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0)화 (30/449)
  • 제30화

    “피부가 벗겨졌다…….”

    장서열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는 헌원상이 지금 당장 죽길 바랐다. 그렇다면 그 자를 닮은 그 박정하고 의리 없는 아들이 태어날 일도 없을 것이다. 문득 그녀에게 무엇인가 떠올랐다.

    ‘그래, 냉궁에 와 내 앞에서 상아를 모욕한 건 주소유(朱小游)였지. 헌원상의 처, 주 대학사의 딸!’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소유는 똑똑한 스스로에 도취되어 남편을 쥐락펴락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장서열을 자극하며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려 했다. 주소유는 누군가를 밟으며 행복을 느끼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황후가 아니었으니 상아를 없애고, 새로 금 귀비라는 뒷배를 얻고 싶었겠지. 앞으로 영원히 편치 못하게 만들어주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장서열은 학생들 사이에서 급히 주소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바퀴 돌아보던 장서열은 당시 뛰어난 문학적 소양으로 연경을 제패했던 주소유가 아직 초혜전에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주소유가 상아를 달라며 간절히 빌지만 않았어도 장서열은 그녀가 어디서 뭐하던 여인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감히 형편없는 이유로 자신의 딸을 괴롭히다니! 주소유는 처참하게 죽어 마땅했다.

    장서열의 분노를 눈치 챈 구염락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톡톡 건드렸다. 그녀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상아에게는 너 같은 아버지가 없어! 넌 다시는 상아 같은 딸을 둘 자격이 없어!’

    놀란 구염락이 빠르게 손을 거두었다. 서풍엽이 황급히 그녀를 껴안으며 다급히 외쳤다.

    “서열아!”

    “난 괜찮아요.”

    서풍엽을 밀친 장서열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살면서 진정으로 누군가를 미워한 적이 없었다. 기 씨와 금용의 일은 모두 자신이 부족했던 탓이므로, 그들을 원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헌원상 내외는 달랐다. 그들은 멀쩡히 살아있는 자신의 눈앞에서 딸을 노렸으며, 치밀한 계획을 세워 상아를 괴롭혔다. 그러나 냉궁에 유폐된 그녀는 딸을 위해 어떠한 복수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무력감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여봐라! 태의를 불러 서열이를 살피게 하라!”

    장서열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됐어요.”

    ‘주소유, 헌원상의 총애를 등에 업고 거만이 하늘을 찔렀지. 좋아, 이번 생은 결코 편히 살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장서열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열아…….”

    서풍엽과 구염락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분은 여전히 나빠 보였다. 이제 구염락은 거의 울 것 같았다.

    “누님, 내가 다 잘못했어요. 내가 누님을 데리고 거기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장서열이 안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위로하듯 열셋째를 보며 웃었다. 이어 우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렇게 많이 다쳤는데, 가서 괜찮은지 한 번 보자.”

    서풍엽은 놀란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장서열의 침착하고 다정한 모습에 속으로 한기를 느꼈다. 처음 보는 모습은 아니었다. 다정한 얼굴 너머 그녀는 사실 뼛속까지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모든 일에 조금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으며, 어린아이였음에도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건 태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태자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처럼 철저히 무시했다. 그리고 그 차갑고 방어적인 모습이 서풍엽을 더 깊이 빠져 들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준 이가 바로 열셋째였다. 그로 인해 서풍엽은 열셋째의 존재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년간의 노력 끝에 그는 드디어 장서열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이에 만족했다.

    그는 가끔 자신을 보는 장서열의 경계 섞인 눈빛에도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눈에 서린 어둠은 무엇이었을까. 장담컨대 장서열은 단순히 헌원상의 부상을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헌원상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왜? 왜 이름도 모르는, 별 볼 일 없는 자의 일에 관심을 갖는 걸까?’

    도착한 태의들이 헌원상을 둘러싸고 급히 그의 다리뼈를 고정하려 애썼다.

    “부러졌으니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머리 상처는 어서 지혈을 해야 합니다!”

    “왕 태의, 우선 의식부터 차리게 하게. 뒤쪽은 멈추지 말고! 전체를 고정해!”

    다급한 상황이었다. 호부상서에 아들은 헌원상 하나뿐이므로 특히 머리를 보호해야 했다. 사람들 사이로 작은 그림자 둘이 조심스레 숨었다. 그들은 헌원상을 놀라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바닥에 누워 있던 헌원상은 이미 깨어나 있었으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그는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아파요, 어머니. 아파요!’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둔 사람들은 차마 헌원상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때, 장서열이 나타났다.

    장서열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두 걸음 더 나아갔다. 태의를 피해 고통에 몸부림치는 헌원상의 곁에 몸을 숙이고 앉은 그녀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걱정하듯 말했다.

    “많이 아파? 조금만 참아. 곧 괜찮아질 거야.”

    장서열의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녀를 일으키려던 서풍엽이 멈칫했다. 헌원상은 눈을 뜨려고 애썼으나 몽롱한 시선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하는 듯했다.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가볍게 그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동작은 온화했고 눈빛은 부드러웠다.

    “걱정 마, 태의가 있으니 아프지 않을 거야.”

    위로하는 목소리와 평온한 어조는 몽롱한 눈을 한 헌원상을 울고 싶게 만들었다. 그는 무서웠다. 집에 가고 싶었으며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는 정신을 붙들고자 안간 힘을 쓰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집에 가고 싶어. 아파, 아프다고!’

    그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외실(外室)의 자식으로 사생아라 손가락질 당해왔다. 그는 어째서 자신이 하루아침에 호부상서의 유일한 아들이 되었는지 알지 못했으며, 그저 어머니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서풍엽의 눈에서는 거의 불이 뿜어질 지경이었다. 열셋째 또한 참고 있었다.

    ‘저게 대체 누구길래! 감히 서열이의 앞에서 불쌍한 척을 하다니! 서열이의 손은 아직 나도 당당히 잡아보지 못했는데!’

    서풍엽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녀석을 평생 누워있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장서열은 서풍엽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헌원상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녀가 더욱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의 말로는 다리에 큰 이상은 없다고 해. 지금은 다리를 고정하고 있어. 손 태의는 네가 잘 참는다고 했고, 섭 장군은 너희 가족에게 소식을 알렸어…….”

    장서열은 헌원상이 자신의 손을 잡게 놔둔 채, 모든 이들이 널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를 조용히 위로해주었다.

    서풍엽의 각진 턱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장서열은 열 살이었다. 어찌 사내아이와 그리 가깝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바닥에 누워 있는 아이는 고작 대여섯 살 정도였지만, 서풍엽은 그 멍청이가 장서열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혜전에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들이다니!”

    거만하게 말의 고삐를 잡은 남자아이는 몸에 딱 맞는 검은 옷을 입은 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준수한 용모를 한 황후의 친조카이자 태사(太师)의 아들인 권서함이 있었다.

    권 씨 가문의 심복 노릇을 하는 집안의 아들이 다가와 이야기를 이었다.

    “죽지 않은 게 아쉽군. 쟤 어머니가 외실(外室)이라던데. 더러워.”

    “외실이 뭐야?”

    비교적 온건한 정치색을 지닌 가문의 일곱 살 남자아이가 천진하게 물었다. 평소 스스로의 똑똑함을 자부하는 열 살 남자아이가 허세를 부리며 설명해 주었다.

    “외실은 주인의 명이면 누구든 모시는 여인을 말하는 거야.”

    연경의 호사가나 다름없는 당자(唐炙)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말이 많네. 아는 것이 많은가 봐? 그럼 통방(通房, 첩 역할을 겸하는 하녀)은 어떻게 생각해?”

    강자에게 약한 봉황간(凤凰简)은 즉시 입을 닫고 연경의 어린 폭군으로 정평이 난 당자에게 아부 섞인 웃음을 지었다.

    “허세 좀 부려봤어요, 허세.”

    장서열과 돈독한 사이인 예부상서의 딸 만정(万静)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장서열을 향해 작은 소리로 외쳤다.

    “언니, 서열 언니! 어서 이리 와요. 그는 아주 나쁜 사람이래요. 더럽다고요.”

    말을 마친 만정이 입을 막으며 영민한 큰 눈으로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나쁜 말을 입에 올렸으니 마마에게 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만정은 곧 학당에 마마가 들어오지 못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제야 숨을 돌렸다. 그녀가 다시 한번 장서열에게 다급하고 작은 소리로 외쳤다.

    “쟤는 몸에 벼룩이 있대요! 벼룩은 무서운 벌레야. 그러니까 서열 언니, 어서 돌아와요.”

    장서열이 어이없고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단순한 아이 같으니라고. 아마 영원히 순진하겠지.’

    만정이 소리쳤다.

    “서열 언니, 그는 바보예요. 바보는 전염된다고요.”

    주변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열아, 헤픈 동정심은 그만 둬. 열셋째만으로는 부족해? 그래서 사생아 자식을 하나 더 거두려는 거야?”

    “걔는 어머니가 누군지도 몰라. 헌원 대인이 주워 온 자식이라고.”

    “사생아!”

    “똑같아.”

    “전염 된다니까?”

    “하나 더 거둘 셈이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구염락은 당황스럽고 놀라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아니야! 서열 누님이 그럴 리 없어. 누님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챙길 리 없어. 나는 누님에게 특별한 사람이야. 누님에겐 나만 있으면 돼.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별안간 구염락이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쇳조각을 뽑아들었다.

    ‘필요 없어! 필요 없는 건 없애야 해!’

    그의 눈에 핏줄이 섰다. 귓가에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메아리 쳤다.

    ‘없애 버리면 아무도 누님을 빼앗을 수 없어!’

    순간 구염락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섭궁개가 급히 뛰어가 그의 손에 들린 쇳조각을 빼앗으려 했다. 급박한 상황이었으나 쳐다보는 이들에게 선뜻 도움을 요청하지는 못했다.

    “말은 도망가지 않으니 굳이 쇠까지 박을 필요는 없다!”

    ‘힘이 왜 이렇게 센 거야! 제길, 대체 바닥에 박힌 철전(铁栓)은 어떻게 빼낸 거지? 대체 누가 정을 이따위로 박은 거야! 찾아내면 장 백 대를 내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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