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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3)화 (23/449)
  • 제23화

    시간이 지날수록 구염락의 몸에 꽂히는 침의 숫자도 점점 많아졌다. 침을 놓을 때 그는 가끔씩 약한 신음을 내곤 했다.

    장서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 태의 역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환자의 열이 떨어지고 염증이 난 상처 부위도 더 이상 악화되지 않자 그는 다시 칼을 들고 손상된 부위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프잖아.’

    서열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자네, 마취약을 사용하지 않았어.”

    호 태의는 어리둥절했다. 물론 마취약을 사용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호 태의에게 그는 신형사에서 고문을 받은 죄인이었다.

    ‘가능한 빨리 처리해버리는 게 낫지, 죄인의 편의까지 봐줘야 한단 말인가?’

    호 태의가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서풍엽이 말했다.

    “마취약을 사용해라.”

    아울러 그가 선의로 덧붙여 일러주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이는 열셋째 전하이시니 각별히 주의하도록.”

    순간 호 태의의 손발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제의 윤허 없이 황자를 찌르다니! 그는 전하의 몸에 꽂은 침을 모두 뽑고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외칠 수 없는 게 한스러웠다. 열셋째가 아무리 황제에게 버림받은 황자라 해도, 자신이 치료하는 도중에 불상사가 발생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장 씨 가문의 아가씨는 그를 죽이려는 건가? 어쩐지 그녀를 모시던 태의들은 하나같이 명이 길지 못하더라니…….’

    호 태의는 이제껏 장서열을 모시게 된 것이 기막히게 좋은 일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아직도 약을 안 쓰고 뭐하느냐!”

    “예, 예!”

    호 태의는 생각을 멈추고 허둥지둥 약상자에서 약을 꺼냈다. 한편, 문 밖에는 곽 공공이 안절부절 못하며 서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세자까지 온 거지? 그는 여태껏 열셋째에게 흥미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게다가 장 씨 가문의 아가씨는 대체 왜 옥패까지 푼 거야?’

    곽 공공은 장 씨 가문의 아가씨가 열셋째에게 ‘화풀이’를 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도와주러’ 온 것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만약 후자라면 큰일이었고, 자신을 지킬 방법을 생각해 놓아야 했다.

    ‘그래! 이번에 도적놈을 때린 건 내가 아니고 사황자다! 죄를 묻는다면 직무를 태만히 한 도적놈의 궁녀, 태감에게 묻게 될 것이다. 안뜰에서 시중을 드는 내가 어찌 바깥일까지 알 수 있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곽 공공은 마침내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그는 사람을 시켜 재빨리 정원을 청소하게 하고, 구염락의 방을 사람 사는 곳처럼 꾸미라고 지시했다. 그는 황제가 물어볼 수도 있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꼬마야, 이번 일이 지나가면 이 어르신이 널 어떻게 혼내는지 두고 봐라!’

    구염락이 기거하는 남소원(南小院)은 갑자기 잡초를 베고 벌레를 잡는 이들로 분주해졌다. 잡은 벌레는 나중에 그를 괴롭힐 용도로 통에 잘 보관해 두었다. 그 밖에도 이불을 깔거나 방을 쓸고 가구를 옮기는 사람들로 소란이 일었다.

    곽 공공은 좋은 가구들이 자신의 방에서 본채로 옮겨지는 것을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가구보다 중요한 건 목숨이라고 스스로를 계속 타이르며, 당장이라도 짐을 옮기지 못하게 덤벼들고 싶은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다.

    서풍엽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뜰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힌 곽 공공이 웃는 얼굴로 그의 곁을 재빨리 지나갔다. 서풍엽은 그의 잘못을 들출 생각이 없었다. 그저 하늘에 뜬 태양을 보면서 오후 수업을 놓치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오래 서있어도 물 한 잔 따르는 사람이 없구나.”

    세자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돌연 그의 주변에 여섯 개의 손과 세 잔의 물이 더해졌다. 서풍엽이 그중 가장 좋은 잔에 담긴 것을 골라 기분 좋게 곽 공공에게 건넸다.

    “어서 아가씨께 갖다 드리지 않고 뭐 하느냐.”

    “예, 예.”

    한 시진 뒤, 호 태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 아가씨. 제때 치료를 한 덕분에 열셋째 전하의 상황은 매우 안정되었습니다. 소인이 약 몇 첩을 더 처방할 터이니 몸조리를 잘해 풍한이 들지 않게 하고 상처가 곪지 않게 하면 곧… 곧 문제없을 겁니다.”

    그는 마침내 임무를 완수했다. 장서열이 침대에 누워있는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붕대를 칭칭 감은 얼굴은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굳게 감긴 두 눈만 보였다. 장서열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에게 무의식적으로 다가갔다. 구염락의 꽁꽁 싸맨 손을 잡았다가 다시 급히 놓은 그녀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긴 자네에게 맡기겠어. 만일 열셋째 전하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자네도 무사하지 못 해. 하지만 열셋째 전하가 낫는다면 황제 폐하께 고해 큰 상을 내리도록 하지.”

    호 태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그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장서열을 바라보다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호 태의는 무슨 말이든 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장서열이 오후 수업을 빼먹었어?

    ―서열이 도적놈을 찾아갔다고?

    ―서열이 도적놈을 치료하기 위해 태의를 불렀다던데.

    ―대체 무슨 생각이래? 그 도적놈을 죽이려는 황자들과 맞서겠다는 거야?

    장서열이 없는 학당에서는 그녀의 결석에 대해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렸다.

    초혜전으로 돌아가지 않은 장서열은 그대로 남소원에 있다가 수업이 끝나는 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장서전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그는 누이동생에게 대체 왜 열셋째를 위해 태의까지 불렀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두운 그녀의 안색에 차마 묻지 못한 채 한마디만 남겼다.

    “우선 돌아가서 씻어. 이따가 어머니께 함께 인사드리러 가자.”

    “응.”

    상부의 뜰에 등롱이 매달렸다. 옷을 갈아입은 장서열은 단장한 뒤 본채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며 작은 돌다리 아래 흐르는 물과 날렵한 처마를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아가씨, 계단을 조심하세요.”

    본채에 도착한 그녀는 안에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목소리에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

    “서열을 탓하지 마시오. 아직 철이 없는 아이니 천천히 가르치면 될 것이오. 사사로이 태의를 부른 건 잘못이나 측은한 마음에 별 생각 없이 그런 것일 게요…”

    “……”

    “그렇게 정색하지 말라니까. 사소한 일이잖소… 그렇소, 어제 우승의 딸을 때린 일과 오늘 제멋대로 초혜전을 나가 호 태의를 부른 일은 별개의 일이오. 됐소, 말로 당신을 어떻게 당하겠소?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합시다. 금족령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소. 또 벌해선 아니 되오.”

    * * *

    문 밖에 서있던 초 마마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뜰에 서있는 큰아가씨를 전전긍긍하며 바라보았다. 아가씨와 사이가 좋아진 부인은 온종일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겨우 이런 일 때문에 아가씨와 부인의 사이가 다시 멀어져서는 안 되었다.

    처마 밑에 선 장서열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손에 든 비단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초 마마는 초조한 마음으로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서 또 사고를 치셨구나! 이 일로 부인께서 아가씨를 꾸짖으시면 어쩐다. 나리도 참 너무하시지. 아가씨 편도 정도껏 들어야지 그렇게 구구절절 늘어놓으면 아가씨의 잘못만 더 강조하는 꼴이구나!’

    장신성의 말이 길어질까 조심스럽게 장서열의 눈치를 살피던 초 마마는 의아함을 느꼈다. 아가씨에게서 평소 부인을 뵐 때 보이던 두려움과 상야 어른을 향한 어리광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가씨… 들어가시죠.”

    장서열이 걸음을 옮기자 문 밖에 있던 시녀가 얼른 아가씨의 도착을 알렸다. 방 안은 한바탕 분주해졌다.

    저녁식사는 이미 차려져 있었다. 말석에 가깝게 앉아 있던 장서전은 어머니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얼른 자신의 옆에 앉으라고 누이동생을 향해 눈짓했다. 그리고 장신성은 딸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부랴부랴 그녀를 품에 안은 뒤 자신의 옆자리에 앉게 했다. 보배 같은 딸에게 불호령이 떨어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그는 상석에 앉은 부인을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장신성의 손길에 이끌려 그의 등 뒤에 숨은 장서열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벌인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굳이 어머니께 상기시키는 걸까. 기 씨가 별채로 보내지니 마음이 조급하시겠지. 사랑하는 여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머니를 자극할 속셈이군.’

    장서열은 아버지께서 이렇게 연기하기를 좋아하시니 장단을 맞춰드리자 생각했다. 그녀는 장신성이 한눈을 판 사이 미소를 머금고 어머니를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얼른 다시 정색을 한 후 아버지가 감싸는 착한 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홍촉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이내 목청을 가다듬고 똑바로 자리에 섰다.

    깜짝 놀란 조옥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의 미소를 얼굴에 드러냈다. 딸아이는 이제껏 한 번도 그녀에게 이렇듯 은밀한 신호를 보낸 적이 없었다. 방금 전 그녀는 자신이 딸아이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모녀 사이의 교류는 그동안 딸아이와 가까이 할 기회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조 씨에게 꿀처럼 달콤한 기분을 선사했다.

    ‘역시 딸아이가 내게서 멀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진작부터 알았지.’

    그녀는 장서열이 궁에서 저지른 사소한 잘못은 이미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난 날 황제가 자신의 딸을 궁에서 가르치겠노라 끝끝내 우겨서 기어이 데려갔을 때의 그 상황이 탐탁지 않았을 뿐이었다. 딸아이가 그런 위선적이고 책임감 없는 자와 가까이 있는 것이 싫었다.

    조옥언이 장서열을 꾸짖지 않자 장신성은 다시 쭈뼛거리며 부인의 안색을 살폈다. 부인에게서 딸을 혼낼 기색이 없자 그는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그 사실을 다시 ‘일깨워’ 주기로 했다.

    “서열아,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니? 스승님께서는 네 공부를 잘 봐주시던? 오늘은 충왕부의 세자가 널 잘 돌봐줬다고 전해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니?”

    그는 미래의 태자비가 서풍엽과 한데 어울려 놀았다는 것을 조옥언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조옥언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식사할 때는 말을 삼가야 하는 법입니다.”

    장서전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입 속으로 우걱우걱 음식을 욱여넣었다. 그 말에 눈에 불꽃이 튈 정도로 성이 난 장신성은 언짢은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다가 딸아이가 웃는 모습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혼인 후 십 년 만에 한림원(翰林院) 6품 관원에서 종1품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비천한 학자부터 조정의 중신들까지 그 누구도 그에게 감히 규칙을 거론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은 일찍부터 비천한 서자들이 보고 배울 표본이었고, 그의 재능과 학식은 누구나 앞다투어 모방하려 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오직 조옥언 앞에서 그는 언제나 비천한 출신일 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말로 그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다른 사람과 정을 통하다 버려진 공국부(公国府) 아가씨 주제에 감히 내 앞에서 거만하게 굴 자격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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