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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4)화 (24/449)
  • 제24화

    장신성은 화가 치밀어 폭주할 것 같았지만 여전히 웃음을 띤 채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했다. 장서열은 떨어져 있어도 원망과 증오로 가득 찬 그의 기분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과거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집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어머니였고 그 다음이 아버지였다.

    전생에서 그녀가 장신성을 의지했던 건 그저 멍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장신성이 자신을 감싸준 것이라 여겼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자신을 차마 꾸짖지 못해 매번 넘어가 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어머니의 진심을 알아채지 못했다.

    장서열은 생선찜의 살점을 한 점 집어 기분 좋게 가시를 발라냈다. 그녀는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어머니께 ‘감히’ 말대꾸하지 못할 테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외숙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버지를 공격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만약 아버지가 어머니와 소란을 일으킨다면 아버지는 그 즉시 종1품에서 4품 관원으로 강등되는, 국공부(公国府)의 위력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장서열은 갑자기 아버지가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줄곧 어머니를 도발하는 데에서 그쳤다. 그리고 끝끝내 어머니로 하여금 고충이 있어도 입 밖에 꺼낼 수 없게 만드는 데 성공했었다.

    나쁜 기억이 떠올랐으나 장서열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기분 좋게 식사를 했다. 이제부터 옛일은 옛일로 흘려보낼 것이다. 그녀에게는 통제 가능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옥언의 시선은 줄곧 딸아이에게 머물러 있었다. 딸의 행동에 감격한 조옥언의 마음속에는 온통 온순한 딸의 모습뿐이었다. 그 딸이 직접 생선 가시를 발라 먹는 모습에 조옥언은 언짢은 표정으로 초 마마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상황에 놀라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초 마마는 부인의 시선에 화들짝 놀랐다. 아가씨가 갑자기 생선찜을 집어들 줄이야.

    식사 후에는 늘 그렇듯 화기애애한 차 시간이 이어졌다. 참석 의사와 관계없이 조 씨의 강경한 요구에 반드시 보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장신성은 딸과의 장난에 몰두하며 상석에 앉은 조옥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옥언은 여전히 다정한 시선으로 딸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인정받았다는 감격에 차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장신성의 마음은 불쾌해졌다. 그녀를 기분 좋게 둘 수는 없었다. 그는 돌연 아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식사 전 그는 만일을 대비해 아들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둔 것이 있었다. 당시에는 쓸모없을 거라 여겼지만 지금은 그 방법뿐이었다.

    아버지의 눈짓에 자신이 맡은 임무를 떠올린 장서전은 즉시 과일을 내려놓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충왕부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요즘 세자의 행동이 지나칩니다. 우리 가문과 별 친분도 없는데, 초혜전에서 계속 서열이가 자신의 정혼자라고 떠들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태자께서 매우 불쾌해 하셨습니다. 황제 폐하와 태자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히기 전에 어찌된 일인지 어머니께서 한번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장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나 죽겠지만 당신 아들이 하는 말이니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

    그러나 딸의 애교에 빠져 있던 조옥언은 아들의 말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는 듯 차를 마신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황제의 심기가 어떻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장서전이 순간 경악한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를 그런 식으로 논하다니……. 그러나 나이 든 초 마마의 표정은 어머니가 마치 바깥의 시정잡배를 논하기라도 한 듯 평온하기만 했다.

    “충왕부와의 혼사는 내가 정한 것이란다. 서풍엽 그 아이는 착하고 영민하지. 충왕비는 어질고 품성이 고우며, 충왕야 또한 성실하고 무던한 사람이라 네 누이동생에게 잘해줄 거야. 그래서 내가 결정했단다.”

    이제 화가 나 죽을 것 같은 사람은 장신성이었다.

    ‘서열이의 혼사를 혼자 결정할 줄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서열이는 내 딸인데, 어렵사리 황실의 총애를 얻었건만 굴러들어온 복을 차다니!’

    그에게 장서열은 미래의 태자비이자 황후였다. 장 씨 가문은 모든 세도가가 바라 마지않는 황실의 외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옥언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장 씨 가문의 번영을 막는단 말인가!

    장신성이 결국 참지 못하고 역정을 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려! 폐하의 금구옥언(金口玉言, 천자가 뱉은 말은 금과 옥 같아서 바꿀 수 없음)을 당신이 어찌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단 말이오!”

    조옥언이 심각한 눈으로 장신성을 탐탁지 않게 쳐다보았다. 그는 장서열을 가장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궁은 불결한 곳이었고, 딸이 그런 곳에 가지 않게 된 것은 복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질책하고 있었다.

    “황제의 금구옥언이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납폐(納幣, 정혼이 이루어진 증거로 보내는 예물)도 아직 받지 않았잖습니까. 이미 오늘 충왕부와 증표를 주고받았습니다. 충왕부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며느리의 옥팔찌를 보내왔어요. 이미 정해진 일을 설마 황제께서 번복하시려고요.”

    장신성은 이 거만한 여자에게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다.

    ‘벌써 납폐까지 주고받다니, 이제 장 씨 가문에서 황후가 나오기는 틀렸단 말인가!’

    장서열의 외모로 태자비가 되지 않는 것은 낭비였다. 또한 자신의 딸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마땅했다. 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그가 말했다.

    “당신이 대체 뭘 안다고 승낙을 하오? 충왕야가 어떤 자인지 모르오?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오! 충왕비는 더욱 말이 안 될 뿐더러, 서풍엽은 어린 나이에 속이 시커먼 아이인데 감히 딸을 그런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하다니. 당신이 도대체 생각이 있는 사람이오!”

    조옥언이 얼른 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장서열이 자신을 악랄한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한다고 오해 할까 두려웠다.

    “서열아, 너 어릴 적에 충왕께서 너를 아주 어여삐 여겼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지. 네 서재의 그림들도 다 그분께서 주신 거란다. 충왕비께서도 너를 많이 예뻐하셨지. 기억 나니? 네가 그 분 머리 위에 있는 비녀를 잡았을 때도 그저 웃으셨잖니.”

    조옥언은 초조한 심정으로 아들딸을 바라보았다. 어렵게 훈훈해진 관계를 다시 차갑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소! 충왕부가 아무리 좋은들 태자와 비교할 수 있겠소? 서열이는 어릴 적부터 태자와 함께 자라온 죽마고우이고, 폐하께서도 서열이를 총애하시오. 딸아이는 앞으로 태자비가 되어 만인의 존경과 추앙을 받을 수가 있는데, 당신은 어찌 딸의 앞길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장서열은 과즙이 풍부한 귤을 하나 삼킨 후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정말 결정된 거예요?”

    동요하지 않는 딸의 모습을 본 조옥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에는 좋은 혼처 같구나.”

    장서열이 귀엽게 웃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보여드리려 수백 번 연습했던 애교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어머니가 그렇게 생각하시면 저도 좋아요.”

    순간 조옥언은 속으로 준비한 모든 말들이 목에 턱 막혔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수건을 눈가로 가져갔다.

    “그래, 그렇구나. 착한 내 딸.”

    흥분한 장신성이 장서열을 마치 낯선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너는 태자비가 되어야 한다! 그 사실을 까먹은 것이냐? 천하의 모든 여인들이 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할 텐데 그게 싫다는 것이야!”

    장서열은 수도 없이 많은 절을 받아봤으나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상관없어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조옥언이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장신성을 가리켰다.

    “도대체 서열이에게 무슨 말을! 뭐가 좋다고 딸에게 태자비가 되라는 거예요? 황궁이 어떤 곳인데, 말리지는 못할망정 되려 딸아이를 그곳에 밀어넣으려 하다니! 당신 딸을 몰라서 그러세요? 그렇게 태자비를 원하면 왜, 장서영을 들여보내시지요!”

    장신성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장서열과 충왕부의 정혼은 그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 만약 장서열이 태자와 혼인하지 못한다면, 그가 수년 동안 고개를 숙여온 건 다 무엇을 위해서 였단 말인가.

    “누구는 안 그러고 싶은 줄 아오? 서영이는 그럴 신분이 아니잖소! 당신은 후회하게 될 거요, 분명 후회할 거라고!”

    말을 마친 장신성이 소매를 뿌리치며 나갔다.

    ‘괘씸한 것 같으니!’

    “여봐라! 기 씨를 별채에서 데려와라!”

    말을 마친 장신성이 빠르게 정원을 빠져나갔다. 밖에서는 여전히 그의 훈계 소리가 들려왔다.

    조옥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두려워졌다. 딸을 입궁시키려 하다니. 도무지 장신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궁이 어떤 곳인지 모른다. 그 해에… 스스로 영민하다 자부했던 자신조차도 그자들에게 당했다.

    그녀는 과거의 일을 회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었다. 멍청하게도 그녀는 한 남자의 사랑이 자신을 평생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수녀 선발의 첫 번째 관문도 통과하지 못했다.

    조옥언이 비단 같이 고운 손으로 손수건을 꽉 쥐었다. 그녀는 과거의 억울함을 누르며 놀란 딸과 아들을 바라보았다.

    “괜찮다. 홍촉은 아가씨와 도련님께 간식을 가져다 드려라.”

    장서열은 꽉 쥐어 곧 피가 날 것 같은 어머니의 손바닥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 그 손을 꽉 잡아주었다.

    “어머니,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꽉 쥔 손을 풀어주었다. 당당한 어머니는 절대 고개 숙이지 않는 분이었다. 자신의 전부를 걸어 자식들을 지켰고, 구염락이 제위에 오르며 자신의 입지가 점점 좁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처형을 막기 위해 서북 장군과 충왕에게 간청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어머니…….”

    조옥언이 딸을 안아주었다.

    “착하지, 울지 마라. 어미는 아버지와 다툰 것도 아니고 화도 나지 않았다. 서열아, 너는 태자비가 되고 싶으니?”

    그녀가 조심스럽게 딸을 바라보았다. 버들잎 같은 눈썹과 아름다운 얼굴, 작고 총명한 딸아이는 분명 보기 드문 미인으로 자랄 것이다. 장서열은 급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요. 저는 어머니 말을 들을 거예요. 충왕부도 좋아요.”

    그제야 조옥언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듯 장서열의 어깨에 얹은 손은 부드럽고 나약했다.

    “그래, 착한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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