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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0)화 (20/449)

제20화

전생의 일을 떠올린 장서열은 화장대 위에 놓인 비녀를 꽉 움켜쥐었다. 옥같이 희고 아름다운 손에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다시금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냉궁의 총관 태감이 이제 막 관리가 된 ‘그’가 아닌 교활한 자였다면 아마 자신은 마지막 남은 존엄도 지켜내지 못했을 거라고, 그녀는 가끔씩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가 의지할 수 있었던 건, 그녀에게 단 하나 남은 외모뿐이었다.

냉궁의 총관 태감이었던 그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정신이 나간 그녀가 아무리 발로 차고 때려도, 정신이 돌아온 후 아무리 노려보아도, 그는 시종일관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고 따뜻하게 발을 데워주었다. 그녀가 강물에 뛰어 들자 그는 초조해 했고, 벽에 머리를 부딪쳐 피를 흘릴 때는 흐느꼈다. 망연자실한 그녀를 위로해준 것 역시 그였다.

순간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그녀가 몸을 돌려 장신구함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고정하세요, 아가씨!”

“부디 고정하세요!”

내동댕이쳐진 진주와 금비녀가 바닥에서 튀어 오르자 그녀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매섭던 눈빛은 점차 평온해졌고 표정은 누그러졌다. 장서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치워라.”

인생에서 마지막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자존감이 짓밟혀 부서졌던 과거를 증오해야 할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간담이 서늘해진 초 마마가 잠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아가씨의 성미는 갈수록 종잡을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양칫물을 받쳐 들고 있던 농교는 처음 상부 저택에 오던 날, 아가씨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이전부터 시중을 들던 언니를 때려죽인 사실을 떠올리며 작은 몸뚱이를 오들오들 떨었다.

“되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농교를 본 장서열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장서열은 현재 자신의 모습이 구염락보다 더 비틀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화를 냈다가 곧바로 자신이 왜 화를 냈었는지 어리둥절할 리 없었다.

“약을 잘 챙겨 둬. 이따 궁에 가져갈 거야.”

“예, 아가씨…….”

* * *

햇볕이 전신을 내리쬐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연경의 공기는 평화로웠다. 주변을 가득 메운 새소리와 꽃향기가 느껴졌다.

장서열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청석판이 깔린 길을 지나 붉은 기와가 덮인 높다란 궁벽 문을 통과했다. 사계절 내내 지지 않는 꽃들이 양 옆에 가득 피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 길의 끝에 태자가 있었다.

‘제대로 느껴보지 못하고 흘려보낸 인생이 이토록 아름다웠다니.’

구염단신이 염자(帘子, 발, 커튼)를 걷어 올린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태자의 팔에 손을 얹으며 황실의 모든 이들을 노비로 부리고, 높은 곳에 앉은 이들을 발로 밟아버리는 통쾌한 상상을 했다.

이어 사치스러운 마차 한 대가 그녀의 옆에 섰다. 밝은 달처럼 청명한 눈을 한 아이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모습은 햇살 아래 선 장엄한 궁전보다 훨씬 준수했다.

장서열은 가늘게 뜬 눈으로 서풍엽을 바라보다가 이내 감상을 마친 사람처럼 뒤돌아 태자의 손을 짚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본 서풍엽이 하하 웃었다.

‘어린 아가씨가 힘이 넘치네. 성격만 좀 고치면 되겠군.’

“서열이와 태자 전하시군요. 이런 우연이.”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장서전이 즉시 화를 냈다.

“나는 안 보여?”

물론 그가 누이동생과 같은 마차를 탄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서풍엽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를 어루만지듯 장서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지. 얌전히 있어.”

‘이렇게 철없는 손위 처남이라니, 부담되는군.’

“죽고 싶어! 감히 이 몸의, 이 몸의 머리를……!”

서풍엽은 못 들은 척 한 손으로 장서전의 공세를 막아내다가 이내 재빠르게 벗어났다. 유쾌한 웃음을 지은 그가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어떤 위해도 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녀의 손이 어제 그 놀라운 화살을 쏘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서풍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은 아직 장서열이 반할 만큼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서열이는 언제 봐도 눈이 부셔서 흠모하는 마음이 생겨. 내게 곁에서 시중들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겠어?”

동시에 그는 다시 치고 들어오는 장서전의 공격을 한 손으로 막아냈다. 장서열을 응시하는 그의 반짝이는 두 눈이 말하고 있었다.

‘네 오라버니를 다루는 모습이 어때? 설레지 않아?’

장서열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태자를 바라보며 훗날의 ‘냉면왕(冷面王, 냉담하고 무정한 표정을 짓는 충왕 서풍엽의 미래 별명)’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태자의 지위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

구염단신은 굉장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세자, 요즘 왜 그러는 거지? 초혜전에서 나가고 싶으냐?”

서풍엽은 장서열의 손을 잡아끄는 태자와 그들 모두를 바보 취급하는 장서열의 눈빛을 번갈아 바라보며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요. 저는 단지 제 약혼녀의 시중을 들고 싶었을 뿐입니다. 후에 아내가 저를 미워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힘들 테니까요.”

“닥쳐라!”

분노한 구염단신이 서풍엽을 향해 외쳤다.

“허튼소리! 어렸을 때부터 황제께서는 서열이를 태자비로 정해놓으셨다!”

서풍엽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부드럽게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성지(聖旨)도, 정례(定礼, 정혼이 이루어진 증거로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보내는 예물)도 없지 않습니까. 장 부인(章夫人, 장서열의 어머니)의 의사는 물어보셨습니까?”

“…….”

“태자 전하, 사실 장 부인과 제 모친께서는 이미 정혼을 약속하는 증표를 주고받았습니다. 장 부인께서 말씀하시길, 우둔한 서열이를 태자비로 보내 전하를 욕보일 수 없다 하시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그 욕을 보기로 했지요.”

서풍엽이 진지한 얼굴로 구염단신을 바라보았다. 화가 나서 깊은 숨을 들이마시던 구염단신은 마음속에 어렴풋한 불안을 느꼈다.

“말도 안 돼!”

장 부인이 자신과 장서열의 혼사에 줄곧 묵묵부답인 건 사실이었다. 허나 아바마마의 명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다. 황제께서 장서열을 두고 태자비라 하셨으니, 틀림없이 그렇게 될 터였다.

장서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서풍엽은 그동안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일부러 자신을 이용해 태자의 미움을 살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혼담이 오갔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 분명했다.

장서열은 서풍엽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는 역대 충왕부를 통틀어 천지개벽 수준의 ‘국보급 보배’였다. 훗날 두 명의 공주는 서풍엽으로 인해 출가를 하게 될 것이고, 세 명의 공주는 서로 물고 할퀴는 전쟁을 벌일 예정이었다. 또한 그는 영자득(嬴者得, 이기는 자가 받는다.) 언론으로 대주국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장본인이었다.

당시 장서열은 측비와 다투느라 서풍엽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녀가 기억하는 건 서풍엽이 모든 이들을 하나로 단합시켰으며, 대군을 이끌고 그의 하인을 모욕한 모국(慕国)을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모국은 친히 사절을 파견하여 충왕부의 문지기에게 사과했다. 그 밖에도 그는 인생을 놀이 삼아 사는 사람답게 청루와 유곽을 제 집 드나들 듯했으며, 투계(닭을 싸우게 하여 승부를 겨루는 것) 등에도 정통했다.

장서열은 발그레한 볼에 생기가 넘치는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저 소년이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지 못하고 학식이 깊지 못한 충왕야의 아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어머니가 충왕부와 가까운 사이였던가? 왜 서풍엽과 정혼을 맺은 거지? 여자가 많은 것도 태자보다는 서풍엽 쪽일 텐데.’

서풍엽은 장서열을 향해 눈썹을 치켜세웠다.

“네가 생각하기에 나에게 고쳐야할 점이 있다면 지체 없이 말해. 원한다면 즉시 고칠게.”

“그만 해라! 폐하께서 결정하실 문제다!”

구염단신이 장서열을 데리고 가자 서풍엽이 황급히 그 뒤를 쫓으며 크게 소리쳤다.

“태자 전하, 제 약혼녀를 데리고 어디 가십니까! 그녀는 아직 어리니 속이면 안 됩니다. 소인의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죠!”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자 그는 더욱 신나서 소리쳤다. 화가 난 구염단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아직 제왕학의 중용사상도 체득하지 못한 구염단신에게 이렇게 노골적인 도전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난생 처음으로 받은 도전이 하필이면 그의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라 더욱 기분이 불쾌했다. 그는 치미는 화를 꾹꾹 참으며 주변에서 구경하는 이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뒤에서 달려오고 있는 서풍엽을 향해 소리쳤다.

“세자, 네 신분을 생각해 입을 무겁게 해라.”

“저는 평소 많이 먹어서 몸이 무거운 편입니다. 아, 전하의 말씀이 맞아요. 앞으로 더 많이 먹어서 무거운 몸으로 사람들을 압도하겠습니다.”

장서열은 서풍엽의 거침없는 대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황실 자손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서풍엽의 배짱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오라버니가 같은 행동을 한다면 죽기를 자청하는 일이 되겠지만 서 씨 가문 사람은 달랐다. 그가 아무리 큰 불경을 저지른대도 아직 나이가 어려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말 한마디면 용서가 된다.

서풍엽의 눈은 찬란하게 빛나는 장서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내 말에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까?’

구염단신은 서풍엽을 눌러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충왕부의 사람임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힌 뒤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한 번만 더 그 입을 열면 바로 충왕부로 돌려보내겠다!”

서풍엽이 불쌍한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봐, 난 너를 위해 태자께 미움을 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서열은 오히려 가슴이 뭉클해져 구염단신을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태자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충왕부의 세자와 충돌했고, 그녀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비록 태자는 황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서풍엽은 장서열의 눈빛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무래도 남 좋은 일만 시킨 것 같았다.

뒤따라 온 장서전은 그 모습을 보며 과연 자신은 세자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한편 장서열은 서풍엽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 혼사는 오직 두 가지 길뿐이었다. 구염단신의 태자비가 되거나, 구염락의 황후가 되는 것.

무엇보다도 그녀는 서풍엽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전생에서 어머니는 딸을 서풍엽과 혼인시키려 했지만 그녀가 이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아 결국 흐지부지 되었던 듯했다. 아마 이번 생도 같을 것이다. 며칠 뒤면 이 혼사는 파기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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