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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1)화 (31/449)
  • 제31화

    섭궁개는 구염락에게서 쇳조각을 빼앗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구염락은 소처럼 힘이 셌고 아무리 막아도 그 힘이 전혀 줄지 않아 이제 거의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 섭궁개는 무척 놀랐다. 구염락의 힘이 센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열셋째 전하, 진정하십시오. 저 아이는 호부상서의 아들입니다. 호부상서의 아들이라고요!”

    섭궁개는 다급해졌다.

    ‘만약 저 아이가 잘못되면 누가 당신을 태자로 만들어 주겠습니까!’

    구염락의 눈은 갈수록 빨개졌다. 그의 눈에는 오직 바닥에 누워 엄살을 부리고 있는 헌원상의 모습만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구염락의 손을 놓칠 뻔한 섭궁개가 급히 소리쳤다.

    “열셋째 전하! 장서열이 보고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전하님의 웃는 모습을 좋아하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순간 구염락이 방심하는 틈을 타 그의 손가락을 편 섭궁개가 쇳조각을 빼앗아 구덩이에 던져 버렸다. 그제야 섭궁개는 자신이 탈진에 가까울 정도로 땀에 젖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숨을 돌리던 섭궁개의 눈에 또다시 헌원상을 향해 걸어가는 구염락이 보였다. 놀란 섭궁개가 거의 튀어 오르듯 달려가 그의 다리를 껴안았다. 만약 구염락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지난 십 년간 준비한 그들의 대업이 다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구염락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은 채 장서열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상처와 두려움에 젖은 눈빛으로 시선을 거뒀다. 그의 눈에서 처량함과 고통, 공포와 애달픔이 뒤섞인 감정을 읽은 섭궁개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구염락은 마치 눈물을 쏟아낼 듯했다.

    구염락이 장서열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는 헌원상은 안중에도 없이 그녀의 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돌변하여 그녀의 손을 홱 낚아채 힘껏 움켜쥐었다.

    ‘서열 누님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 버리지 않을 거야!’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장서열이 고개를 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과 마주쳤다. 구염락은 마치 그녀가 어디로 도망갈지 몰라 두려운 사람처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순간 당황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열셋째……?”

    구염락은 그녀의 부름에 비로소 활짝 웃어 보였다. 따스하면서도 마치 애원하는 듯했다.

    ‘저는 누님의 말을 잘 들어요. 정말로요.’

    순간 장서열은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에 본능적으로 헌원상에게 잡혀 있는 손을 거두려 했다. 하지만 그의 힘은 너무 셌고, 때마침 태의가 마지막으로 뼈를 고정시키는 참이었다.

    헌원상은 심한 고통으로 유일하게 의지가 되는 사람의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한 아픔에 오히려 정신을 차린 장서열은 조금 전 무엇인가에 홀린 듯했던 스스로를 비웃었다. 지금 구염락은 황제가 아니었고, 자신 또한 황후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를 보며 마음 아파하는 거야.’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물었다.

    “왜 그래?”

    그녀는 누구의 환심을 사야 하는지 절대 잊지 않았다. 구염락이 주춧돌이라면 헌원상은 한낱 돌멩이일 뿐이었다. 전자가 후자보다 중요하지만 후자는 반드시 괴롭혀 줄 것이다.

    구염락은 천천히 장서열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고 마음의 안식을 얻고 싶었다. 장서열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반증이었다.

    서풍엽은 구염락이 장서열을 껴안으려는 모습에 화가 나 자리를 떴다. 그러나 채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그는 다시 멈춰 섰다. 장서열은 자신의 세자비였다. 가야하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다시 돌아와 눈에 불을 켠 채 두 아이가 정혼자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구염락! 그 표정은 대체 뭐야.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서열이가 네 아내라도 돼?’

    서풍엽은 분노에 휩싸여 이를 갈았다. 머지않아 장서열이 초혜전을 떠나면 누구도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바닥에 누워있는 헌원상을 보며 서풍엽의 화는 더욱 솟구쳤다.

    ‘이 놈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왜 죽지도 않고 남의 손을 잡아! 치맛자락을 잡은 것만 해도 필히 네놈 조상의 무덤을 불사를 일인데!’

    이대로 계속 초혜전에 있다가는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았다. 그때 급히 도착한 호부상서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헌원상을 데려갔다. 섭궁개는 호부상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호부상서 마차 안, 헌원 대인은 치밀어 오른 화로 인해 낯빛이 파래져 있었다.

    “쓸모없는 늙은이! 미안하단 말 한 마디가 없다니!”

    헌원상은 아버지의 표정에 아픔을 참으며 두려움에 떨었다. 헌원오마(轩辕伍马)는 기죽은 헌원상을 보며 더욱 표정을 구겼다.

    헌원오마는 조정과 재야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누구에게도 져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딸만 실컷 낳고 아들은 하나뿐인 탓에 연경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젊은 시절 그는 아들도 없다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신경 쓰지 않는 척했으나, 뒤에서는 수많은 첩을 들였다. 그러나 낳고 또 낳아도 다 딸뿐이었다. 쉰이 넘어 어렵사리 낳은 아들이 한 달도 못되어 죽었을 때, 연경의 모든 관원이 그를 보던 표정은 가히 볼 만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이에 외실이 아들을 낳았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 여인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만약 그에게 아들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검증 결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폐인 같이 행동하는 저 겁쟁이가 정말 자신의 아들이었다.

    최악이었다. 아들을 가졌다는 기쁨 같은 건 없었다. 헌원상의 죽은 듯한 표정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헌원오마가 큰소리로 화를 냈다.

    “숨긴 뭘 숨느냐! 마차에 숨을 곳이 어디 있다고 !”

    헌원상은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몸을 움츠렸다.

    * * *

    정오의 태양은 따뜻했다. 봄의 초원에는 나비들이 날개를 팔랑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초혜전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전각 앞 화원에서 놀았다.

    남자아이들은 말을 타고 격투를 벌였다. 한 사람은 말, 한 사람은 장군. 적을 먼저 쓰러뜨리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였다. 그들은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서로의 옷을 당기는 등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땀을 흘렸다. 이에 관심을 보이는 여자아이들은 외곽에 서서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응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저마다 모여 나비를 잡으며 수다를 떨었다.

    기마 복장에서 펄럭이는 긴 치마로 옷을 갈아입은 만정은 한쪽 팔에 주황색 비단 겉옷을 걸치고 머리 위에는 같은 색의 비단 꽃을 꽂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아이들 속에서 장서열을 찾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쉼터로 뛰어갔다.

    정오의 햇살 아래 한 무리가 다급히 초혜전 쪽으로 향했다. 앞장을 선 여자아이는 밝고 예쁜 용모를 하고 있었다. 살구색 긴 치마를 입고 팔에 겉옷을 걸친 그녀의 머리에 흔치 않은 봉황 비녀가 눈에 띄었다. 비녀 꼬리에 박힌 보석이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냈다. 한 번 보면 기억에 남을 만한 미인이었다.

    범억아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어젯밤 태자는 오랜만에 그녀의 침소에 들었다. 그러나 그가 찾아온 이유는 고작 장서열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라 이르기 위함이었다. 친밀한 관계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한 명은 태자였고 다른 한 명은 미래 충왕부의 세자비였다. 태자는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그녀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범억아는 지난 밤 태자의 말을 곱씹으며 치미는 분노와 억울함을 삼켰다. 하지만 아이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서열에게 잘 보여야 했다. 아울러 장서열을 자신의 처소인 저군전(储君殿)으로 자주 초대해 태자와 마주치게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범억아는 억울했다. 누구라도 자신의 입장이 된다면 억울할 것이다.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무시당해야 하다니! 그녀는 태자가 많은 여인을 품어도 상관없었고 심지어 그에게 미인을 골라 줄 용의도 있었다. 하지만 장서열에게 이토록 절절한 것만은 좀처럼 용납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설서(雪暑)를 비롯한 그녀의 일행이 발걸음을 멈추고 공손하게 말했다.

    “양제, 도착했습니다.”

    범억아는 익숙한 문을 바라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고작 어린 계집일 뿐이다. 그녀는 태자가 장서열을 손에 넣은 후에도 지금처럼 간절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고하라.”

    그때 구염락이 발을 걷어 올렸다. 탐탁지 않은 표정의 장서열이 범억아를 쳐다보았다. 범억아의 처지가 어떻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태자의 일에 개입하는 건 전생의 기억을 지닌 자신도 한계가 있었다.

    장서열은 구염단신이 황위에 오르길 바라지 않았다. 물론 그녀도 달라진 미래를 상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설령 태자가 황위에 오른다 해도 구염락은 아주 약간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모든 강산을 피로 물들여서라도 황위를 빼앗을 사람이었다. 차라리 순리대로 자리를 내주는 편이 나았다.

    물론 그녀는 태자의 보살핌이 고마웠다. 그러나 아직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태자 때문에 난감했고, 서풍엽 역시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귀찮은 범억아를 보낸 건가.’

    범억아는 장서열이 예를 갖추지 않자 심기가 불편했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장서열에게 매번 패배해왔고, 덕분에 그토록 좋아하는 빨간색 옷도 입지 못했다. 장서열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태자비였을 것이다. 대주국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

    범억아는 아이를 생각하며 화를 꾹 참았다. 후에 자신의 아들이 이름을 떨치는 날 반드시 오늘 받은 모욕을 그대로 돌려주마 다짐했다. 그녀는 더욱 너그럽게 웃어 보였다.

    “역시 이곳은 정말 예쁘구나. 작은 방이지만 동생의 손에서 꽃도 피어날 것 같아.”

    장서열은 다시 붓을 집어 들며 말했다.

    “열셋째가 배치한 것입니다. 양제께서 좋아하시니, 열셋째에게 배워 보시지요.”

    “너……!”

    범억아는 다시 한번 화를 눌렀다. 아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황실의 장손을 낳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동생은 농담도 잘하네. 지나가는 길에 초혜전에서 지내던 날이 그리워 들어와 봤어. 동생도 벌써 열 살이구나. 갈수록 예뻐지는 것 같아. 그러니 미래의 부군께서 이곳까지 쫓아오지.”

    “제게 따로 할 말이 있으신가 보군요.”

    장서열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범억아는 가져온 선물을 그녀의 얼굴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들어온 지가 언제인데 아직 차 한 잔도 대령하지 않는 게야? 차는 어디 있느냐! 시종들은 다 어디 있고!”

    봄맞이꽃을 그리는 장서열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열셋째가 내오는 차를 감히 드실 수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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