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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9)화 (19/449)

제19화

장서열은 스스로 얼굴을 때리는 구염락을 끌어당겨 자신의 등 뒤로 감싼 뒤, 화가 나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애써 심호흡을 한 그녀의 목소리는 예상 외로 부드러웠다.

“오라버니, 시간이 늦었어요.”

무슨 말을 하려던 장서전은 표정과 상반된 누이동생의 말투에 놀라 그녀의 눈치를 보며 답했다.

“그래.”

장서열은 뒤를 돌아 망연한 얼굴로 구염락을 바라보다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유년 시절이 이렇게 힘들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 너도 얼른 돌아가. 오라버니가 나쁜 마음으로 때린 건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그녀는 구염락이 오라버니에게 원한을 품게 될까 두려웠다. 장서전은 정말 사정없이 그를 때렸다. 황송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구염락이 들쭉날쭉한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괜찮아요. 장 도련님도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을 거예요.”

장서열은 할 말을 잃었다. 비천한 구염락, 패권을 장악했던 구염락……. 그녀에게는 입이 무겁고 마음이 독하며 악랄했던 구염락이 익숙했다. 그때의 그는 적어도 이렇게… 불쌍해 보이지는 않았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시중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기뻐서 입이 귀밑까지 벌어진 구염락은 장 씨 가문의 마차가 큰길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나서야 뒤돌아섰다. 그의 앞에는 대여섯 명의 황자들과 스무 명도 넘은 태감들이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감히 나서서 아첨을 해?’

구염단사가 못된 미소를 지었다.

“때려라! 때려 죽여도 상관없다!”

* * *

마차가 궁을 나서자 장서열은 즉시 오라버니의 손을 뿌리치고 서릿발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서전은 누이동생이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그를 또 괴롭힌 거야!”

장서전은 그동안 누이동생에게 불필요한 동정심이 생긴 거라 믿으며 딱히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동생이 우울해하고 마음 아파하는 모습까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열아, 대체 무슨 일인지 오라버니에게 말해 줄래? 넌 누군가를 위해주는 사람이 아니야. 아무리 그의 시중이 받고 싶었다 해도 이 오라버니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그러지는 않았을 테지. 하지만 넌 이미 두 번이나 내게 그의 원한을 사지 말라고 경고했어. 네가 그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

장서전은 여느 때와 달리 총애가 넘치는 얼굴이 아닌, 걱정스런 얼굴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오라버니의 사랑에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앳된 미간을 어루만졌다.

‘오라버니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의기양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에 짓눌려 무릎 꿇지 않고, 두려움 없이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 수만 있다면…….’

당황한 장서전이 부리나케 누이동생의 손을 부여잡고 애타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울지 마, 서열아. 응? 울지 마. 오라버니가 다시는 그 애를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정말이야.”

그는 초조하게 누이동생을 껴안으며 이어 말했다.

“널 놀라게 하다니, 오라버니가 잘못했어. 넌 천성이 착해서 남이 괴롭힘 당하는 걸 차마 볼 수 없는 거야. 네가 걱정하지 않도록 다시는 때리지 않을게. 그러니까 그만 울어.”

장서열은 더욱 슬프게 울었다. 어느 날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 눈앞의 모든 것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늙은 오라버니와 황혼에 접어든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될까 두려웠고, 아버지와 그의 여인이 높은 자리에서 냉소를 머금은 채 자신들의 비참한 말로를 지켜볼까 두려웠으며, 망할 구염락이 장서영을 두둔하며 자신들을 괴롭히는 꼴을 다시 보게 될까 두려웠다.

장서전은 동생을 놀라게 했다는 생각에 칼로 마음을 후벼 파는 듯했다. 누이동생을 겁주다니,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오라버니가 잘못했어. 미안해.”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장서열은 힘껏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라버니가 구염락을 괴롭힌 걸 탓할 게 아니었다. 오라버니는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다. 구염락과 혼인하겠다고 나선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오라버니와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냉궁에 보내지는 게 아니라 곧바로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이 오라버니가 다시 그를 때리면 사람이 아니야!”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것보다 누이동생을 달래는 게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울던 장서열은 그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손수건 대신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웃어보였다. 그녀는 격식을 중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그녀에게는 이 시절 부유했던 나날보다 냉궁에서의 슬프고 처량한 기억이 더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장서열은 다소 거칠어 보이는 행동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호방하게 오라버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니야. 오라버니가 때리고 싶으면 언제든지 때려. 이 누이동생이 뒤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줄 테니까.”

장서열은 구염락에게 연고를 가져다주며 몇 번이고 비위를 맞춰주자고 생각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며 장서전도 바보처럼 따라 웃었다. 누이동생의 뜬금없는 반응에도 전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바보야, 이 오라버니가 네 도움을 받을 것 같아? 걱정하지 마. 네가 싫어하면 오라버니도 앞으로는 그를 안 때릴 거야.”

자신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그를 때릴 사람은 널려 있었다.

“그런데 넌 왜 그 애랑 가깝게 지내는 거야? 그 애가 더럽지도 않아?”

“황자를 노비로 부리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데.”

앞으로 오 년만 지나도 그런 기회는 없을 것이다. 장서전이 크게 웃었다.

“역시 내 누이동생은 대단해!”

‘당연히 대단하지. 전생에서 난 유리할 게 없었는데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를 몰아붙였는걸. 하마터면 구염락과 금용 그 계집 사이의 아이까지 죽일 뻔했지.’

장서열은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바보처럼 웃었다. 갑자기 기세등등했던 전생에서의 날들이 떠올랐다. 주도면밀한 구염락까지 제치고 목표를 달성할 뻔했으니, 사람을 해치는 능력만큼은 가히 천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장서열은 도착하자마자 약 상자를 열어 타박상에 바르는 연고를 찾아냈다. 그녀는 구염락의 얼굴과 팔에 든 푸른 멍자국을 떠올렸다. 지금은 봄이었고, 그녀는 이미 얇은 유군(襦裙)을 입고 다녔으나 아직도 구염락은 동상에 걸려 있었다.

장서열이 약상자를 헤집어 놓은 것을 본 농교는 하마터면 손에 든 냉수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놀란 그녀가 서둘러 장서열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가씨, 어디가 안 좋으세요? 노비가 태의를 부르겠어요.”

일찍이 초 마마로부터 아가씨는 귀한 몸이기에 궁에 그녀를 전속으로 돌보는 태의가 있다고 전해 들었던 터였다.

“난 괜찮아.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그래. 동상 연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없는 거지?”

“노비가 찾아드리겠습니다. 부정 타실 수 있으니 만지지 마세요.”

농교는 아가씨가 만지지 못하도록 약상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뒤 상자에 머리를 묻고 재빠르게 뒤적이기 시작했다. 텅 빈 상자와 작고 여윈 농교를 번갈아 보던 장서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바보 같은 것. 네가 다시 나와 함께 혼인한다면 그때는 네게 절사탕(绝嗣汤, 자손을 잉태하지 못하게 하는 탕약)을 먹이지 않으마. 그리고 네게 모든 것을 알려준 뒤 고통스럽게 죽게 하지도 않겠다.’

다음날 이른 아침, 장서열은 탁자 위에 많은 약들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작고 정교한 상자에는 온갖 구슬들이 세밀하게 상감되어 있었다. 십 년 동안 황후 자리에 앉아있던 그녀조차도 동주(东珠, 동북 지역에서 생산한 구슬)가 이렇게 깨질 수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가장자리마다 깨진 동주를 상감해 놓은 상자의 광채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경탄한 장서열이 상자를 들고 감상했다. 통옥석을 조각해 만든 상자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청록이었다. 상자를 열자 금은화(金银花, 인동덩굴의 꽃) 향기가 흘러나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작은 상자 안에는 백색의 약제가 담겨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장서열의 머리를 빗어주던 초 마마가 웃으며 말했다.

“부인께서 보내신 겁니다. 아가씨가 찾지 못한 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부인 것을 보내셨어요. 상처에 바르기만 하면 반 시진 내에 효과를 볼 수 있는 상등품의 약제들이니 이따 문안드릴 때 부인께 꼭 감사인사 드리세요.”

“응.”

비취를 깨서 만든 듯 청아한 녹색 상자와 수정처럼 빛나는 푸른 상자, 피처럼 붉은 마노석 상자와 빙산의 눈을 그대로 옮겨온 듯 새하얀 상자를 보며 장서열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네 개의 상자들은 모두 각각의 매력이 뛰어난 최고의 예술품이었다.

황후가 된 신혼 첫 해에 이러한 상자에 담긴 연지를 선물로 받은 기억이 있었다. 이제 보니 어머니가 보낸 선물이었던 모양이다. 이렇듯 정교한 물건은 대주국에서 오직 어머니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거울처럼 빛나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덮은 장서열은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제 온 희자(戲子, 연극배우)가 극()을 잘 부르더군. 그에게 방을 하나 내어주도록 해.”

그녀는 예인 역시 어머니의 자상한 보살핌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초 마마는 미소 지으며 아가씨가 언제나 침착하게 부인을 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서열의 기분이 좋은 것을 눈치 챈 초 마마가 재차 탐색하듯 말했다.

“아가씨, 어젯밤 노야와 부인께서 언쟁을 벌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선 부인께 문안을 드리고, 그 다음 노야께 문안을 드리러 가는 건 어떠세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언쟁을 벌였다면 당연히 한 자리에서 문안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장서열은 잠시 시기를 따져보았다.

“기 씨는 별채로 갔고?”

“네.”

이건 기 씨를 위한 싸움이었다. 이틀이 채 못 되어 장서영은 어머니가 그립다며 병으로 쓰러지고, 결국 기 씨는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돌아온 기 씨는 장서전을 부추겨 그의 배독(陪读)을 장서양으로 바꾸게 할 것이고, ‘가련한’ 배독이 된 장서양은 궁에 들어가 구염락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고 보살펴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전생에서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얻게 된 이유였다.

‘이번 생은 어림없어.’

장서열이 차분한 얼굴로 손을 들어올렸다. 초 마마가 장서열의 손목에 분홍색 묘안석 팔찌를 채워주었다. 희고 보드라운 피부가 차림새와 잘 어울려 더욱 윤이 났다.

“아가씨는 손이 참 예쁘세요.”

장서열은 부인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눈이 휘둥그레진 초 마마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가씨가 저렇게 답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장서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은방울 같은 웃음에 초 마마가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짓궂으시네요.”

장서열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빼어난 외모를 물려받았다. 과거 그녀는 스스로의 외모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가진 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뒤에야 비로소 외모가 자신의 생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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