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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4)화 (44/449)
  • 제44화

    “나를 구해줘서 고마워. 이건 그 보답이야.”

    만정이 눈앞에 선 조그만 남자아이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잘못 찾았어. 서열 언니는 여기 있는걸?”

    만정이 얼굴에 상처가 난 헌원상 앞으로 장서열을 끌고 왔다. 몸싸움을 벌이던 구염락은 순간 손을 떼고 일어나 곧장 장서열의 곁에 다가와 섰다. 그가 경계하는 눈으로 헌원상을 쏘아보았다. 그는 헌원상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서열 누님의 주의를 빼앗으려던 자. 당자 역시 의아하다는 듯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저 녀석은 왜 온 거야?’

    장서열이 감탄하는 눈으로 헌원상의 손에 들린 새하얀 옥석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예쁜 옥돌을 내게 주겠다는 거야? 네 이름이 헌원상이지? 헌원상서께서 네 얘기를 자주 하셨어.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라고 하셨지.”

    헌원상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에 대해… 알고 있어?”

    감격한 헌원상의 두 눈은 마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듯했다. 장서열의 미소가 한층 더 친근해졌다.

    “그럼. 난 네가 동두 거리의 땅콩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걸.”

    물론 장서열은 동두 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헌원상은 ‘동두 거리’라는 단어에 친숙함을 느끼며 긴장을 풀었다. 그가 보통의 아이들처럼 자신의 고향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화 숙모댁의 땅콩 요리가 제일 맛있어! 연경의 이름난 주방장들도 그렇게 맛있게는 못 만들어요. 서열 누님도 먹어 봤어요? 제가 다음에 갖다드릴게요. 정말로 맛있어요.”

    당자는 헌원상이 정말 모자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 한마디로 연경의 내로라하는 주방장들의 미움을 샀다. 뿐만 아니라 이는 그 말을 들은 장서열까지 함께 미움을 사게 할 만한 발언이었다.

    ‘천한 시골뜨기 티가 나는군.’

    땅콩 한 줌이 그의 미천한 출신을 드러낸 격이었다. 동시에 구염락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는 ‘서열 누님’이라는 말이 천한 지위와 신분을 가진 자의 입에서 나오는 게 매우 불쾌했다.

    장서열은 헌원상에게 유달리 상냥하게 웃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그의 수준에 맞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당자는 그 모습이 평소의 그녀와 퍽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불현듯 그에게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설마 지금… 헌원상을 유혹하는 거야?’

    “좋아. 그럼 네가 가져다주는 땅콩만 기다릴게. 하지만 이 옥돌은 매우 귀중한 것이니 도로 가져가. 난 땅콩 한 접시만 있으면 돼.”

    땅 위의 흙을 발로 툭툭 차는 헌원상은 매우 쑥스러워 보였다. 실제로 그의 기분은 매우 들떠 있었다.

    ‘흥! 땅콩 따위가 저 망할 돌멩이보다 귀중하다고?’

    당자는 장서열이 정상이 아니라 여기며 앞으로 나아가 헌원상의 여위고 왜소한 몸을 밀어 넘어뜨렸다.

    “가, 저리 가! 누님에게 네 불행이 옮겨 붙을까 무서우니까 저리 가라고!”

    헌원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그는 눈물을 뚝뚝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가 다급하게 설명했다.

    “난… 난 서열 누님에게 불행을 옮기지 않아. 나는……!”

    “감히 어디서 변명이야! 사람들이 말하는 거 못 들었어? 너랑 같이 있으면 일 년이 재수없다잖아! 너 지금 서열 누님을 꼭 너처럼 만들려고 작정했냐?”

    “난, 난…….”

    이를 바라보는 장서열의 눈에는 조금의 연민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짐짓 당자를 한 번 노려본 뒤 온화하게 걸어와 헌원상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녀가 유난히 따스한 말투와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울지 마. 네게 그런 뜻이 없다는 거 알아. 게다가 불행을 옮기다니? 다 사람들이 지어낸 말…….”

    그러나 헌원상은 잡힌 손을 급히 거두고 황급히 줄행랑을 쳤다.

    “전 재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누님에게 옮으면 안 돼요!”

    그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장서열이 당자를 무섭게 바라보았다.

    ‘놀라서 도망갔잖아! 이래서야 어떻게 복수를 하겠어!’

    헌원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구염락은 왠지 모를 위기감에 더욱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자는 장서열의 눈총에도 아랑곳없이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코웃음 쳤다.

    “녀석, 눈치는 있군. 그나저나 누님, 왜 함부로 수작을 거는 거야? 걔는 아직 어린아이야. 그런다고 누님에게 반할 것 같아?”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장서열이 당자를 노려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당자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왜 다들 괴롭히지 못해 안달하는 저런 얼뜨기 같은 녀석에게 잘해주는 거냐고. 설마 저딴 녀석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난 누님이 천성이 착해서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분명 무슨 속셈이 있겠지.”

    “…….”

    “누님은 엄연히 약혼자가 있는 몸이야. 그리고 수작을 부리려면 상대를 제대로 골라야지. 헌원상 같은 녀석을 고르면 누님의 명성이 뭐가 되겠어? 차라리 권서함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백 번 나아!”

    그들의 근처에 있던 반독들이 당자의 마지막 말을 듣고 순간 놀라 소리쳤다.

    “장서열이 권 공자에게 손을 뻗어 추파를 던졌다고? 언제?”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그러고 보니 나 아까 장서열 그 여우 같은 계집애가 권 공자에게 뭔가 선물하는 걸 봤어. 수줍어하는 모습이 정말 역겹더라.”

    “하지만… 권 공자는 외모에 홀릴 사람이 아니야.”

    “권 공자는 세자와 친하잖아. 그런데 장서열이 어떻게 그런 짓을 했대?”

    “못 할 게 뭐야? 걔는 태자도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는걸.”

    순간 당자의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이것들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분노한 당자가 발로 수풀을 힘껏 걷어차며 난폭하게 소리쳤다.

    “모두 그 망할 입 다물지 못해? 누가 누구를 홀렸다는 거야! 권서함이 제대로 된 사람이면 누님이 선물한 먹물을 받지 않았겠지! 대체 무슨 근거로 누님이 그를 홀렸다는 거야? 그의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사람들의 놀람은 가실 줄을 몰랐다. 결국 장서열이 정말로 선물을 건넸으며, 권서함이 이를 받았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줬을 뿐이었다.

    웅성대던 반독들은 각자 자신의 주인에게 이 놀라운 사건을 보고하러 떠났다. 당자는 스스로 큰 화를 자초했음을 깨닫고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그는 차마 장서열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망할, 다 나가 죽어라!”

    장서열을 시기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았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할 일이 없으면 그녀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는 게 일이었다. 이 일로 그들이 또 어떠한 소설을 지어내 그녀의 험담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자는 머리가 나쁜 스스로를 원망했다. 어째서 이리 입단속을 못할까.

    “아…….”

    당자를 놀려주려던 장서열은 자책하는 그의 모습에 짓궂은 장난은 관두기로 했다. 대신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큰일 났네. 삼다리를 걸치고 있는 게 탄로 났으니, 이제 셋이 싸우지 않게 하려면 어째야 할까?”

    당자가 멍하니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영문을 알 수 없어진 당자는 기분이 편치 않았다.

    “난…….”

    장서열이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뭐가 걱정이야. 설마 내게 세 남자를 반하게 만들 능력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구염락이 즉시 소리쳤다.

    “누님은 언제나 최고야!”

    당자는 여전히 머릿속이 텅 빈 상태였지만 장서열에게 더욱 미안해졌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 내 잘못이야. 함부로 떠드는 바람에 누님의 명성에 누를 끼쳤어. 세자께서 혹시라도 혼사를 무르는 일이 없게 내가 잘 설명할게.”

    장서열이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는 듯 웃었다.

    “오해하지 마. 뭘 그리 놀라. 장군댁 자제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간 거야? 아아, 그나저나 걱정이네. 명성이 바닥에 떨어졌으니 이제 어떻게 시집을 간다?”

    당자는 빙그레 웃는 장서열의 모습에 그녀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가 이내 따지기 시작했다.

    “감히 이 몸을 놀리다니!”

    그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제야 주변의 모든 것이 밝게 보였다. 그날 그녀가 보여준 웃음은 당자의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학당을 나오는 내내 장서열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과 손가락질을 무시했다. 만약 서풍엽이 이러한 소문에 연연하는 사람이었다면 과거 태자에게 대적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울러 권서함은 더더욱 이러한 시비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녀로서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줄곧 장서열을 따라다니던 당자는 그녀의 태연한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탄복했다. 그녀는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 모든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는 심지어 구염락조차도 소문 같은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자가 불타는 시선으로 노려보자 몹시 거북해진 구염락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그의 의혹을 풀어주었다.

    “별 거 없어요. 전에 태자나 세자가 얽혀있을 땐 이것보다 더 심한 유언비어가 퍼졌어요. 그때 서열 누님이 한 번이라도 반박하는 걸 본 적 있어요?”

    당자는 순간 얼이 빠졌다. 장서열에 대한 편견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당자는 속으로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녀야 말로 진정한 귀족의 풍모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구염락은 아쉬운 듯 두 눈을 깜박이며 장서열을 배웅했다. 정교하게 장식 된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뒤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오늘 점심에 그의 식사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 * *

    한편 남소원에서는 남색 궁녀복을 입은 금용이 단촐한 방에 앉아 눈이 빨개지도록 서럽게 울고 있었다. 소리자는 막일을 할 때 착용하는 태감복을 입고 귀찮은 기색도 없이 열심히 그녀를 위로했다.

    “금용, 전하께서는 네 점심을 그렇게 기다리지 않으셔. 선녀 같은 아가씨께서 전하의 식사를 마련해 주셨을 거야. 이제 그만 울어.”

    “흑흑…….”

    소리자의 위로에도 그녀는 여전히 억울했다. 그녀의 도시락을 검사하던 관리들은 말없이 코를 싸쥔 채 모욕을 주었다. 관사 태감은 더욱 심했는데, 그는 그들에게 혹시 동물을 키우는 게 아니냐, 아니면 밥을 잘못한 게 아니냐고 묻기까지 했다.

    금용은 너무 억울했다. 심지어 음흉한 태감 하나가 돌아서는 그녀를 붙잡아 가산(假山) 뒤로 데려간 뒤, 뒤를 봐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냐고 은근히 묻기까지 했다. 주름지게 웃던 그 얼굴은 상상만 해도 역겨웠다. 금용이 탁자에 엎드려 구슬프게 흐느꼈다.

    “공공은 몰라요. 그들은…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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