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장서열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구염락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낯선 입맞춤이었다.
막 오솔길을 지나려던 당자(唐炙)가 손에 채찍을 그러쥔 채 눈썹을 치켜떴다. 돌연 몸을 돌린 그가 일행을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
“젠장, 저쪽으로 가자!”
‘장서열, 이제는 풍기문란이라니! 하루라도 남자를 미치게 하지 않으면 어디가 덧난다더냐? 그 얼굴로 별짓을 다 하는구나. 세자처럼 딱딱한 사람까지 이런 곳에서… 그런 짓을 하게 만들다니……!’
어딘지 모르게 짜증이 난 듯한 서풍엽이 서둘러 장서열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주변에 무더기로 피어있는 배꽃을 바라보았다. 스스로에게 따귀를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긴 경관이 별로인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보자.”
말을 마친 그가 여전히 경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장서열을 강하게 잡아당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장서열이 모르기를 간절히 바랐다.
장서열은 손으로 입술을 어루만지며 그의 뒤를 바싹 따랐다. 상쾌한 향기가 채 가시지 않고 남아 있었다. 서풍엽의 것은 피할 수 없던 구염락의 강렬한 입맞춤과 달리 부드러웠고, 심지어 자신을 살짝 떨리게 만들었다. 그녀가 속으로 풋, 하고 웃음 지었다. 어리고 풋풋한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오라버니,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어머니께 말씀드려도 되나요?”
그녀가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놀라서 돌아본 서풍엽의 얼굴은 복사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장서열의 눈에서 웃음기를 발견한 그가 한층 더 쑥스러워하며 그녀를 잡아당긴 채 빠르게 걸었다.
“안 돼!”
거친 대답과 달리 속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서열은 입맞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화독(梨花坞) 방향으로 쭉 걷자 평원의 경마장이 나타났다. 이곳은 청산에서도 가히 무릉도원이라 칭할 만한 곳으로, 드물게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어 봄가을 경마가 열릴 때면 귀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서풍엽이 장서열을 잡아당겼다. 길을 바꿔 돌아오던 당자(唐炙)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시선과 달리 차갑게 코웃음을 친 당자는 장서열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한때 초혜전을 평정했던 세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당자가 인사를 올렸다.
“세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풍엽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도도하면서도 온화했다. 당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연경에서 횡포하기로 유명한 자라도 감히 서풍엽 앞에서 무례하게 굴 수는 없었다. 세자가 아니었다면 조금 전 그는 길을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장서열 같은 여자를 미래의 부인으로 맞이하다니, 왕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 셈이었다.
당자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장서열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가 화사하게 웃었으나 당자는 그 모습을 더욱 무시했다. 태자는 물론 이제는 세자까지 눈이 멀어버린 것 같았다. 그나마 최근 태자는 장서열의 늪에서 거의 빠져나왔으므로 이제 급하게 구해야 하는 건 세자 쪽이었다. 당자가 서풍엽을 바라보며 늠름하게 말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모처럼 내기나 한 판 하시지요. 이렇게 함께 모이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서풍엽은 곁에 있는 장서열을 한 번 바라본 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을 본 당자는 장서열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막돼먹게 행동하더니, 커서는 이 남자 저 남자 꼬여내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세자까지 바보로 만들었다.
장서열은 당자가 대놓고 자신을 싫어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이번 생에선 홀로 연경의 망나니가 되었다고 누님이라 부르지도 않는구나.’
전생에서 당자와 함께 연경의 두 바보라 불렸던 날들을 떠올리자 장서열에게서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당자의 부모는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당자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보긴 뭘 봐! 아무리 쳐다봐도 난 너 안 좋아해!’
당자가 이를 꽉 깨물었다. 서풍엽이 걱정스레 물었다.
“당자, 더위를 먹은 게 아니냐? 더우면 좀 쉬었다 가자.”
당자의 얼굴이 제법 빨갰다. 아무래도 산을 너무 뛰어다녀서 그런 모양이라고 서풍엽은 생각했다.
‘누가 더위를 탄다는 거야!’
당자가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장서열이 서풍엽의 손을 잡아당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쑥스럽나 봐요.”
서풍엽은 찬란하게 웃는 장서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간혹 그의 팔에 웃는 그녀의 머리가 닿았다 떨어질 때면 온몸에 힘이 풀려 나른해졌다. 조금 전의 입맞춤을 떠올린 서풍엽이 장서열을 따라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그를 놀리지 마.”
계단을 통과하자 곧 드넓은 마장이 펼쳐졌다. 소리 높여 부르는 노랫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기를 거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 장서열은 곧장 위쪽의 새 마장으로 올라갔다. 높은 지위를 지닌 귀족만 출입할 수 있는 곳에 드나드는 건 그녀에게 익숙한 일이었고, 특별한 대우를 받는 일에 익숙한 그녀의 성격이 거만한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한편, 당자가 나는 듯이 위지해어(尉迟解语)의 곁으로 달려갔다.
“세자가 왔어.”
그리고 그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날 듯이 말을 몰고 떠났다.
작고 아름다운 얼굴을 한 위지해어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허리선이 높은 청록색의 경마용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한 손에 잡힐 듯한 잘록한 허리와 늘씬한 몸매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올해 열세 살로 호리호리한 몸매를 갖고 있어 이제 막 여인의 티가 나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특히 눈에 띄었다.
위지해어의 시선이 천천히 걸어오는 서풍엽에게로 향했다. 그에게 반한 빛이 역력한 시선이었다. 쑥스러움에 이내 시선을 돌린 그녀가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친구들은 모두 마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안도한 그녀가 막 서풍엽의 이름을 부르려 할 때, 그의 뒤에서 한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순간 실망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가 서풍엽을 맞이하러 다가갔다.
“서열 동생과 세자께서 오셨군요. 동생은 오늘 참 예쁘게 입었네. 하지만 말을 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 세자께서는 동생이 흙먼지를 마실까 염려되셨나 봅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서풍엽을 향해 아리따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서풍엽은 여전히 장서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당자 쪽에 돈을 건 거야? 그 말은 경주 경험이 없을 텐데.”
“원기왕성해 보이잖아요. 이길 것 같지 않아요?”
장서열이 은표 한 장을 손에 쥔 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서풍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쟁반을 든 하인에게 은표를 건넸다.
“비참하게 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위지해어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서열 동생은 손이 크네. 당자의 기마술은 천하무적이라 할 만하지만 이번에는 아마 질 것 같아. 하 씨 후부의 도련님이 나섰거든.”
장서열이 군중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다 이내 입을 삐죽였다.
“약자를 괴롭히다니.”
“동생,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먼저 경기에 나온 하 도련님께 당자가 막무가내로 도전한 거니까.”
북소리가 둥둥 울려 퍼졌다. 열 마리의 말이 철책을 넘고 쏜살같이 달리며 모래 바람을 일으켰다. 말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나는 듯이 달리며 각자 거리를 벌려 나갔다. 위지해어의 시선이 서풍엽에게 향했다.
“세자께서 나가신다면 식은 죽 먹기일 텐데요.”
못 들은 척 서풍엽은 장서열을 잡은 채 계속 걸어갔다.
“앞쪽에 이황자께서 계시니 가서 인사드리자.”
이황자는 장성하여 이미 황궁 밖 저택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서풍엽과 동갑으로 위지해어와도 같은 연배였으며, 장서열은 당자와 같은 연배에 속했다. 서풍엽의 말에 위지해어는 장서열을 향해 웃어 보인 뒤, 그의 태도에 개의치 않은 듯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장서열의 시선이 태연자약하게 담소를 나누는 위지해어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이미 위지해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초혜전에서 태자와 장서열을 제외하면, 그 다음가는 소문이 바로 위지해어와 서풍엽의 관계였다.
연경의 귀족들 중 위지해어의 마음이 서풍엽에게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서풍엽이 좋아하는 놀이라면 위지해어도 모르는 것이 없었고, 그녀가 제일 잘하는 음식은 바로 서풍엽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심지어 위지해어의 치장은 어느 정도 장서열과 비슷하기까지 했다.
장서열은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위지해어를 바라보았다. 남자를 위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위지해어는 자신을 바라보는 장서열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좋아하는 이의 여인에게 조금도 적의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장서열 역시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구염락의 비빈들을 상대하던 것에 비하면 위지해어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장서열이 자신의 미소에 답할 거라 미처 예상하지 못한 위지해어는 잠시 멈칫하며 웃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너 정말 저 막돼먹은 계집 밑으로 들어갈 작정이야?”
“정실 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면 그러는 수밖에. 너희 혹시라도 저 아이에게 미움 사는 행동은 하지 마.”
말을 마친 위지해어가 다시 마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편, 마장은 돌연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어떤 말이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고삐를 밟힌 말이 쓰러짐과 동시에 말 등에 꽂혀 있던 채찍이 안쪽에서 한가롭게 노닐던 말에 적중했다. 문제는 이 말들의 등 위에 경주를 구경하던 귀족 아가씨들이 고운 자태를 뽐내며 올라타 있었다는 점이었다.
갑작스런 채찍질에 놀란 말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말에 타고 있던 호부상서 헌원 대인의 적녀는 혼비백산하여 안간힘을 다 해 고삐를 쥐었고, 덕분에 말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친 듯이 날뛰던 말은 순식간에 안쪽 경계를 뚫고 경주로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산간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제의 말에 올라탄 사람은 다름 아닌 헌원 대인의 적녀였다. 마장의 하인들이 즉시 말에 올라 쏜살같이 그 뒤를 쫓았다. 장서열이 말에 뛰어올라 뒤따른 것 역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서풍엽이 귓가에 스치는 빠른 바람을 느꼈을 때는 이미 곁에 있던 여자아이가 말을 타고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당자는 빼앗긴 자신의 말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왜 설치고 난리야!”
고삐를 단단히 붙잡은 서풍엽이 말에 올랐다. 그는 장서열이 기마 시간에 구염락에게 말을 끌게 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떨어지면 어쩌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