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내가 뭘 잘못했나? 이긴 사람은 나인데 서열 누님은 어째서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있는 걸까?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구염락은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행동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따금씩 흑산이 숨을 토하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도 없는 그의 주변은 적막했다. 그는 홀로 외롭게 선 채 패배한 당자의 곁으로 점점 더 많은 인파가 모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두려웠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알 수 없는 공포는 그로 하여금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그저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마음 한편에서 익숙한 외로움이 피어나 전신을 휘감았다. 한기가 느껴졌다. 어린 시절, 홀로 신형사에 던져져 머리를 겁박당한 채 강제로 고문당하는 장면을 보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낭자한 선혈, 확대된 동공, 흉하게 일그러진 표정들…….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흑산의 고삐를 꽉 움켜쥐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야만 머릿속을 덮친 환영에서 벗어나 눈앞의 현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든 해낼 것이다. 잘할 수 있었다.
헌원상은 여윈 몸을 이끌고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군중에게 방해 받지 않는 자리를 찾고 싶었으나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그마저도 힘든 지경이었다. 휘청거리던 헌원상이 실수로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 놀란 그가 황급히 고개를 숙인 채 반사적으로 잘못을 빌기 시작했다. 소매로 상대의 신발을 닦아주며 그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고의로 그런 게 아니야. 새 걸로 변상할게. 변상할 테니까…….”
혹여라도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염려한 헌원상은 재빨리 자신이 신고 온 새 신을 벗어 그에게 내밀었다. 고개를 든 헌원상은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경악했다. 그는 방금 전 경주에서 이긴 열셋째 황자이자 마음씨 착한 서열 누님이 친동생처럼 아끼는 사람이었다.
헌원상의 눈에 즉시 경배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와 가까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헌원상이 마치 떠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 공자를 이기다니… 정말 대단하더라.”
말을 마친 헌원상은 대답을 기다렸지만 구염락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용기를 낸 헌원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구염락은 넋을 놓은 채 그저 마음씨 착한 서열 누님이 있는 방향만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입을 다문 헌원상이 씩씩거렸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헌원상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그의 곁을 떠나려 할 때였다.
채 두 걸음을 떼기도 전, 누군가에 의해 밀쳐진 헌원상이 바닥에 넘어졌다. 순식간에 몰려온 한 무리의 아이들의 앳되고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도적놈에게 말을 걸다니. 너 참 많이 컸다? 왜, 저 자식처럼 되고 싶으니 거둬달라고 빌기라도 했냐? 꿈 깨시지!”
말을 마친 아이가 금실로 수놓아진 발을 들어 하얗고 여윈 헌원상의 손을 내리찍었다. 귀를 찌르는 비명 소리를 듣고 난 그가 발을 떼며 말했다.
“네 주제를 알아라. 장 씨 아가씨는 너 같은 건 감싸주지 않을 테니까!”
“맞아, 저 도적놈 구염락에게 빌붙으려 해도 소용없어. 옛날에 그는 너보다 더 겁쟁이였어. 장 씨 아가씨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오늘에 이른 건데, 주제도 모르고 당 씨 도련님을 이기는 바람에 지금 아가씨도 도련님을 위로하는 중이잖아. 도적놈은 그녀에게 화만 불러일으키는 배은망덕한 놈이야!”
“천한 놈, 주제를 알아야지. 주인에게 폐만 끼치는 녀석!”
순간 구염락이 몸부림치는 짐승처럼 흉포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그 시선에 몇몇 아이들은 뜨끔 했지만 이내 허리를 곧추세우고 그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안전을 위해 슬쩍 한 발 물러선 채였다.
“뭘 봐! 내 말이 틀려? 당 씨는 대장군 가문이라 좌상 댁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데 감히 네가 당 공자를 이겨버렸잖아. 분수도 모르고…….”
그러나 아이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꽁무니를 빼고 허겁지겁 도망쳐 버렸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멈춰선 아이가 가슴을 두드리며 숨을 골랐다.
“대체 눈이 왜 저렇게 무서워?”
구염락은 도망치는 아이의 모습에 무기력한 얼굴로 먼 곳의 풀밭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서열 누님을 곤란하게 만든 건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헌원상은 시퍼렇게 멍든 손을 움켜쥐며 재빨리 구염락을 훑어보았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눈치 하나만큼은 빨랐다. 방금 전 자신을 때린 아이들의 진짜 목적은 구염락을 모욕하기 위함이었다. 헌원상은 혹시라도 열셋째가 분풀이를 할까봐 천천히 그를 피했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 그가 다시 한번 구염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전에는 나처럼 늘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지만…….’
헌원상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구염 황자는 기마술이며 학업 성적도 뛰어난데 어떻게 나처럼 우둔한 사람 같았다는 걸까? 게다가 신분도 다른데.’
말없이 다시 몸을 돌린 헌원상이 그처럼 비쩍 마른 말을 끌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타고나길 뻔뻔한 데다 생각이 단순한 당자는 주위 사람들이 한 차례 추켜 세워주자 정말로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가 보여준 실력은 꽤 괜찮은 축에 속했다. 그는 속으로 자신이 더욱 발전했으며, 청산에서라면 선배에게도 도전장을 내밀 만한 실력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도 충분히 뛰어나지만 그보다 열셋째의 실력이 조금 더 뛰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당자는 금세 다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장서열은 당자의 무던하고 순진한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활력이 넘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장서열은 어쩐지 당자가 미래에 열셋째와 좋은 군신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천하를 정복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자는 무관의 길을 포기하지도, 이해하지 못할 학문에 고통 받으며 문관의 길을 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장서열은 사람들 속에서 구염락을 찾았다. 그를 발견한 장서열은 무리에 둘러싸인 당자를 빠르게 밀어내고 마장 한편에 자리한 구염락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 있어?”
평소처럼 그의 어깨를 두드린 그녀가 움켜쥔 그의 손에서 고삐를 빼주었다. 몹시도 쓸쓸한 표정을 한 구염락을 보며 그녀가 살짝 웃어 보였다.
“기분이 안 좋아?”
구염락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우 슬펐고, 당장이라도 가슴이 터질 듯 괴로웠다.
장서열은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지 되짚어보았다. 어째서 그가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하지만 그의 눈은 분명 상처받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장서열은 그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안 될 말이었다. 그녀가 즉시 정색하며 진지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열셋째, 네가 이겼어.”
“응.”
물론 이겼다. 구염락은 공연히 풀을 쥐어뜯으며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당자를 이기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서열 누님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이라는 걸 몰랐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다니……. 그녀가 자신을 총애한다고 해서 바보처럼 자신의 본분을 잊고 말았다. 심지어 그는 평소 이런 성격의 사람들을 가장 싫어했다. 어쩌면 누님은 경기 전 이렇듯 주제 넘는 생각을 눈치채고 더는 자신을 아껴주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지도 모른다.
“이겼는데 기쁘지 않아?”
장서열은 의아했다. 그는 마땅히 의기양양할 권리가 있었다. 구염락은 그녀의 말에 순간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그녀에게 미움 받고 있다는 확신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아니. 누님, 저 다시는 이기지 않을 게요.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저를 버리지 마세요. 제발 버리지 말아요…….”
말을 마친 그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에 장서열은 정신이 멍해졌다.
‘왜 이렇게 된 거지?’
그에게는 소년 특유의 오만방자함은 고사하고 작은 패기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안 돼. 그는 반드시… 반드시…….’
장서열은 차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가 이런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우는 건 자유야. 하지만 그게 너여서는 안 돼. 절대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진 장서열의 얼굴에 엄숙한 기운이 감돌았다.
“울지 마.”
놀란 구염락이 눈물을 멈춘 채 멍하니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내 말 똑똑히 들어. 넌 이겼어. 누구도 네가 이기지 못하게 만들 수 없어. 네가 이긴 건 순전히 네 실력 덕분이고 넌 마땅히 그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시합은 정정당당한 거야.”
“…….”
“넌 매우 우수했어. 그러니 그에 걸맞은 기개와 마음가짐을 갖춰야 해!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나약한 모습은 뭐지? 설마 내 옆에 나약한 반독이 있다는 걸 확인 시켜 주려는 거야?”
구염락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웃지 않는 장서열의 모습은 그를 기죽게 했다.
“대답해!”
즉시 허리를 세운 구염락이 큰 소리로 답했다.
“내가 이겼어. 당자는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진 거야. 나에겐 승리할 자격이 있어.”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개를 낮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제자백가의 이론에 있어서도 너는 최고야. 넌 궁술에서 이미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사람을 고르는 안목도 갖추고 있지. 넌 구염락이야. 황실의 열셋째 전하! 아무도 네 신분을 대신할 수 없고 누구도 널 주저앉힐 수 없어. 이 세상에 널 울게 만들 만큼 잘난 사람은 없다고!”
구염락이 놀란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자신이 ‘열셋째 전하’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은 그저 어떠한 의미도 담고 있지 않은 하나의 호칭에 불과했다. 그러나 장서열의 말에 의해 ‘열셋째 전하’는 고귀함을 부여 받게 되었다.
그의 눈을 마주하던 장서열은 그에게 황실 혈통의 존재감을 심어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자존감이 너무 낮았고, 아직 성숙한 행동을 하지 못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 또한 너무 좁았다.
“잘 들어. 네 부황께서는 대주국의 황제로 사해를 통틀어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어. 황제께서 인정하시든 아니든 네가 태자와 같은 혈통을 타고났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구염단신이 대주국의 태자라면, 넌 대주국의 왕야인 거야. 황제께서 승하하지 않는 한, 너희 형제 사이에 귀천은 존재하지 않아.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