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이게 소문나 봐야 좋을 게 하나 없어. 그러니까 절대로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마. 안 그러면 서열 누님에게 폐를 끼치게 될 거야.”
구염락은 당자가 정말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응.”
“참, 태자가 사적으로 서열 누님을 찾은 적은 없어?”
구염락이 다시 고개를 들자 당자가 얼른 덧붙였다.
“다른 뜻은 없고 그냥 궁금해서 그래.”
당자가 으스대며 말했다.
“좌상(章 左相, 장서열의 아버지)은 태자께 아주 각별하시지. 넌 모르겠지만 최근 조정에서는 태자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좌상 쪽 사람들이 주요 관직에 오르고 있어. 태자가 서열 누님에게 얼마나 마음을 쏟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 그만큼 태자는 너의 서열 누님과 잘 되고 싶은 거야.”
“…….”
“왜 날 그렇게 봐? 아무튼, 태자는 그렇게 너의 서열 누님을 범억아처럼 만들고 싶어 해. 오직 태자 한 사람에게만 속하는,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순간 구염락이 버럭 화를 냈다.
“안 돼!”
말을 마친 그가 얼른 입을 다물고 소심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선을 넘은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들킬까 두려운 것 같았다. 그는 장서열이 범억아처럼 된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구염락은 그날 밤 옷을 벗은 범억아와 태자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역겨웠다. 태자는 절대 서열 누님을 범억아처럼 만들 수 없었다.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당연히 안 되지.’
당자는 구염락이 매우 의리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당자가 의기투합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태자가 아무리 지위가 높고 존귀한 몸이라 해도 억지로 사람을 데려갈 수는 없어. 앞으로 우리가 서열 누님을 지켜 주자. 태자가 감히 누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구염락이 결연한 표정으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린 구염락은 태자가 장서열을 범억아처럼 만들 거라는 공포에 떨며 며칠을 보내야 했다. 저군전(储君殿)에서 태감이 올 때마다 그는 그들이 장서열을 납치해 태자에게 데려갈까 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시했다.
당자는 이 상황이 몹시 만족스러웠다. 그는 서풍엽이 마땅히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형수님을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위태로운 명성까지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장서열은 기회를 틈타 권서함에게 먹물을 선물로 주었다. 그녀가 직접 최상급의 먹을 갈아 만든 것이었다. 권서함은 평소와 같이 고요한 태도로 그날 사고는 굳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밝혔다. 이로써 두 사람은 서로 차분하게 결말을 맺은 셈이었다. 장서열이 떠나기가 무섭게 검은 옷을 입은 남자아이가 권서함에게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세자 다음으로 이번에는 너와 인생을 논할 작정인가?”
권서함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묵향을 뿜고 있는 먹물을 내려놓았다.
“오해하지 마. 그저 내게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한 것뿐이야.”
“감사 인사? 기어코 직접 나서다니 세자가 인사한 걸로는 부족했나 보군. 웬만하면 멀리하도록 해. 내가 보기엔 저 아이에게도 다른 속내가 있는 것 같아. 네게 접근하는 그 수많은 여자들이 다들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는 네가 더 잘 알 거고.”
“…….”
“특히 장서열이라면 항상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잖아. 모든 우수한 남자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말이야.”
“오해라니까.”
권서함은 이 이야기를 깊이 파고 들 생각은 없었다.
“이부(吏部)에서 어르신을 찾으셨다고?”
탁자에 몸을 기댄 류소경이 무심코 그 위에 놓인 먹물을 들어 찬찬히 살펴보다 별 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언제쯤 가산(家産)을 몰수당할까.”
그는 그때가 되면 아버지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여인도 함께 보내버릴 심산이었다. 권서함이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그의 손에서 먹물을 건네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이 부친께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그가 개의치 않는 듯 다시 권서함의 손에서 먹물을 빼앗아갔다.
“네게 이런 물건은 차고 넘치잖아. 내가 대신 사용해 주지.”
동시에 그가 애매한 웃음을 터뜨리며 이어 말했다.
“미리 경고해 주지 않았다고 나중에 날 탓하면 안 돼. 네가 미래에 취해야 할 사람은 내 누이동생이야. 그러니 다른 여자가 주는 물건이라면 일절 받아서는 안 되겠지.”
순간 권서함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 즉시 앞으로 나온 시동이 두 공자를 향해 두 손을 받쳐 들고 저지하며 나섰다.
“도련님.”
류소경은 몹시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평소 웬만한 말은 그저 웃어넘기는 권서함을 생각하면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장서열을 특별하게 여기는 건가? 그녀의 외모가 평소 여자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던 서함조차 달라지게 만든 걸까?’
이유가 어찌 됐든 류소경은 권서함의 안색이 변하자 더는 방자하게 굴지 않았다. 아무리 온화하고 아량이 넓은 그라도 주기 싫은 물건을 억지로 가져 간 사람을 친절하게 대할 리 만무했다.
“자, 가져가라. 이런 흔해 빠진 물건은 나도 관심 없어. 그나저나 넌 대체 언제쯤 우리 후부에 올 생각이지?”
언제 혼담을 청할 지를 묻는 것이었다. 탁자 위의 먹물을 바라보며 다시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온 권서함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무릇 혼사란 부모님의 명과 중매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니, 어머니의 뜻에 달려 있지.”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권서함의 모친은 류소경의 누이동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차라리 당사자인 권서함을 움직이는 게 빠를 것이라 판단했다. 아들이 원한다면 모친 또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권서함은 평온하게 탁자 한편에 놓아둔 붓을 들고 먹물을 적셨다. 기대하며 붓끝에 스며든 먹물을 바라보던 그는 곧 어이가 없다는 듯 붓을 내려놓았다. 먹물이 너무 묽었다. 그는 좋은 먹이 아깝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초혜전 내원 안,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장서열이 기분 좋게 돌멩이를 걷어찼다. 아이들을 비추는 햇빛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장서열의 뒤를 따라 걷던 당자가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무성하게 자란 꽃들을 두드렸다. 그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권서함은 뭐 하러 만난 거야? 그는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린 인물이야. 만나봤자 좋을 것도 없어!”
구염락은 장서열의 소매 자락을 잡고 책을 받쳐 든 채 뒤에서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서 밟고 있었다. 장서열이 작은 돌멩이를 걷어찬 후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그저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거야. 눈을 어디에 달고 싶든 그건 그의 자유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당자는 장서열의 말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그녀가 권서함과 교제를 하려는 게 아니라면 그가 발바닥에 눈을 달고 다닌다 한들 그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누님을 구해준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우리에게도 우호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어쩌면 그는 그저 놀라서 몸을 피하려다가 우연히 부딪친 것일 수도 있어.”
당자가 부러 못된 추측을 내놓았다. 장서열은 의외로 정색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 아이들은 그렇게 자신들과 관계없는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내 차례야!”
만정은 장서열의 주위를 맴돌면서 경향(敬香, 신불 앞에 향을 피워 올리는 의식) 때 목격한 것들을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넌 상상도 못할 거야. 사람이 엄청 많았어. 대전 중앙에 있는 정(鼎, 다리가 여러 개 달린 제례용 솥)은 우리 학당에 있는 것보다 컸고, 불상도 정오문(正午门)만큼 컸어. 난 그렇게 큰 정과 불상은 처음 봤어!”
당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과장이 너무 심하잖아. 그러니까 식견이 짧다는 말이 나오는 거야. 뭐 그런 일로 놀라고 난리람.”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만정이 다른 한 손으로 당자를 가리켰다. 귀엽고 작은 얼굴은 화가 나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 누굴 욕하는 거야? 그렇게 능력이 있으면 너야말로 앞으로 서열 언니에게 기마술을 배우지 마!”
당자가 모란꽃 한 송이를 때려 떨어뜨리며 반격했다.
“그건 별개의 일이야. 게다가 이 몸은 이제 열셋째에게 배우는 중이라고. 그렇지?”
말을 마친 당자가 열셋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나 구염락이 반사적으로 그를 엎어 쳐 쓰러뜨렸다. 잠시 멈칫한 장서열과 만정이 이어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만정은 당자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더더욱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예, 당자 도련님! 앞으로도 열셋째에게 열심히 배우셔야겠어요. 아이조차 이기지 못하니 말이에요. 하하하!”
자신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을 깨달은 구염락이 황급히 장서열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가 미안한 얼굴로 당자를 바라보았다.
“다… 다음부터는 갑자기 뒤에서 치지 마.”
자리에서 튀어 오른 당자가 순식간에 구염락과 엉겨 붙었다.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감히 이 몸을 내동댕이쳐? 가만 두지 않겠다!”
“으악!”
뜻밖의 싸움 구경에 몹시 신난 만정이 발을 굴렀다.
“힘내라! 열셋째 힘내! 열셋째가 최고야! 당자 녀석의 코를 뭉개버려!”
장서열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당자, 네게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할 실력이 있다고 믿어.”
순간 기운이 솟은 당자의 전투 의지가 더욱 불타올랐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자신을 우습게 보는 일이 없도록 더욱 사납게 덤벼들었다. 많은 이들은 두 사람의 싸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또 시작이야? 지치지도 않나.’
권서함은 창밖으로 장서열의 머리 위에 장식된 나비 비녀가 연보라빛 날개를 살랑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헌원상은 소란에 급히 뛰어나왔으나 돌길 끝에서 그들을 몰래 바라볼 뿐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그는 허리 높이까지 자란 청목 사이로 머리만 살짝 내놓은 채 긴장한 듯 선물만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장서열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장서열은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녀의 시선이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던 헌원상과 마주쳤다. 순간 그녀의 눈 속에 서릿발 같은 냉기가 서렸다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그녀가 헌원상을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헌원상의 마음에는 얼떨떨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놀람과 기쁨이 가득 찼다.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짝 말라있던 그의 마음에 불현듯 광풍과 폭우가 내리쳤다. 장서열에게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그는 다시금 손 안의 선물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그녀의 미소가 그를 움직이게 만든 것 같았다. 그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나름 용맹한 기세로 장서열을 향해 걸어가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