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이어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연노란 그림자가 앞선 모든 말을 따라잡은 뒤, 말의 복부에 꽂혀있던 화살을 꺼내 활시위를 당겼던 것이다. 화살은 날뛰는 말 앞에 정확히 명중했다. 낭떠러지를 불과 일 미터가량 앞둔 말이 앞다리를 세운 채 울부짖었다. 그 말은 다시 방향을 돌려 장내로 난입했다.
헌원가(轩辕佳)의 몸이 말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놀라서 탈진한 듯 구해달라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장서열은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의 목 부근 혈도를 가늠한 뒤 머리에 꽂은 비녀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뭉툭한 방향으로 말을 힘껏 때렸다.
순간 말이 전광석화처럼 질주하여 헌원가의 날뛰는 말을 따라잡았다. 동시에 장서열이 대담하게 채찍을 휘둘러 헌원가의 몸을 감싼 후, 손에 쥔 비녀를 다시 거꾸로 잡아들었다. 그녀가 뾰족한 부분을 세워 말의 혈도에 곧장 찔러 넣었다.
말이 즉시 자리에 쓰러졌다. 그 충격에 장서열의 몸이 앞으로 붕 뜬 채 날아갔다. 그녀는 날아가는 동안 자신의 채찍에 몸이 휘감긴 헌원가가 큰 충격을 받지 않고 떨어질 수 있도록 손에 힘을 주었다. 이후 최대한 방어하기 위해 몸을 둥글게 감싼 그녀는 곧 땅에 떨어지며 느낄 통증에 대비했다.
“으아!”
그러나 그녀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곳에서 난데없이 권서함이 나타났다. 그가 대신 충격을 막아주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권서함은 손목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리자 후회했다. 이렇게 아플 줄 알았다면 나서지 말걸.
황급히 다가온 서풍엽이 놀라서 허둥지둥한 얼굴로 장서열을 부축했다.
“다친 곳은 없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디로 떨어졌어?”
장서열을 번쩍 안아 올린 그가 산 아래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하인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후 울며불며 부상자에게로 다가가 이들이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귀족을 다치게 만든 건 사형 당해 마땅한 대죄였다.
장내에 있던 이들은 서로 마주보며 놀라워 했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채찍을 움켜쥔 당자는 완전히 얼이 빠진 모습으로 쓰러져 죽은 자신의 말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신출귀몰했던 그림자만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황자는 놀란 마음을 뒤로 하고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서열은… 얼굴만 예쁜 바보라고 하지 않았나?’
한편,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그림자 하나가 돌아섰다.
‘실패인가.’
그렇다면 호부와 군부를 움직여 다음 계책을 시작해야 했다.
장서열? 그 아이가 말을 탈 줄 알았던가?
* * *
상부로 돌아온 장서열은 그저 머리가 조금 어지럽고 팔에 찰과상을 입은 것뿐이라며 재차 설명을 거듭했다. 서풍엽은 당황하여 그녀에게 무엇을 물어볼 상태가 아닌 듯했다. 그는 줄곧 장서열을 붙잡은 채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진작 의술을 배워 두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했다.
딸을 기다리고 있던 조옥언은 서풍엽이 다급한 표정으로 딸아이를 품에 안고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딸의 안위를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 시작했다.
농교는 지척까지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대신 마장의 주인이 현장에 있던 마부를 데리고 와서 성실하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해주는 한편, 거듭하여 아가씨의 불가사의한 기마술과 궁술을 칭찬했다. 마지막에는 거의 주제를 벗어나 아가씨의 놀라운 무용담으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조옥언은 화가 치밀어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딸이 조금이라도 해를 입었다면 그녀는 필히 현장에 있던 모두를 죽였을 것이다. 어차피 범인은 그중 한 명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말이 까닭 없이 통제력을 잃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옥언은 딸의 기마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딸아이는 비록 게으르고 휴일에는 희극을 듣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주기적으로 마구간을 찾곤 했다. 다만 기마에 그 정도로 능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기에 마부가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해 사실을 과장한 것이라고 여겼다.
뚱뚱한 몸뚱이를 이끌고 온 청산지주(青山之主, 청산 관리인)는 전전긍긍하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청산을 관리한 지난 삼십 년 동안 한 번도 발생한 적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그간 자신의 구역에서 누군가 농간을 부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 적지 않게 애를 써온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인, 소인은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소인은…….”
그러나 조옥언은 이 일을 추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범인은 그가 아니었다.
“여봐라! 지금 당장 종인부(宗人府)로 가 누군가 둘째 전하를 암살하려 했다고 고하라!”
‘감히 내 딸을 해하여 다치게 만들다니,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조옥언의 말을 들은 청산지주는 순간 바닥에 모로 쓰러졌다. 이것은 곧 구족을 멸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장서열은 서풍엽에게 괜찮다고 일러주며 어머니의 말에 서둘러 주렴을 걷었다.
“홍촉! 주방에 가서 약이 다 달여졌는지 보고 와라.”
물론 달이고 있는 약은 없었다. 눈치 빠르게 아가씨의 뜻을 알아챈 홍촉이 황급히 방을 나가 부인의 명을 이행하려는 종복을 붙잡았다. 장서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 번의 생을 살고 있는 장서열은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성격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타인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막무가내는 언제나 그대로 이루어지며 효력을 발휘했다. 허나 어머니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황제도 언젠가는 선황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장서열은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두 손을 어머니의 무릎에 올려놓은 채 온순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머니, 화내지 마세요. 화내는 모습은 곱지 않아요. 보세요, 저는 하나도 다친 곳이 없어요. 말이 조금 놀랐을 뿐인데 암살이라니요. 겁이 많으신 둘째 전하께서 놀라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어찌 보면 놀라운 자신감이었다. 어머니는 언젠가 황제가 당신의 횡포에 질리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새삼 자신과 오라버니가 어째서 거만한 성격을 가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교육이 이루어진 탓도 컸지만, 이를 제외하면 남는 건 유전이었다.
“못된 것. 뭘 그리 바보같이 웃는 게야.”
조옥언은 딸아이가 상황을 잠재우려 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말했다.
“청산이 대체 어떤 곳인데 말이 놀랐다는 것이냐!”
말을 마친 그녀는 뚱뚱한 청산지주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그가 식은땀을 흘렸다. 직접 상부까지 온 그의 목숨은 이제 상부의 손에 달려있었다. 상부에서 노여움을 풀어야만 그에게도 살 길이 열릴 것이다. 청산지주는 조옥언의 따가운 시선에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것만 같았다. 조 부인은 역시 마주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장서열이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어머니의 다리를 안마했다.
“어머니, 그를 놀라게 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마장에서 이런 큰 사건이 터져 두렵고 불안할 텐데, 어머니까지 그를 겁주시면 어째요.”
청산지주는 감격했다. 그는 장서열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리지 못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다친 아가씨는 좀 어때요?”
장서열이 눈을 반짝이며 청산지주를 바라보았다. 이왕 돕기로 했으니 끝까지 도울 생각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그가 황급히 답했다.
“아가씨께 아룁니다. 소인 급하게 오느라 정확한 상태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소인이 내려올 때 마장의 의원이 이미 헌원 씨 아가씨의 진맥을 보았사온데, 가벼운 찰과상일 뿐이며 조금 놀란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마사(马师, 말 조련사)가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장서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장에서 날아오를 듯 거침없던 모습과 능수능란한 기마술이 아직도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앳되고 여린 아가씨가 그렇게 출중한 실력을 보였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조옥언이 딸의 손을 쓰다듬었다. 딸은 너무 마음이 약했다. 그녀는 딸을 위해 충왕부와 정혼을 맺어놓은 사실에 새삼 안도했다. 딸아이의 뒤에 바짝 붙어 있는 미래의 사위를 바라보던 조 씨가 마음이 놓이는지 활짝 미소 지었다. 장서열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전생에 헌원가가 낭떠러지에서 추락해 사망한 뒤, 호부의 헌원 가문과 군부의 당 가문은 서로 반목을 거듭해 왔고, 이는 한때 조정의 정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조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서북장군은 군대를 주둔시켜 변경에 큰 세력을 형성했다.
전생에서 구염락은 서북을 징벌하기 위하여 첫 번째 친정(亲征, 임금이 몸소 나아가 정벌함)을 감행했고 승리했으나, 문관과 무관 사이의 장장 스무 해에 걸친 싸움은 대주국에 큰 악재로 작용했다.
당 씨 가문은 문신과 대립각을 세우는 과정에서 결국 패배했고, 이로 인해 분열되어 가문이 몰락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리고 당자는 그녀보다 훨씬 일찍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자에게 좀 더 편안한 생을 살게 하려면 헌원가는 죽지 않는 것이 좋았다.
조옥언이 나무라듯 딸을 바라보며 그녀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어째서 권 공자에 관한 일은 묻지 않느냐? 널 구하려다 팔이 부러졌다는 구나. 소식을 듣고 놀란 황후께서 태의를 파견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서풍엽은 장서열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황급히 공수(拱手, 절을 할 때 두 손을 앞으로 포개어 잡는 자세)하며 답했다.
“서열이를 구해주다니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후한 선물을 준비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조옥언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볼수록 예비 사위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장서열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날 구한 게 권서함이었다고?’
황후의 조카인 권서함은 후에 구염락이 황후의 양자가 되면서 자연스레 황실의 외척이 되었다. 뭇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권 씨 가문은 삼 대에 걸쳐 태부(太傅)를 지냈으며, 문무관을 통틀어 천여 명이 넘는 문하생을 배출했다.
이러한 가문을 등에 업은 권서함은 연경 최고 입지를 다진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주변에 뛰어난 친구들이 셀 수 없이 있었고, 장서열과는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굳이 관계를 찾는다면 권서함의 누이동생이었는데, 그녀는 장서열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장서열이 어서 황후의 자리에서 내려가기만을 손꼽아 바랐던 인물이었다.
장서열이 아픈 손목을 살살 어루만졌다. 권서함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마 침대에 누워 몇 달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녀는 황제께 상으로 받은 활을 그에게 선물로 줘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