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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9)화 (39/449)
  • 제39화

    권서함 역시 착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몸을 곧게 펴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뒷모습은 다소 수척했지만 결코 허약해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튼튼하고 위엄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줄곧 주 대학사를 향한 채였다. 권서함은 때때로 내용에 맞게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학자가 될 좋은 재목으로 몇 대에 걸쳐 문벌 귀족을 배출해낸 선비 가문의 자제다웠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평소 고결한 모습을 보여준 그가 현재 왼손에는 붕대를 감고 있으며, 오른손 역시 활동이 불편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얼굴에 난 상처는 벽옥 같이 온화하고 우아한 용모를 조금 손상시킨 채였다.

    무심히 권서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서열은 문득 당자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낙마 사건 이후 사흘만 휴식을 취하고 곧장 수업에 나왔다고 했다. 작은 상처로 한 달 동안 응석을 부리며 휴식을 취한 그녀와 달리 권 씨 가문의 공자는 그 일로 오히려 그녀와 비교해 새로이 좋은 평판을 얻었다.

    전생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권서함의 모습을 떠올리자 장서열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는 평생 동안 누구도 범접하기 어렵게 교과서처럼 살다 간 사람이었다.

    권서함이 가는 곳은 어디든 마술처럼 변했다. 오랑캐의 땅은 순식간에 파란 풀이 자라나 꾀꼬리가 날아다니는 곳으로 변했고, 아무리 추운 지역이라도 그가 지나가면 누구나 뼈를 묻고 싶어하는 곳이 되었다. 그는 인생 곳곳에서 청산의 전설을 다시 쓴 인물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지.’

    장서열은 분명 말에서 떨어질 당시 바닥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았다. 만약 권서함이 달려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침대에서 족히 반 년은 자리보전을 했을 것이다.

    단향이 모두 탔을 무렵, 마침내 주 대학사가 아쉬운 얼굴로 수업을 종료했다. 장서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녀는 문과 수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행인 건 앞으로 반 년 후면 더 이상 이러한 수업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 한 잔 따라 줄래.”

    구염락이 마침 따라 놓은 시원한 물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한 발 앞선 당자가 귀엽고 정교한 하늘색 잔을 꺼내어 장서열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찻잔에는 향긋한 우윳빛 액체가 가볍게 찰랑거렸고 그 위에 담긴 과일 조각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했다.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킨 장서열이 책상 위의 찻잔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정말 예쁘다. 안에 든 건 뭐야?”

    그녀가 향긋한 냄새를 음미했다. 장서열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 당자의 눈이 한껏 위로 치켜 올라가며 더욱 도도해졌다.

    “향 좋지? 귤즙과 우유를 섞어 따뜻하게 데운 차야. 새로 나온 차지.”

    그가 마치 애늙은이처럼 비웃듯이 덧붙였다.

    “여자아이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나한테는 너무 달더라. 참, 떡도 있어.”

    당 씨 가문의 시종이 공손하게 떡을 받쳐 올렸다. 떡은 찻잔과 동일한 하늘색 접시에 담겨 있었다. 봄날의 강이 그려진 접시는 은은한 색감과 섬세한 붓놀림이 아름다웠고, 연녹색 떡과 어우러진 버들가지 모양은 보는 이의 기분마저 좋게 만들었다. 장서열이 당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고마워.”

    조심스레 찻잔을 든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입 안에 번지는 우유 향이 꽤 맛깔스러웠다.

    “정말 맛있다.”

    당 씨 가문의 시종이 얼른 주인을 위해 나서서 말했다.

    “이것은 도련님께서 찻집 사람을 궁 밖까지 데려와 반 시진 전에 만든 차입니다. 온수로 잔을 데우면서 바로 가져왔습니다.”

    장서열은 미소를 띤 채 말없이 차를 머금었다. 당자는 창피함을 이기지 못하고 시종에게 삿대질을 했다.

    “시끄럽다! 누가 그걸 말하라고 했느냐!”

    시종은 바보처럼 웃으며 질책을 달게 받았다. 구염락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찻잔에서 나는 향기를 맡고 있던 그는 이를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조용히 자신의 물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는 있는 힘껏 찻잔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곧 그녀에게 같은 것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단자는 대충 손에 잡히는 의자를 옮겨와 은근슬쩍 장서열의 옆에 앉았다. 그가 위로 쭉 찢어진 거만한 눈을 들어 환하게 웃음 지어 보였다.

    “그럼 다음 수업 시간에 내게 기마술을 가르쳐 줄래?”

    “그래.”

    매일같이 연습하고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능숙해질 것이다.

    “정말?”

    감격한 당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그녀가 너무나 착하고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즉시 다짐하듯 말했다.

    “열심히 배워서 누님에게 망신주지 않을게!”

    한편, 구석에 앉아있던 헌원상은 자리에 놓인 그림을 만지작거리며 앞줄에 앉은 장서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를 향한 시선을 남들에게 들킬까 두려운 것 같았다. 헌원상의 시종은 주인을 위해 물건을 옮겨주며 이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주인의 자리가 말끔히 정돈되었음을 확인한 시종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다음 시간은 기사(骑射, 말 타기와 활쏘기) 시간이니 준비하셔야 합니다.”

    헌원상이 놀라며 대꾸했다.

    “어?”

    그는 장서열의 곁에 아무도 없을 때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럼 옷부터 갈아입어야겠군. 가자.”

    다시 한번 장서열을 힐끗 바라본 헌원상은 당자에게서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씩 더위가 느껴질 무렵이었다. 섭궁개는 엄격한 눈으로 초원에 나와 있는 황자와 귀족 자제들을 바라보다 이내 그들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이들은 어딘지 모르게 흥분해 있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 것 같았다.

    섭궁개는 금은보화가 나타나도 차분하던 세도가의 자제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들뜬 것인지 궁금했다. 섭궁개는 더욱 차가워진 눈빛으로 날카롭게 주변을 훑어보다 마지막 줄에 선 장서열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역시 왔군. 하인이 끌어주지 않으면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하는 귀족 아가씨께서 기마술이 뛰어나다고?’

    섭궁개가 마치 기대하듯 두 눈을 반짝였다.

    “이제부터 자유 시간이다. 이각(两刻, 30분) 후 다시 집합하라!”

    아이들이 흩어졌다. 그동안 기마 수업에서 출중한 실력을 보여준 몇몇 아이들은 장서열 쪽으로 모여들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섭궁개는 그중 심기가 불편한 녀석이 장서열의 아성에 도전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장서열 주변에서는 웃음소리만 들려올 뿐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말을 탄 당자가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고 장애물을 한 바퀴 돈 다음 장서열의 곁으로 돌아갔다. 평소 성미가 불같은 당자이건만 그녀를 도발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당자는 그녀의 평가를 기다리는 아이 같았고 오만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섭궁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당자는 비록 거만하고 성미가 고약했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높은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일반 시위들의 궁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저렇게 정중한 태도로 어린 여자아이에게 가르침을 받으려 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섭궁개 역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열 살인 장서열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냈단 말인가. 청산지주가 책임을 회피하고자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문을 흘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오늘 당자의 행동 역시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섭궁개는 번뜩 구염락을 지도할 때를 떠올렸다. 구염락은 언제나 장서열이 참 대단하다고 말하곤 했다.

    ‘설마 저 아이가 정말로 출중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인가.’

    섭궁개는 의심을 품은 스스로를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장서열은 여자아이였다. 청산에서 나온 그 소문은 사내아이가 십 년간 고된 훈련을 했다고 해도 다다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설령 장서열이 태어나자마자 말을 탔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장서열은 달려오는 말들의 앞을 한 바퀴 돌며 입을 열었다.

    “방향과 속도는 동시에 조절해야 해. 말을 몰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건 갑자기 속도를 줄이는 거야.”

    “네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건 두려움과는 관계없어. 넌 방금 말과 함께 장애물을 넘을 때 머뭇거렸어. 먼저 뛰어넘을 거리를 가늠한 뒤 상황을 통제해야지.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안 돼.”

    “손이 발을 따라가지 못하잖아. 고삐에만 의지해서 장애물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 고민은 잘못된 거야. 어떻게 못 볼 수가 있지? 눈으로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해도 다른 감각을 활용했어야지. 감각은 긴 시간 훈련을 통해 익히는 수밖에 없어.”

    “네 말이 뛰어넘는 거리도 몰라? 조금 더 일찍 시작했어야 해. 말을 몰고 질주할 때는 눈 깜짝할 새 달릴 생각을 해야지.”

    장서열은 몇몇 남자아이들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여자아이들은 열성적이지는 않았지만 주변을 에워싸고 각기 다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특히 만정은 당장 앞으로 달려 나가 장서열을 안아주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아무리 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고 해도, 당자는 매번 앞장서서 서열 언니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던 아이였다. 만정은 당자가 가장 얄미웠다. 앞으로도 예전처럼 그녀를 헐뜯고 다닐 수 있는지 두고 볼 일이었다.

    가장자리로 물러난 당자는 팔짱을 낀 채 장서열이 자신의 형제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양심에 찔린 그가 줄곧 말없이 꼼짝 않고 서 있는 열셋째를 향해 말했다.

    “이봐, 내가 좀 가르쳐줄까?”

    ‘누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셈치고 말이야.’

    사실 당자는 오전 내내 관찰한 끝에 깨달았다. 장서열이 열셋째 구염락을 대할 때 여간 살가운 게 아니었다. 조금 전에도 그녀는 앞으로 나가기 전 열셋째에게 다가와 함부로 뛰어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똑똑한 당자는 열셋째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오전에 그를 자극했던 말들은 모두 취소하기로 마음먹었다.

    구염락은 미동도 없이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장서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욱신욱신 아파왔다. 그녀가 결코 자신만의 누님이 아니라는 생각은 점차 현실적인 공포가 되어 그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러한 구염락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당자는 신나게 스스로를 추켜세웠다.

    “나도 꽤 대단해. 서열 누님보다는 못해도 널 가르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어때? 나랑 한번 붙어 볼래?”

    당자는 아예 구염락과 형제처럼 지낼 마음까지 먹고 있었다. 장서열이 밉살스러운 열셋째와 가까이 지낸다면 자신 역시 넓은 마음으로 구염락을 받아들이고 잘해줘야 했다. 그렇다면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잘 해주는 행동은 그가 자신의 형제이기에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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