습자본은 장서열을 따르기 시작한 후 그녀가 그에게 친히 써준 것으로, 그의 암울했던 생애를 밝혀준 빛의 시작이자 헤아릴 수 없는 미래와도 같았다.

    이 습자본을 받았을 때 그는 노비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무엇이든 못하는 게 없는 장서열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귀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땅히 장서열에게 전심전력을 다하고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손을 들어 올린 구염락이 정중하고 경건한 자세로 신성한 이름을 어루만지다가 또 마치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 이름조차 감히 모독할 수 없다는 듯이. 이렇듯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주위에서 자신의 시종이 불편한 일을 저질렀으니, 마땅히 걱정스럽고 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구염락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금용을 향해 언짢은 표정으로 엄숙하게 말했다.

    “내일 나와 같이 초혜전으로 가자.”

    그는 누님의 시중을 드는 이가 금용의 무례를 용서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전하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금용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는 계속해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양 미간에 번지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역시 전하께서 날 위해 나서 줄 것이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수를 놓는 금용의 손이 빨라졌다. 이전까지 잘 되지 않던 부분도 오늘따라 매우 쉽게 완성 되었다. 그녀는 수를 몇 폭 더 놓아 태감에게 값을 치르고 전하의 몸을 보신할 만한 채소를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염락은 평소에 고기를 먹지 않았다.

    한편, 소리자는 적잖이 놀랐지만 곧 마음을 놓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전하는 서열 아가씨의 곁에서 조금씩 제 위치를 찾아왔다. 그렇다면 아가씨가 총애하는 전하의 체면을 봐서라도 정말로 태감이 금용에게 사과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리자가 금용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어찌 됐든 금용이 억울함을 풀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게다가 전하께서 이렇듯 자신들을 위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앞으로 더욱 열심히 주인을 섬겨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마차를 준비한 서풍엽이 어린 정혼자를 배웅했다. 그가 끊임없이 당부했다.

    “날이 덥다고 해서 몸을 차게 하면 안 돼. 얼음물은 조금만 마시고 보온에 신경 써. 몸이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여기저기 뛰어다니지 말고.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열셋째에게 해달라고 해라.”

    조옥언은 서풍엽의 잔소리와 딸아이의 짜증스러운 입꼬리를 보며 속으로 슬며시 웃음 지었다.

    “자, 어서 가거라. 또 늦을라.”

    * * *

    충왕비는 이른 아침 식사 시간부터 또 아들이 보이지 않자 매섭게 충왕을 노려보았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모두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나마 아들은 좋아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멍청한 자신의 남편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어제 황후가 내린 옥잠(玉钗)을 선물로 보내야겠구나. 여자아이들은 클수록 예쁜 걸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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