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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1)화 (21/449)
  • 제21화

    “태자 오라버니, 화났어요? 태자 오라버니는 군주이고 세자는 신하인데, 군주가 신하에게 화를 낼 필요 있나요. 태자 오라버니가 정색을 하니 세자가 괜히 장난쳤을 거예요.”

    장서열의 말에 구염단신은 기분이 좋아졌다. 연경의 미남자인 서풍엽이 한참이나 떠들었건만 당사자가 동요하지 않자 분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하하, 서열이는 참 영리해. 역시 이 몸의… 누이동생이라니까.”

    서풍엽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오히려 멍청한 사람은 자신인 것 같았다. 설마 그동안 모두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장서열은 줄곧 초혜전의 모든 사람을 농락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장서열은 새벽 수업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또한 서풍엽과 태자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서풍엽은 잠시 스쳐 지나갈 사람이었고 전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오전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거의 두 장 분량의 글씨를 쓰며 줄곧 밖을 내다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먹물이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우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뒤에 있던 벼루를 가져왔다. 옅은 회색 옷을 입은 몸종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장서열이 가져간 벼루를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그가 오전 내내 열심히 갈아 놓은 먹이었다.

    ‘곧 있으면 공자님이 돌아오실 텐데!’

    벼루와 먹물이 사라지는 것을 본 몸종은 콧물을 훌쩍이며 왼손으로 잡았던 먹을 오른손으로 옮긴 후 먹을 가는 속도를 높였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장서열은 붓을 내려놓았다. 손목이 부들부들 떨렸다. 답답한 마음에 뒤를 돌아봤지만 역시 구염락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학당이 유달리 조용하게 느껴진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결석은 평소의 구염락답지 않았다.

    ‘왜 안 왔을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긴장한 장서열이 빠른 걸음으로 사황자 구염단사에게 다가갔다. 구염단사는 급하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고 숨 쉬는 것도 잊었다. 곁에 있던 이가 밖에 나가 놀자고 말했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열셋째는?”

    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구염단사는 험악하게 입을 열었다.

    “몰라!”

    화가 난 사황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떠나려 했다. 장서열이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그녀의 눈에 걱정하는 빛이 가득했다.

    “넷째 전하, 정말로 몰라요?”

    어째서 수업에 나오지 않은 걸까? 기어서라도 수업에는 꼭 나오던 아이인데… 설마 기어올 수도 없을 정도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장서열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사황자의 소매를 잡았다. 구염단사는 도저히 그녀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허나 그녀가 묻고 걱정하는 건 다름 아닌 그 도적놈이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난 그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죽었는지도 모르지!”

    말을 마친 그는 장서열과 눈이 마주칠 세라 급히 자리를 떠났다. 만일 장서열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순간 그는 지난밤 열셋째를 때렸던 자신의 행동에 화가 났다.

    장서열은 초조해졌다. 치맛단을 손에 쥔 그녀가 궁을 향해 달려갔다.

    ‘그에게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여운은 장서열을 따라 가려 했지만 장서열과 달리 그녀는 초혜전 이외의 장소에는 발을 들일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발을 구르며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정말 귀찮게 하네. 점심인데 가만히 있지 않고 돌아다니다니!’

    * * *

    장서열은 기억 속의 금지 구역으로 향했다. 영덕황제가 즉위한 뒤 주로 모임을 가졌던 장소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지만 전각 밖에서 구염락을 기다렸다가 함께 처소로 돌아가곤 했다.

    ‘그는 어떻게 된 걸까.’

    그녀는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갔다.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쉬지 않고 달린 탓에 호흡이 가빠졌다. 궁벽을 따라 마지막 궁문을 돌자 마침내 미래의 ‘정심전(静心殿)’ 터가 보였다. 아직은 정자나 누각도, 무기와 갑옷도, 그리고 군사들도 없었다. 지금은 그저 잡초와 풀이 문을 거의 가릴 정도로 허름한 정원일 뿐이었다.

    그녀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야 비로소 문 밖을 지키는 소 태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궁은 매년 여기저기를 수리하고 있기 때문에 문은 많이 낡지는 않았지만, 그 위로는 거미줄이 가득했고 여기저기 얼룩져 있었다.

    장서열은 예상했다는 듯 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그녀는 퇴락한 정원과 잡초가 무성한 마당, 무너진 처마 정도가 있을 거라 상상했을 뿐, 이런 광경을 마주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허리까지 올라온 잡초들이 바람 한 점 통하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온 뜰 안을 점령하고 있었다. 잡초들은 손목 굵기만 했고, 그 위를 최소 십 년은 된 것 같은 단단한 가시덤불과 톱니 모양 덩굴이 휘감고 있었다. 온 마당을 차지한 잡초 사이를 지나려면 틈 하나 없는 가시덤불을 뚫고 가야했다.

    장서열은 마음이 시큰해져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건 그녀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염락은 이제 겨우 다섯 살이었다. 다섯 살 아이가 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황제에게 이렇게 미움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몸에 걸친 것이 새 옷인 것도 잊은 채 그녀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돌연 발밑에 무엇인가 밟혔다. 잡초인가 싶었으나 지나치게 푹신했다. 황급히 발을 떼자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무성한 덤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것들은 두렵지 않았다. 보다 보면 오히려 사람보다 쉬운 것들이었다. 계속 걸어가려던 찰나, 갑자기 알록달록한 거미 한 마리가 가느다란 거미줄을 타고 내려와 그녀의 머리 위로 기어올랐다. 그녀의 입가에 냉소가 피어났다.

    ‘비열한 수법이군.’

    모두 독성이 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것들이었다. 누군가 구염락을 천천히 괴롭히며 죽일 속셈인 듯했다. 흔한 일이었다. 궁에는 주인에게 구박 받은 후 힘없는 자를 찾아 그 분노를 쏟아내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변태가 많았다.

    돌연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 눈도 안 달린 개차반이 이 어르신의 단잠을 방해하느냐! 이 몸은 지금 손님을 받지 않는다. 손이 근질근질하면 오후에 와라. 지금 당장 죽음을 자초하지 말고…….”

    늙은 곽 공공은 말을 멈추고 화들짝 놀라 땅에 엎드렸다. 그가 이마 가득 땀을 흘리며 재빨리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노, 노비, 아가씨께 인사 올립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노비가 사람을 잘못 알아봤습니다. 비천한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노비는 죽어 마땅합니다. 부디 은혜를 내려주시어… 용서를……. 살려주십시오!”

    장서열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손을 뿌리치며 걸어갔다.

    “내가 나오기 전까지 뜰을 깨끗이 정리해라. 안 그러면 널 여기 잡초처럼 이곳에 심어 주마!”

    “아가씨,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조심하세요!”

    곽 공공이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움츠렸다.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란 말인가. 장 씨 가문 아가씨가 오다니!’

    “여봐라! 어서, 어서 아가씨께 길을 안내해 드려라! 소구자(小狗子)야! 귀가 먹었느냐! 어서 뜰을 깨끗하게 청소해라! 주인께서 오셨는데 감히 나와서 맞이하지 않다니, 죽고 싶으냐! 네 명줄이 긴 줄 아느냐? 어서 물을 끓여 아가씨께 드릴 차를 우려내어라. 소리자(小李子)는 어딜 갔느냐! 빨리 가서 주인의 시중을 들라 하라!”

    작은 뜰이 순식간에 북적이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태감들이 튀어나와 물을 뜨고 뜰을 닦으며 청소를 시작했다. 그제야 곽 공공은 이마의 땀을 닦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는 황제 폐하께 사랑받는 장 씨 가문의 아가씨도 구염락에게 엄한 분노를 쏟아내기 위해 온 것이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 장작을 쌓아 놓은 낡고 허름한 방은 곰팡내가 풀풀 풍겼다. 좌측 상단 구석의 격자무늬 창문은 열려 있었고, 널빤지 두 개를 겹쳐 만든 침대는 초라했다. 침대에는 두툼한 볏짚이 울퉁불퉁하게 깔려 있었는데 그중 높게 솟아오른 곳은 베개인 듯했다.

    방 안에는 침대 외에도 다리 하나가 없는 책상이 하나 있었다. 기울어지지 않도록 나무를 괴어 놓은 책상 위로 이미 꺼진 등잔이 보였다. 광명정대한 궁에 위치한 게 아니었다면 이곳은 감방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곳에 비하면 신형사는 호화로울 지경이었다.

    작고 앙상한 체구를 가진 이 공공(李公公)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찬물에 적신 수건을 힘겹게 짜서 어린 주인의 이마에 얹어주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구염락은 밤새 열에 시달린 듯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달리 입가는 창백했다. 온몸에는 핏자국이 얼룩덜룩했고 입은 퉁퉁 부어 있었으며 눈썹은 본래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

    소리자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전하, 말씀하지 마시고 쉬세요. 푹 쉬세요.”

    다시 말소리가 잦아들자 소리자는 그제야 다시 소리를 죽이고 흐느꼈다. 전하는 황자였지만 태감인 자신보다 훨씬 불쌍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리자가 눈물을 닦고 볏짚을 엮어 만든 이불을 끌어당겨 주인을 덮어주었다. 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돌아왔느냐. 붓기가 가라앉게 약초를 씹어 전하의 다리에 붙여드려라.”

    “…….”

    “어서.”

    문 앞의 사람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소리자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깜짝 놀란 그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쿵 머리를 찧으며 절했다.

    “아가씨! 노비는 아가씨가 오신 줄 몰랐습니다! 노비를 때리십시오. 노비를 때리세요……. 열셋째 전하께서 앓고 계신데 노비는 사지 멀쩡하고 건강하니 차라리 맞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아가씨, 노비를 때려 주십시오, 제발 때려 주세요…….”

    장서열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소리자는 바닥에 힘껏 머리를 찧으며 자신의 몸에 통증이 더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별안간 그의 눈앞에 한 줄기 향기로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소리자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그녀가 열셋째 전하의 이마에 올려 둔 수건을 물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물기를 꼭 짠 뒤 이마에 덮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소리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늘하늘한 옷감이 눈부신 빛을 발산해 그의 시선을 흐리게 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누가 열셋째 전하를 불쌍히 여기겠는가.

    “어찌 열이 이리 높은 것이냐? 태의는 왔다 갔느냐?”

    장서열의 물음에 소리자가 놀라서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꽃신 위에 장식된 돌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이제껏 그렇게 예쁘게 생긴 돌을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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