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기 씨가 돌아왔다. 장신성은 마치 조옥언의 권위에 도전하듯 보란 듯이 기 씨를 총애했다. 기 씨에 대한 그의 보살핌과 사랑은 끊이질 않았다. 특히 반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고자 장서양을 입궁시키려 했으며 연경에서 제일가는 선생을 초청하여 장서영을 가르치게 했다.
기 씨를 측부인으로 삼는다면 조옥언이 모를 리 없었다. 기 씨의 처소에서는 이미 둘째 부인이라는 호칭이 암암리에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옥언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기 씨를 무너뜨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장신성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 *
사흘 뒤, 구염락이 절뚝거리며 초혜전에 나타났다. 그는 가산(假山, 돌로 만든 인공산)을 잡고 새하얀 이를 드러낸 채 싱글벙글 웃으며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가 기대가 가득 찬 눈빛으로 이제 막 마차에서 내린 장서열을 보며 웃어보였다. 마차에서 내린 장서열이 땅에 발을 디뎠을 때, 숨어 있던 구염락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구염락은 이내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바보 같이 웃었다.
‘나를 보았다……. 나를 봤어!’
구염락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의 발밑에 놓인 돌멩이가 되고픈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이어 마차에서 뛰어 내린 서풍엽이 장서열을 보며 웃었다.
“어라? 이 녀석 움직이잖아. 생명력이 강하네.”
장서전은 화를 냈다.
“어째서 또 우리 마차를 따라온 거야! 저리 가!”
장서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구염락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몸이 안 좋으면 며칠 더 쉬어도 돼. 감기 들면 어쩌려고.”
그녀의 말에 구염락의 눈이 구슬처럼 맑아졌다. 마치 부모님께 칭찬 받으려는 아이 같았다.
“전 괜찮아요. 정말 다 나았어요. 이것 봐요!”
그가 붕대로 감싼 손발을 쥐고 허둥지둥 두 바퀴를 돌아 보였다.
“잘 움직이죠? 호 태의가 움직여도 된다고 했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장서열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고작 다섯 살이었다.
‘그는 아이야. 아이일 뿐이야.’
“그래도 조심해야 해. 이왕 왔으니 따라 와.”
“정말요?”
그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정말.”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던 장서열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든 서풍엽이 불쌍한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한숨 쉬었다.
“나도 정말 다치고 싶다. 그러면 나도 우리 부인을 따라갈 수 있을 테니까. 녀석, 팔자도 좋구나. 우리 부인 잘 모셔야 한다.”
“네, 네. 소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작은 눈이 사라질 정도로 웃는 모습에 서풍엽은 생각이 많아진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너무 맞아 멍청해졌군. 황자를 이렇게 키우다니, 궁은 역시 만만한 곳이 아니야.’
장서열은 서풍엽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사흘간 그가 정혼 사실을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초혜전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므로 호불호를 논할 필요도 없었다. 장서열은 정말로 그와 혼인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서 나쁠 것이 없었다. 평온한 일생을 살아가며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구염락은 부지런하게 움직여 갑옷과 화살을 가져왔으며, 먹을 갈고 종이를 까는 등 즐겁게 그녀를 모셨다. 주 대학사가 수업에 집중한 틈을 타 몰래 나갔다 온 그가 차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누님, 새로 내린 차예요.”
그리고는 몰래 덧붙여 말했다.
“꿀을 두 수저 넣어서 맛있어요. 얼른 마셔요, 얼른.”
구염락은 눈을 깜빡이며 뚫어져라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한 입 삼키는 것을 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했다. 장서열은 찻잔을 만지다가 옆에 있는 여운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여운, 이만 돌아가. 너희 아버지께 스승님 한 분을 청하고 시종을 두어 명 붙여달라고 해. 조금 더 편하게 배울 수 있을 거야.”
여운은 잠시 멈칫하다가 놀라서 털썩 무릎을 꿇은 뒤 바닥에 쿵쿵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아가씨, 소녀가 뭘 또 잘못했나요? 제발 저를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앞으로 정성을 다해 아가씨를 모실게요. 제발 소녀를 쫓아내지 마세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주 대학사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또 장서열의 농간이라 생각한 그는 화를 참지 못해 책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순간 얼이 빠져 우는 것도 잊은 여운은 스승님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 스승님께서는 왜 나가시는 거지?’
억울함이 한껏 담긴 커다란 눈에 눈물이 번졌다. 두리번거리는 소녀의 모습은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구염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운을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감히 서열 누님을 해칠 생각이냐!”
구염락은 여운이 장서열의 반독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학습의 장이야. 서열 누님이 쫓아내는 게 싫으면 참고 있든지, 아니면 가 버려! 감히 주인에게 반항을 하다니!’
한편, 이를 지켜보던 구염단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최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바마마께서는 걱정 말라고 하셨으나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서풍엽을 어떻게 처단할 것인지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일단 장서열에 관한 일이니 그는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습해라. 내가 스승님을 모셔올 테니.”
말을 마친 뒤 구염단신은 궁녀와 태감을 거느리고 전각을 나섰다. 책을 내려놓은 구염단사가 가련하게 울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또 괴롭힘을 당했군. 장서열, 너는 조금 참을 수는 없는 것이냐?”
장서열은 참지 않고 여운에게 다시금 말했다.
“꺼지라니까!”
여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초혜전 한가운데에서 그런 험한 말을 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구염락은 두말없이 여운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는 작고 말랐지만 신기하리만치 힘이 셌다.
“나쁜 것! 주인이 나가라고 했을 뿐이거늘, 감히 대전에서 소란을 피우고 스승님의 심기를 어지럽히다니! 네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난리만 피우지 않았어도 스승님께서 화가 나서 나가지 않으셨을 거야!”
이건 모두 스승님을 놀라게 한 이 나쁜 계집의 잘못일 뿐, 서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문득 구염락은 자신의 손이 매우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서풍엽의 시종이 여운을 번쩍 들어 던지고 있었다.
문 앞에 선 서풍엽이 차가운 눈빛으로 대전에 있는 모든 이들을 쳐다보았다. 순간 대전이 고요해졌다. 서풍엽이 명령했다.
“윗사람을 거스르는 자는 볼기 스무 대를 쳐 황궁 밖으로 내던져라!”
“네!”
초혜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구염단사는 갑작스런 서풍엽의 등장이 억울했다. 그는 서풍엽을 매섭게 쳐다보며 책상 위 화선지를 북북 찢었다. 장서열을 위해 나서는 사람은 자신이었어야 했다.
한편, 장서열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그는… 뭘 원하는 걸까?’
이 일로 그와 얽히게 되었다.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그에게는 권세를 믿고 까부는 ‘장서열’이라는 이름이 붙어 다닐 것이다. 심지어 그의 지능까지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나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서풍엽이 장서열을 향해 웃었다. 햇빛이 그를 향해 내리쬐었다. 티 없이 맑은 소년의 모습은 장서열의 기분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 정도로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장서열이 따스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꽃이 만개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서풍엽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남녀유별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된 서풍엽의 얼굴을 빨개지게 할 만큼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장서열은 이렇게 반독을 여운에서 열셋째로 바꿨다.
주 대학사는 이 일을 어전까지 끌고 갈 용기가 없었다. 소란을 피워봤자 황제는 자신을 더욱 탐탁지 않게 여길 뿐이었다. 태자는 그가 자연스레 물러나도록 일을 마무리했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반독이 되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는 종일 장서열의 주변을 돌며 어디든 따라다녔다. 만약 가능했다면 그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점심에 장서열의 옷까지 갈아입혀 주려 했을 것이다. 병풍 뒤에서 나온 장서열은 억지로 쓴웃음을 지으며, 궁녀를 통해 구염락이 먼저 점심 식사를 하도록 했다.
궁에는 귀족 자제들이 각각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휴식과 식사가 용이했다. 구염락은 식사를 하라는 말에 놀라서 자신을 가리켰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맞냐는 듯.
장서열은 식사를 차리고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지나치게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몸이 아직 낫지 않았잖아. 만약 네가 또 아프게 되면 누가 나에게 차를 내려주고 물을 따라 주겠어.”
“…….”
“이리 와 앉아. 배가 불러야 활도 잡지. 내 반독이 하찮다는 소리를 듣는 건 싫어.”
구염락은 장서열을 한 번 본 후, 다시 탁자 위의 반찬들을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이었다. 구염락의 얼굴에 감격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붕대로 칭칭 감긴 손을 들어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장서열은 한숨을 돌렸다.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구염락은 거의 머리를 그릇에 처박다시피 했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반찬만 집어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장서열은 소매를 걷고 일어나 그의 앞에 다른 반찬들을 놓아주었다. 그가 한 입 먹으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딱 맞추어 다른 반찬을 집어서 그의 밥 위에 놓아주었다. 모두 그가 평소에 좋아하던 반찬이었다.
밥을 먹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구염락은 그릇에 머리를 깊숙이 박은 채 아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때,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간식을 든 서풍엽이 들어왔다.
“반갑지?”
웃으며 들어오던 서풍엽은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반찬을 집어 주는 모습을 보고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 보였다. 구염락은 급히 마지막 한 입을 밀어 넣은 후, 빵빵해진 두 볼을 들며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으로 물러난 그가 서풍엽에게 인사를 했다.
서풍엽은 구염락을 뜯어 보았다. 분명 자신보다 나은 점이라곤 없었다. 결국 그는 머릿속을 맴도는 비현실적인 생각들을 밀어내며 괜한 상상을 한 스스로를 탓했다.
“녀석, 네가 먼저 먹고 있었구나.”
그러고는 가져온 간식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방금 만든 따끈한 설산떡이야. 서열아, 너도 한번 먹어 봐.”
그제야 구염락의 눈에 줄지 않은 장서열이 그릇이 들어왔다. 좌절한 그는 스스로가 정말 쓸모없게 느껴졌다. 이런 주제에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여운을 욕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