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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9)화 (29/449)

제29화

구염락은 고개를 흔들었지만 속으로 적잖이 감동했다. 장서열은 정말 착했고 모든 일에서 자신을 배려해줬다. 그는 더더욱 장서열 혼자 말을 타게 둘 수 없었다.

“먼저요.”

하인에 가까운 그를 어릴 적부터 사람으로 대해준 건 오로지 장서열뿐이었다. 그녀는 활을 쥐여 주고 기마술을 가르쳐 줬을 뿐만 아니라 모기를 퇴치하는 향낭까지 선물로 주었다.

향낭. 이를 생각하면 구염락은 도저히 서풍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향낭일 뿐이었다. 그에게 없는 물건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는 매일 새 것으로 바꾸지 않는가. 하지만 서풍엽은 장서열이 자신에게는 향낭을 주지 않았다며 분노했고, 결국 그녀와 다투기까지 했다. 가장 속상한 것은 결국 장서열이 세자의 뜻대로 향낭을 다시 가져갔다는 것이다.

구염락은 문득 쓸쓸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 후 장서열은 더욱 정교하게 만든 향낭을 구염락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전보다 향료가 더욱 듬뿍 담긴 것이었다.

‘서풍엽이 화병으로 죽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 멍청한 자식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며 예쁘다고 했다. 세자는 정말 미친 것일까. 장서열이 자신에게 더 예쁜 것을 주었는데도 좋아하다니. 어쨌든 세자는 제 것이었던 그 못생긴 향낭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다녔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씁쓸하게도 구염락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장서열이 자신을 아껴주지만 서풍엽을 화나게 하면 더 이상 그녀와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때때로 서풍엽에게 무엇을 안겨줘야 영원히 장서열과 함께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곤 했다.

* * *

첫 번째로 목적지에 도착한 서풍엽은 곧 다급히 말을 이끌어 다시 돌아갔다. 재미는 없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장서열을 볼 수 없었다. 그는 공무가 없을 때 일부러 초혜전을 찾았다. 수업 대상이 아닌 서풍엽을 섭궁개는 관대하게 눈감아 주었다. 조수가 많아지면 그만큼 아이들을 감시해 줄 사람이 늘어나니 마음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에서 내린 서풍엽은 마지막 조를 찾았다. 그리고 역시나 장서열의 곁에 선 구염락을 발견하고는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그가 속이 좁아서 구염락을 받아주지 못 하는 것이 아니었다. 구염락은 그를 도무지 방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언젠가는 점심 때 옷을 갈아입던 장서열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구염락이 바로 뛰어 들어간 적도 있었다. 서풍엽은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구염락이 장서열을 잘 보필해 그녀의 환심을 사지만 않았다면 진작에 녀석을 처리했을 것이다.

서풍엽은 문득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좌절감에 괴로워졌다. 구염락은 아무런 장점이 없었지만 그녀가 시키면 하늘의 별도 따다줄 만큼 수발을 잘 들었다.

‘조금만 더 참자.’

올해만 지나면 장서열의 초혜전 생활도 끝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자연히 떨어지게 될 것이다.

무릎을 꿇고 앉아 말발굽을 검사하던 서풍엽이 고개를 들었다. 그를 바라보는 불편한 눈이 있었다. 어린 아가씨가 눈빛을 빛내며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세자님…….”

서풍엽은 굳은 표정으로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영문을 알 수 없던 소녀는 자신을 둘러싼 아이들에게 위로를 받으며 슬프게 울었다.

한편, 섭궁개가 햇빛을 쬐고 있던 서풍엽을 불렀다.

“가서 구염락에게 전해라! 우물대지 말라고.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백 번을 돌게 될 것이라고!”

구염락? 서풍엽은 열셋째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다들 열셋째를 도적놈이라 부르는 통에, 장서열이 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열셋째라는 호칭을 따로 붙여준 것을 잊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전하라! 다시 안 오고 싶나!”

섭궁개를 날카롭게 한 번 훑어본 서풍엽이 느릿느릿 말을 끌고 사라졌다. 섭궁개는 한숨을 쉬었다. 세자는 흔치 않은 인재였다. 아쉽게도 이미 장성해 버렸지만 어릴 때부터 공을 들였다면 장차 큰일을 하는 데 보탬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장 씨 가문의 쓸모없는 계집을 마음에 품었으니, 부디 장래에 애처가가 되어 오손도손 잘 살길 바랄 뿐이었다.

곧 정신을 차린 섭궁개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1조의 황자들과 귀족 자제들을 지휘하며 그들이 사사로이 장애물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이어 그가 구염락이 왔는지 확인하려던 찰나, 허약한 몸집을 한 아이가 겁에 질린 눈을 부릅뜬 채 말의 등에서 떨어져 내렸다.

“악!”

섭궁개가 분노에 차 소리쳤다.

“누가 장난을 치는 게냐!”

사고를 친 태감이 서둘러 놀란 말의 고삐를 잡았다. 황급히 땅에 무릎을 꿇은 그는 바닥에 흐른 핏자국을 보며 점점 더 겁에 질렸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섭궁개는 말 안 듣는 학생을 혼내는 게 취미인 스승이었다. 그 앞에서 재수가 없는 건 고스란히 주인을 모시는 아랫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어린 주인의 요구를 무시해도 재수가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저 태감은 일이 벌어진 후 필사적으로 어린 주인을 위해 비는 수밖에 없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질책하려던 섭궁개는 문득 아이들이 몰려오는 소리에 급히 외쳤다.

“아무도 나오지 마라! 이 자를 건드리지 마! 어서 태의를 불러 오거라!”

말을 마친 섭궁개는 주변을 둘러싼 모든 이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일에 딱히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수업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이는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을 보호하며 구경하는 사람들 틈새를 파고들었다. 군중들 사이 그럭저럭 의복을 갖춰 입은 어린아이가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피 흘리는 모습과 떨고 있는 몸은 무척 공포스러웠다.

마음 여린 여자아이들은 이미 놀라 울고 있었고, 그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아이들은 각자의 반독에게 놀란 마음을 위로 받고 있었다. 이를 똑바로 지켜보는 건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아이들뿐, 나머지는 그 광경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구염락은 잔잔한 눈으로 햇빛 아래 선홍색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선홍색 피는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그의 시야를 꽉 채웠다.

장서열은 평온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낯선 얼굴을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얼굴이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였다. 잊을 수 없는 그 자.

일순간 그녀의 눈이 증오로 물들었다.

‘죽은 건가? 떨어져 죽었어야 해! 아니면 가서 죽여야지. 숨통을 끊어놓겠어!’

그때, 흥분에서 벗어난 구염락이 정신을 차린 후 장서열에게 물었다.

“누님? 서열 누님, 사람들이 밀어요? 누님!”

말을 마친 그가 그들과 거리를 두고 선 사람들을 밀어 바닥에 쓰러뜨렸다. 하얗게 질린 장서열이 분노에 가득 차 손수건을 꽉 쥐었다. 그녀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증오가 가라앉지 않았다.

“괜찮아.”

그러나 구염락은 그녀가 분노했다는 걸 알았다. 뒤늦게 군중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서풍엽이 화가 난 표정으로 장서열을 품에 안았다. 그가 열셋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런 위험한 곳을 비집고 들어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말을 마친 서풍엽이 장서열을 데리고 무리를 벗어났다.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사람이 많은 곳은 위험해. 전에 부딪힐 뻔한 거 잊었어?”

생각할수록 열셋째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생각이 없을 줄이야. 구염락은 미안함에 고개를 떨구고 급하게 이들을 따라 나왔다.

“누님, 놀랐어요?”

한편, 섭궁개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구염락이 마치 충성스러운 하인처럼 장서열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섭궁개가 초혜전에서 구염락을 가장 만족스러워 하는 이유는 그의 기술이 아닌, 일종의 기세 때문이었다. 섭궁개는 구염락이 달리는 말에서 떨어져도 벌떡 일어날 만한 근성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바닥에 널브러져 울 용기도 없는 이런 겁쟁이와는 다르지!’

한편 서풍엽은 돌을 찾아 방석을 깔고 장서열을 앉혔다.

“괜찮아, 뭐 이런 일로. 열셋째도 겁내지 않는걸. 약하게 굴지 마.”

서풍엽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려 했다. 실은 그보다도 손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느낌에 계속해 만지고 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어쩐지 태자께서 전에…….’

생각을 멈춘 서풍엽이 장서열을 향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장서열은 자신의 것이었다.

장서열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서풍엽의 손을 뿌리치지 않은 것은 그나마 실낱같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은 덕분이었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녀는 미래에 벌어진 일들을 일상으로 끌어온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늘, 낙마해 죽지 않은 헌원상(轩辕上)은 달랐다.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모를지언정 그녀는 죽어서도 그를 잊을 수 없었다. 호부상서의 유일한 서자 헌원상. 그와 그의 아들 때문에 그녀의 상아(裳儿)가 죽었다.

나의 유일한 딸.

장서열은 울고 싶었다. 상아는 항상 겁이 많고 따뜻했으며 무언가를 바란 적도 없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처지에 길들여진 까닭이었다. 상아는 궁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삭이곤 했다. 그래서 가장 신경이 덜 쓰이던 아이였다. 그러나 구염락은 상아를 좋아하지 않았고, 때문에 상아는 한 번도 아버지의 앞에 나선 적이 없었다. 일찍 철이 든 딸이 혼인 후 행복하기를, 자신처럼 비참해지지 않기를 바랐건만…….

상아가 죽었다. 겨우 17살이었다. 부고를 전하러 온 자는 상아가 헌원 씨 가문의 자손을 해쳤다고 말했으나 모두 헛소리였다. 상아의 죽음은 헌원상의 아들이 금용의 딸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지혜롭고 인정이 두터우며 교양 있는 사람이라 착각하고 딸의 혼처를 너무 빨리 정해 주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금용이 낳은 딸은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지 자신들은 은밀히 수년을 함께 해왔으며, 그 사이를 갈라놓은 게 상아라고 우겼다. 황후 자리에서 실각한 자신의 처지가 그들로 하여금 마음껏 상아를 괴롭힐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미리 알았다면 그녀는 절대로 상아를 혼인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딸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 하더라도 절대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장서열이 어두운 표정으로 피가 날 것처럼 손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본 서풍엽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는 서둘러 열셋째를 막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녀는 크게 놀란 것이 분명했다.

“서열아, 무서워하지 마. 태의들이 곧 도착할 거고 큰 문제는 없을 거야. 피부가 약간 벗겨졌을 뿐이야.”

구염락은 장서열의 손을 꽉 잡은 서풍엽의 손을 죽일 듯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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