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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4)화 (34/449)

제34화

사실 큰 잘못은 아니었다. 다만 완정이 주인을 ‘배신’한 것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당시 구염락에게 화가 나있던 장서열의 기분은 몹시 좋지 않았고, 금용 또한 뒤에서 계집종을 이용해 구염락의 환심을 하려 한다며 그녀를 비웃었기 때문에 순간 화가 난 그녀는 완정에게 엄벌을 내려 힘든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

생각해보면 모두 금용의 계략 때문이었다. 소리자와 금용은 본래 남소원(南小院)에서 동고동락한 사이로, 그가 금용에게 각별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소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예쁘고 야무진 완정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금용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금용이 내명부에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소리자 덕분이었다. 그러나 소리자가 아무리 완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부부가 된 이상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정이 들 것이고, 때가 되면 장서열에게도 쓸모가 있게 될 터였다.

그리고 마치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완정은 장서열이 냉궁에 갇히자 최선을 다해 그녀를 보살폈으며 결국 그로 인해 벌을 받았다.

“마마, 그때 노비는 마마를 배신한 게 아닙니다. 단지 제가 너무 어리석어서 마마의 뜻대로 폐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하지만 소리자는 달랐어요. 노비는 그에게서 마마께 더 유리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이 나간 장서열을 찾아온 완정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래, 그래서 소리자가 말하지 않았던 비밀은? 소리자는 너를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

후에 벌어진 일을 장서열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짐작 못할 바는 아니었다. 금용은 완정이 사사로이 냉궁에 드나들었다는 것을 이유로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 궁에서 매에 맞아 죽은 계집종 하나쯤은 별 것 아니었다.

소리자는 몇 년 동안 자신을 따랐던 완정이 죽자 삼년동안 재계(齋戒: 제사를 지내거나 신성한 일 따위를 할 때, 목욕해서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정을 피함)를 했다.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웃는 얼굴로 방에 들어오던 비민(飞敏)이 장서열을 향해 더욱 환하게 웃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부인, 고야(姑爷, 처가에서 사위를 부르는 말)께서 오셨습니다. 날씨가 좋아 아가씨를 데리고 교외로 산보를 가고자 하십니다.”

“초 마마, 얼른 서열이에게 겉옷을 주지 않고 무얼 하는가.”

홍촉이 즉시 말을 이었다.

“맞아요, 맞아. 고야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죠. 참지 못하고 뛰어 들어오실 지도 몰라요.”

“네가 감히 아가씨를 놀리는구나.”

조옥언이 앞서 들어온 비민보다 더 기뻐하며 웃었다. 방 안의 하녀들이 모두 입을 가리며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완정을 보며 심란하던 장서열 역시 웃고 말았다.

3월은 아직 완연한 봄은 아니었다. 교외로 산보를 가기에는 조금 이른 시기였으나 일찍 봄을 만끽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연경의 수많은 귀족들은 이미 놀 만한 명당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청산은 봄이 오면 왕실 자제들과 세도가의 귀족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성지였다. 울창한 버드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이루었고 온 산에는 복숭아와 오얏나무가 가득했다. 유명한 다사(차를 마시거나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있는 사교장 겸 오락장)와 넓은 마장은 세가 귀족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곳이었다. 이는 장서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족들의 부푼 기대 속에 서풍엽의 마차에 올랐다.

농교는 즐거운 얼굴로 아가씨의 곁을 지켰다. 허약하고 깡말랐던 과거와 달리 보기 좋게 살이 오른 농교의 피부는 윤이 났다. 병약했던 외모는 어느새 형형한 빛을 내고 있었으며, 생기 넘치는 분위기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호감을 주었다.

장서열의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리해 주던 그녀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의 맑고 아름다운 모습에 새삼 매료된 듯했다.

“아가씨, 차 드세요.”

담황색 옷을 입은 장서열은 팔에 옅은 자주색의 겉옷을 걸친 채였다. 머리에 꽂은 나비 모양의 비녀는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하늘하늘 날개를 움직이며 아름다운 광채를 냈다. 농교는 거의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충왕부 세자가 아가씨와 마주할 때마다 긴장하는 것도 당연했다. 매일 아가씨를 보는 그녀조차 이렇듯 하루하루가 새롭지 않은가.

마차 밖에 선 서풍엽은 본래도 다정한 얼굴이라 부를 수 없는 얼굴을 더욱 딱딱하게 굳힌 채 온몸으로 어색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주변을 지키는 시위들은 현명하게 침묵을 지켰지만 속으로는 주인을 피해 더욱 멀리 떨어지고픈 심정을 꾹 참는 중이었다.

청산은 하얀 배꽃의 꽃술에서 흘러나오는 청아한 향기로 가득했다. 멀지 않은 정자에서는 두어 명의 문인들이 산을 마주한 채 대작 중이었다. 좁고 긴 자갈길에 자라난 풀 버들은 서로 경쟁하듯 향기를 뱉어내 따뜻하고 싱그러운 봄기운을 물씬 느끼게 했다.

한편, 장서열의 곁에 선 서풍엽은 그녀를 응시하며 입술을 꽉 오므렸다. 수려하고 비범한 용모에는 복잡한 심경과 근심이 가득했다.

‘왜 아직도 묻지 않는 걸까?’

장서열이 배꽃 한 송이를 꺾어 코끝에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산간의 고요함을 담은 은은한 향기가 콧잔등을 스쳐 지나갔다. 편안하고 상쾌한 느낌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장서열이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아이였다. 아직도 토라져 있다니.

“기분이 안 좋아요?”

서풍엽은 장서열이 드디어 알아봐주자 속으로 몹시 기뻤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나한테 묻고 싶은 거 없어?”

장서열이 의아해하며 꽃가지로 톡톡 그를 쳤다. 고개를 갸웃한 그녀가 꽃 사이로 그에게 웃어보였다.

“영명하고 위풍당당하신 연경의 세자님, 소녀가 무엇을 물어봐 드릴까요?”

“혼날래?”

서풍엽이 긴장이 풀린 듯 그녀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다가 이내 쑥스러운 얼굴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장서열로서는 더욱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서풍엽의 얼굴은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걸으면서 애써 감정을 숨겼다.

전날 밤, 목욕을 하고 나온 서풍엽은 침대에 누워있는 낯선 여인을 발견했다. 순간 장서열을 떠올린 그는 문득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미는 걸 느꼈다. 이는 마치 구염락이 거슬릴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는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았다. 장서열 또한 자신이 다른 여자와 가깝게 지내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계속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 나한테 묻고 싶은 게 없어?”

장서열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제 그가 통방을 만난 소감을 궁금해 해야 하는가? 자신이 그 정도로 도량이 넓은 사람으로 보일 리 없었다.

빨갛던 서풍엽의 얼굴이 이번에는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장서열을 감히 마주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분명 어제 일을 알고 있다. 어머니가 상야 부인 측에 사람을 보냈으니 그녀 또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녀는 통방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것일까.

그는 열셋째가 장서열과 가깝게 지내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녀도 분명 자신과 같을 것이라 믿었다.

서풍엽은 희망에 차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장서열의 미간과 입술을 꼼꼼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시선을 뗀 그가 부끄럽지만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의할 게 있어.”

“…….”

“난 너 이외에 다른 여인은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른 남자가 있어서는 안 돼!”

순간 장서열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준수하고 명료한 눈동자, 묵처럼 짙은 눈썹, 굳게 닫힌 얇은 입술과 하나로 묶인 새까만 머리카락. 천부적으로 영명함과 비범함을 타고난 그였다. 그렇다면 그 역시 아름다운 첩실들을 거느리는 복을 누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왜요?”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 멍청한 질문을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한껏 흥분한 서풍엽이 답했다.

“널 좋아하니까! 난 네가 다른 남자를 향해 웃는 걸 용납할 수 없어. 너 역시 마찬가지야. 넌 내가 다른 여자와 함께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바꿔서 생각해 봐. 내가 어찌 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겠어.”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라고?’

장서열이 경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안팎으로 자세히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서풍엽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결을 지킨 것이 아니라,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그녀의 존중하겠다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사랑이 소멸한 뒤, 전생에서 그녀가 바란 것은 단지 서로에 대한 존중뿐이었다……. 그리고 끝끝내 얻지 못했다. 그런데 서풍엽은…….

“날 못 믿는 거야? 난 널 속이지 않아.”

서풍엽이 당황한 듯 황급히 덧붙였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생각은 그래. 넌 아직 어려서 완전히 이해하긴 어렵겠지. 하지만 네가 다 크고 나면 우리 서로에게만 잘하기로 하자, 응?”

서풍엽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직 아무 것도 모를 때 미리 교육을 해둬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든 장서열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만족스럽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심지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감동을 받았다. 누군가 드디어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겠다 말하고 있었다. 즐거운 일이었다. 눈앞의 소년은 처음으로 앳된 티를 벗고, 그녀에게 미래 상공(相公, 부인이 자기 남편을 높여 부르는 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처음으로 구염락 이외의 다른 이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걸 허락했다. 그러나 씁쓸해진 서풍엽의 입꼬리는 살짝 내려갔다. 예상대로라면 감동한 장서열이 당장 그의 품으로 뛰어 들어와 행복한 미소를 지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렸고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대범하게 팔을 뻗어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난 네 상공(相公)이니까, 당연한 거야.”

장서열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만이 지닌 향기가 봄날 배꽃의 향과 어우러져 더욱 맑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가볍게 그를 톡톡 두드린 후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욕심쟁이.”

서풍엽은 순간 당황했다. 그녀의 얼굴에 옅은 볼우물이 패였다. 머리 위에 장식된 나비 모양의 비녀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살랑살랑 날개를 흔들었고, 연지를 바르지 않은 깜찍한 입술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빛이 넘실대는 눈동자 속에 자신의 그림자가 비치자 그의 마음이 더욱 흔들렸다.

한참 넋을 잃고 있던 서풍엽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가볍게 부딪친 입술의 감촉은 그가 밤낮으로 그리워할 만큼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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