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순간 입을 다문 장서열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방금 전 자신이 대역무도한 말을 뱉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구염락이 뜨겁고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내친 김에 끝까지 가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구염락의 어깨를 두드린 뒤 조심스레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해. 만에 하나 네가 태자가 된다면……? 그때는 대주국의 온 천하가 다 네 것이 되는 거야.”
구염락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 벌어진 그의 입술은 다시 다물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주국이… 나의 것?’
최고가 되어 군림할 수 있는 황위. 그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었던 제왕. 손 안에 누구든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쥐고 있는 최상의 권력.
장서열은 혼란스러워 하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천천히 가르쳐야 할 것 같았다. 어린 구염락에게는 아직 사해를 종횡무진하던 미래 영덕대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금 내가 한 말,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장서열이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 보여준 패기를 오래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아직 태자와 관련한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었다. 지금은 구염락이 그녀의 평안한 미래를 위해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줄 거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여서는 안 됐다.
‘내가 서열 누님에게 이렇게 대단한 존재였구나! 난 황실의 혈통을 지닌 고귀한 사람이야.’
구염락은 거의 숭배에 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텅 비어있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며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타올랐다. 마치 봄빛을 만난 겨울 풀처럼, 순식간에 무성해진 그의 마음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응.”
장서열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계속해 위축된 채로 산다면 앞으로 큰 포부를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구염락이 평생 이대로 노예처럼 살고자 한다면 그동안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세운 공든 탑이 모두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 누구도 네가 월등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어. 의지가 굳은 사람은 결코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야.”
감격에 찬 구염락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실의에 빠져있던 그의 두려움과 의기소침한 마음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그동안의 노력을 보상 받는 것 같았다. 드디어 가장 중요한 이에게서 인정을 받았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해 주고 바라봐 주었으며,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황자로 인정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어 주고 있었다. 전에 없이 기분이 좋아진 그는 아이처럼 그동안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꿈을 말했다.
“난 언젠가 대장군이 되어 나라를 보위할 거야.”
그녀가 정말로 자신이 이기기를 바랐는지에 관한 문제는 이미 구염락의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장서열이 강력하게 주입한 권력의 꿈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장서열의 표정은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꿈이… 겨우 그게 다야? 대주국을 차지하고 천하를 복속시키는 게 아니고?’
장서열이 서둘러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원대한 목표구나. 분명 이루어질 거야.”
그가 어렸을 때부터 황제의 꿈을 키워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안 돼. 마음을 돌려놔야 해.’
그녀는 이번 생에서만큼은 절대 실패할 수 없었다.
* * *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렸다. 인파 속에 서있는 권서함의 얼굴은 영민하고 단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패배하고도 즐거워하는 당자와, 이제 막 다시 웃음을 회복한 열셋째를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대체 저들에게 뭐라고 말을 한 걸까? 어떻게 두 사람을 싸우지 않게 만들었지?’
열셋째가 장서열을 지키는 모습은 흡사 짐승이 먹이를 지키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그녀를 빼앗기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당자가 명백한 도발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권서함은 여태껏 궁에서 홑몸으로 살아남은 구염락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간파했다. 동시에 그는 어린 장서열이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만 봐. 더 볼 만한 것도 없잖아? 가서 나랑 한 판 붙어보자.”
검은 옷을 입은 아이가 깊은 생각에 잠긴 권서함을 끌어당겼다. 준수한 용모를 지닌 권서함은 여자아이들에게는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이는 초혜전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장서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세도가에도 엄연히 서열이 구분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권 씨 가문은 황실의 외척으로 높은 자리에 군림하며 권위를 과시했다. 사실상 외척은 금상첨화와 같은 것일 뿐, 뿌리 깊은 백 년 전통의 가문이라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더욱 큰 자부심이었다.
그 외 장 씨, 당 씨, 범 씨, 헌원 씨와 같은 귀족 가문들은 공무를 수행하는 관리 집안으로, 반드시 뛰어난 공적과 함께 황제의 총애가 필요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신분은 국공(国公)의 존귀함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구태여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할 가치가 없다는 게 권서함의 생각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아이의 시선이 그들을 향해 움직였다. 머리 위에 꽂힌 남색 장식이 태양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거만한 작은 얼굴에는 명문 세가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권서함의 왼팔을 바라보며 조롱하듯 말했다.
“서풍엽은 확실히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더군. 혹여나 좌상에게 발목을 붙잡힐까 걱정 되지도 않나 봐. 좌상의 저 망나니 같은 딸이 후에 후원에서 어떤 풍파를 일으킬지 아주 기대가 돼.”
권서함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산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말 위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차분한 눈빛으로 낙상에 대비하고 있었다.
한편, 섭궁개는 눈썹을 깊이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당자의 기마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그러나 그보다 두 살이나 어린 구염락이 승리했다.
당자는 자신을 이긴 구염락을 무척 상냥하게 대했다. 크게 웃고 장난치는 건 그의 천성이었는데, 이후 그는 지난날 구염락과 일으켰던 마찰들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기억의 뒤편으로 보내버렸다.
구염락 또한 마찬가지로 더 이상 당자를 비꼬지 않고 온 마음으로 대업을 이루겠다는 포부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체를 단련하고 마음을 다스렸으며, 학업에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그는 지금 당장 황실 열셋째의 훌륭한 풍모와 기개를 내보이고, 혁혁한 공을 세워 장서열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오후, 점심 식사를 마친 당자는 정자에 앉아 멀리서 나비를 잡는 여자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찬란하게 미소 짓는 장서열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춤을 추며 날아오르는 나비보다 아름다웠고, 활짝 핀 꽃송이보다도 고왔다. 하늘하늘한 모습과 단정하고 정중한 언행을 가진 그녀를 알면 알수록 당자는 실제 장서열과 익히 알려진 장서열의 모습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정말 다른 걸까?’
당자가 장서열의 겉옷을 든 채 책을 읽고 있는 구염락을 붙잡고 뜬금없이 물었다.
“너희는 서로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여전히 고개를 숙인 구염락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서열 누님의 반독이 쫓겨나서 내가 대신 누님을 모시게 됐어.”
당자는 꼬마 구염락이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기마술에 있어 구염락과 대적할 만한 자가 없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소문에 누님은 성격이 나쁘다던데?”
당자는 이제 장서열의 단점에 대해 너무나 알고 싶었다. 당자의 꼬인 속내를 모르는 구염락은 여전히 책에 머리를 묻고 답했다.
“아니. 서열 누님은 매우 좋은 사람이야. 누구라도 누님에게 말을 걸면 상냥하게 답해주셔.”
‘그럼 그녀가 경박하고 지조가 없다는 소문은?’
당자가 조금 더 구염락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서열 누님과 세자가 입을 맞추는 걸 봤어.”
그 말에 구염락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당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만 같았다.
“너… 너 소문내면 안 돼! 그냥 입만 한 번 맞춘 거야! 정말로 입만 한 번…….”
채 말을 잇지 못한 당자가 입술을 삐죽이며 덧붙였다.
“아무튼 난 아무 말도 안 한 거다.”
“입을 맞추는 게 뭔데?”
구염락이 천진한 얼굴로 물었다. 당자가 멈칫했다. 그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함부로 말을 옮긴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묻지 마. 그 얘기는 이제 그만 해.”
장서열과 각별한 그가 함부로 말을 흘리고 다니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구염락은 정색하고 말했다.
“안 알려주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거야.”
급하게 구염락의 입을 틀어막은 당자가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의 아이들이 모두 씨름에 열중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함부로 묻고 다니지 마. 그랬다가는 서열 누님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도 있어.”
두 눈을 깜박이는 구염락의 얼굴에는 여전히 ‘네가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묻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사실 구염락은 정말로 물어볼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당자가 계속해 곤란한 얼굴로 대답을 피하자 점점 더 ‘입맞춤’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한숨을 내쉰 당자가 결국 구염락의 귓가에 다가가 입맞춤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건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하기로 한 남녀만이 할 수 있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경박하고 지조 없는 사람이 돼.”
그 말에 구염락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난 앞으로도 서열 누님과 영원히 함께 할 거야. 그러니까 나도 누님과 입맞출 수 있어!”
순간 당자가 구염락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후려쳤다. 화가 가라앉지 않은 그가 씩씩대며 말을 이었다.
“닥쳐! 서열 누님은 너 같은 인간이 함부로 입을 맞출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그건 미래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야.”
“…….”
“똑똑히 들어. 넌 그녀에게 입을 맞출 수 없어. 그건 그녀를 모욕하는 것과 동시에 아주 파렴치한 행동이고,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는 배은망덕한 짓이야. 그러기만 해, 그럼 넌 인간도 아니니까.”
“응.”
구염락은 점점 더 빨갛게 달아오르는 당자의 얼굴을 보며 태연하게 대답한 뒤 다시 책에 고개를 묻었다. 그가 더 이상 묻지 않자 당자는 쿵쿵 뛰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러나 못내 불안한 듯 당자가 다시 한번 어린 구염락에게 주의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