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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6)화 (26/449)
  • 제26화

    장서열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풍엽의 행동은 너무 과했다. 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역시 자신처럼 어른들이 마련한 혼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귀찮은 일도 많이 줄어들 터였다. 서풍엽이 어째서 이 혼사를 수락했는가는 그녀가 고민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흰 설탕이 마치 하얀 눈 같네요. 떡이 얇은 것을 보니 어선방 백 사부의 솜씨군요. 세자께서 신경 많이 쓰셨겠어요.”

    “마음에 들어?”

    자연스레 합류한 서풍엽은 하인에게 자신의 식사도 올리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렇다면 이 탕수잉어도 먹어 봐. 어머니가 널 위해 직접 주방에 지시하신 거야.”

    장서열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충왕비님께서 고생이 많으셨네요.”

    “고생은 무슨. 어머니께서는 매일 네 이야기를 하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네가 어머니의 친딸인 줄 알 거야. 언제 한번 시간이 괜찮으면 우리 집에 가서 어머니의 말벗이 되어 줄래? 데리러 갈게. 이것도 한번 먹어 봐.”

    열 살짜리 남자아이의 친절이 썩 적응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호의만큼은 마음으로 받았다. 서로 미워하느니 살가운 시어머니가 있는 건 좋은 일이었다. 서풍엽에게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어떻게 나오든 장서열은 상관없었다. 익히 알려진 그녀의 못된 성품에도 불구하고 그는 혼사를 거절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난감하게 만들지 않은 것에 그녀는 깊이 감사했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곁에서 시중을 들면서 서풍엽이 가리키는 반찬을 빠르게 집어 그녀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온몸에 땀을 흘리는 작은 몸뚱이가 탁자 주변에서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가끔 서풍엽의 눈짓 없이도 장서열이 좋아하는 반찬과 서풍엽이 추천한 반찬을 접시에 가져다 놓기도 했다. 서풍엽이 만족스러운 듯 칭찬했다.

    “작은 녀석이 일을 아주 잘하는군.”

    구염락은 입꼬리를 올리며 바보 같이 웃어보였다. 방금 전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장서열은 그를 한 번 바라본 후 계속해 식사를 했다.

    ‘천천히 가르쳐도 늦지 않겠지.’

    * * *

    오후 수업이 끝나고 장서열은 장서전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장서전은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태자가 몇 번이나 자신을 불렀는지 모른다. 장서열에 관한 일을 묻기 위해서였다.

    누이동생과 어머니는 태자와 가까이 지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풍엽과 정혼을 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장서전은 그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태자는 그렇게 속 좁은 인물이 아니었다.

    장서전은 바늘 위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내내 참던 그가 결국 말을 꺼냈다.

    “왜 태자를 무시하는 거야? 점심에 너를 찾는다고 태자 전하가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어. 그런데도 넌 계속 시간이 없다고만 했지. 그럴 필요 있어? 세자와 정혼을 한 게 태자 전하와 무슨 상관이야.”

    “…….”

    “태자께서는 너를 많이 아끼셔. 네가 사고 칠 때마다 도와준 것도 태자 전하잖아.”

    장서열은 오라버니가 어째서 구염락을 반독으로 삼았느냐 묻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그녀가 장서전에게 차를 내어주며 말했다.

    “오라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이미 정혼을 했어. 태자 전하와 계속 만나는 건 외도나 다름없다고.”

    장서전은 순간 답을 하지 못했다. 누이동생에게서 이렇게 단호한 반응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 하지만…….”

    장서전이 말끝을 흐렸다.

    ’태자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외면할 수 있어?’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누이동생의 말이 맞다고 느꼈다. 그래서 다른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구염락은 왜 상대해 주는 거야?”

    장서열은 속으로 안도하며 그의 찻잔에 꿀을 넣어 주었다. 아이들은 그냥 차는 잘 마시지 않으니까.

    “세자는 내가 구염락과 함께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태자 전하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꺼려하지.”

    “…….”

    “오라버니, 난 이제 정혼한 몸이라 예전처럼 태자 전하와 뛰어놀 수 없어. 설마 누이동생이 구설에 오르는 걸 바라는 거야?”

    “누가 감히 너를 욕해! 이 오라버니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친 그가 곧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래, 동생에게 정혼자가 생겼으니 전처럼 태자 전하와 놀 수는 없겠지.’

    “하지만… 만약 태자를 화나게 하는 날에는…….”

    장서열은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와 서풍엽은 동갑임에도 한참 달랐다. 심지어 현재 처해있는 상황만 아니라면, 구염락과 맞붙었을 때 거뜬히 지는 쪽은 오라버니였다.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오라버니, 어머니께서 오라버니가 두 달 정도 외조부 댁에 가 있길 바라셔. 어머니를 대신해 효를 다했으면 하시던데, 언제 갈 예정이야?”

    어안이 벙벙해진 장서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말이 외조부 댁으로 연결되는 거지?

    “나는…….”

    장서열이 아예 못을 박았다.

    “내일 어때? 나도 함께 갈게. 사촌 언니와 외할머니가 그리워.”

    장서전은 완전히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외조부 댁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사촌들과 외숙 모두 자신을 마치 이상한 물건 보듯 쳐다보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억지로 말을 삼켰다. 기대하는 동생의 눈빛에 차마 가기 싫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

    * * *

    상부 정원, 기 씨는 조옥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가련하게 눈물짓는 아름다운 얼굴과 입은 옷마저 버거워 보이는 가녀린 몸은 보는 이들의 가슴마저 아프게 했다. 평소 기 씨의 소박한 모습만을 보아온 홍촉은 기 씨의 미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렇게 고운데 평소에 왜 전혀 꾸미지 않았던 거지?

    ‘병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귀신이라도 씐 것인가. 아니면 부인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서? 역시 무식한 것이 무섭군!’

    기 씨는 작은 소리로 흐느꼈다. 오후 내내 운 탓에 처음 울기 시작했을 때의 열정은 사라지고 분을 찍어 바르지 않은 얼굴은 갈수록 창백해지고 있었다. 어깨 위로 늘어진 머리카락의 고운 자태와 부드러운 피부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녀가 소박한 옷소매로 눈물을 닦을 때마다 드러나는 빨간 옥팔찌는 유난히 눈이 부셨다. 울고 있는 그녀에게서 숨길 수 없는 교태가 배어나왔다.

    “부인, 부디 소첩의 세 아이를 풀어주셔요. 소첩의 죄는 저 혼자 감당하겠습니다. 소첩이 불길한 사람이란 것을 잘 알기에 본디 별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 했으나, 노야께서 굳이…….”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가 더욱 안쓰럽게 흐느꼈다. 손목에 채워진 홍옥은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는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부인께서는 높은 식견을 가지고 계시니 아시겠지요. 소첩이 며칠 동안이나 부인께 가시어라 부탁드렸지만 노야께서는 한사코 제 말을 듣지 않으셨어요. 아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소첩에게 기어코 다시 아이를 갖자 하시니, 소첩이 어찌 할 수 있었겠습니까.”

    “…….”

    “부디 소첩의 성의를 보아 제 아들들을 사당에서 나올 수 있게 해 주시어요. 소첩이 불전 앞에서 부인을 위해 경을 읽겠습니다.”

    홍옥을 찬 손목이 그제야 아래로 내려오며 바닥에 부딪혀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기 씨가 급히 손을 들어 보배를 아끼듯 팔찌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곧 자신의 행동이 적합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조심스레 다시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부자연스러운 동작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의 팔찌에 집중되었다.

    홍촉은 웃음을 참았다. 그녀는 종일 울며 호소한 기 씨를 밖으로 내쫓지 않았다. 부인은 학당에서 싸움을 일으킨 장서목을 벌하기 위해 사당으로 보냈을 뿐이다. 그것과 기 씨를 향한 상야 어른의 총애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상야 어른을 논하는 것은 부인을 골탕 먹이려는 속셈임이 불을 보듯 훤했다. 그러나 기 씨는 부인이 그녀의 홍옥 팔찌와 노야의 총애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그동안 기 씨는 생각보다 잘 참아왔다. 그렇게 참고 참다가 마침내 장신성의 총애가 자신에게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아쉽게도 홍촉은 부인이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부인은 좋은 아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상부 최고의 주인인 것만은 자명했다. 그러나 기 씨는 상야의 총애만 있으면 누구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고 믿는 듯했다.

    울먹이는 기 씨는 대단히 슬퍼 보였다. 하지만 오후 내내 이어진 그녀의 울음에도 조옥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사이 손수건 하나를 수놓았으며, 시집 한 권을 정독하기까지 했다. 마치 기 씨를 단단히 화나게 만들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부인, 노야께서는… 노야께서는 부인께서 노야를 원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노야께서는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소첩을 돌아오게 하신 겁니다……. 소첩은 부인의 무언가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 씨는 더욱 슬프게 울었다. 또 다시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수년 간 소첩은 늘 모든 이에게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부인께서도 아시겠지만…….”

    조옥언은 마지막 실을 잘라낸 후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에 든 작은 옷을 바라보았다. 올케 댁에 곧 셋째가 태어날 테니 지금부터 준비하면 늦지 않겠지.

    기 씨는 조옥언이 쉬는 틈을 타 더욱 크게 울기 시작했다. 내가 이리 긴 세월을 양보했으니 거기서 만족해라, 내가 상야께 말하여 네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다, 대놓고 말만 안 했을 뿐 그런 의미였다.

    조옥언은 하인에게 갓 지은 옷을 넣어 두라 이른 뒤 마침내 온종일 눈물 바람인 기 씨를 바라보았다.

    순간 기 씨의 눈이 번뜩이며 창백한 얼굴에 빛이 어렸다. 마치 피를 맛본 짐승이 설욕의 날을 맞이한 것처럼. 그녀는 조옥언에게 네가 얼마나 웃기고 한심한지 아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또한 장신성의 진정한 부인도, 그가 사랑하는 여인도 모두 자신이며 조옥언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일갈하고 싶었다.

    그녀는 오늘 조옥언이 무너지기를 바랐다. 조옥언이 연경의 웃음거리가 되길 바랐다. 아무도 감히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조옥언의 거만한 입술과 얼굴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자신에 의해 벗겨지고, 자신이 조옥언을 제치고 진정으로 이 연경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길 바랐다.

    아무도 장신성을 두고 자신과 경쟁할 수 없었다. 그런 여인들은 다 죽어야 한다.

    “말 끝났나.”

    조옥언이 담담하게 소매 자락을 정리했다. 순간 기 씨는 멍해졌다. 화를 내지도 않고 자신을 문책 하지도 않다니? 수년 동안 시중을 들었어도 기 씨는 도무지 조옥언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죽을 기세로 버티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네 부군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라고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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