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서풍엽은 순간 옆에 있는 구염단신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의 전법(箭法, 활 쏘는 기술)을 과연 태자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눈치 챈 구염단신이 말했다.
“어서 쏘지 않고 무얼 하느냐? 역 사부가 널 몇 번이나 쳐다본 줄 아느냐?”
오늘따라 세자가 이상했다. 갑자기 자신을 노려보는 서풍엽을 보며 구염단신은 혹 연경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서풍엽은 활시위를 당기는 내내 여유와 자신감으로 무장한 장서열의 세 번째 화살을 떠올렸고, 곧 자신의 화살을 명중시키며 자존심을 채웠다.
돌대가리 장서열이 활쏘기 고수일 리가……. 서풍엽이 실소를 터뜨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장서열에 대한 의심으로 서풍엽은 하루 종일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했다. 구석에 있었고, 시선은 항상 앞을 향했다. 그러나 범억아와 사황자가 그녀를 도발해도 못들은 척했고, 태자를 대할 때는 웃어야 할 때와 웃기 싫을 때를 구분하여 행동했다. 서풍엽은 뭔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장서열이 태자에게 매달리는 게 아니었잖아?’
또한 서풍엽은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매우 잘해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구염락이 모르는 문제가 생겨 자신을 쳐다볼 때면 기꺼이 설명을 자처했다. 또한 구염락이 아이들에게 맞아 저녁밥을 떨어뜨렸을 때에도, 그녀는 보란 듯이 그에게 떡 한 조각을 건네고 자리를 떠나 그를 비웃던 아이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었다.
이날, 종일 장서열을 관찰한 서풍엽이 내린 한 가지 결론은 그녀가 이상한 아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구염단신은 서풍엽이 계속해서 장서열을 쳐다보자 종일 참았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을 느꼈다.
서풍엽이 장서열을 지켜보는 동안, 구염단신 역시 하루 종일 서풍엽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초혜전 학생들 중 서풍엽만큼 신중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서풍엽이 온종일 장서열을 쳐다보았다는 사실은 그를 언짢게 했다.
장서열이 미래의 태자비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무례하게 굴다니. 이는 태자인 자신을 우습게 보는 처사였다.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일각(一刻, 15분) 후 산술 수업이 시작될 것이다. 여전히 멍하니 장서열을 바라보는 서풍엽의 모습에 구염단신은 마침내 참고 참았던 화를 터뜨렸다.
“세자, 무얼 보느냐?”
구염단신이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물었다.
“서열 아가씨를 봅니다.”
서풍엽이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구염단신은 속으로 울화통이 터졌지만 그의 신분을 생각해 호통을 치지는 않았다. 다만 더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훗날의 태자비를 무슨 일로 눈여겨보는 게지? 서열이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몸이 대신 전해 주겠다. 아니면 서열이가 네게 잘못한 일이라도 있느냐?”
시선을 거둔 서풍엽이 태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소인이 너무 당돌했던 것 같군요.”
‘훗날의 태자비라. 아마 상부 부인(相府夫人, 장서열의 어머니)께서는 원하지 않으실 텐데요.’
세자가 몸을 낮추는 모습에 구염단신의 말투도 다소 누그러졌다. 서로의 신분을 고려해서라도 그 역시 너무 딱딱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서열이는 평소 성질이 좋지 못하지. 네 기분을 상하게 한 점이 있다면 이 몸이 나중에 따끔하게 타이를 테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미간을 찌푸리며 구염단신을 바라보던 서풍엽의 시선은 이내 평온해졌다. 성지도 없이 약혼자임을 자처하다니, 마음이 적잖이 언짢았으나 어차피 장서열이 반드시 태자비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장 씨 가문과의 혼사를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장서열의 약혼자는 충왕부 세자인 자신이었다.
“어찌 그런 하찮은 일에 마음을 쓰십니까. 태자께서는 종일 등 뒤에 서있는 억아 아가씨도 좀 돌아봐 주시지요.”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두 사람은 불쾌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구염단신은 오늘 보여준 서풍엽의 당돌함에 화가 났다. 서풍엽 역시 구염단신의 애매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서열이 철부지인 건 그렇다 쳐도 태자까지 똑같이 굴다니.’
노골적으로 장서열을 태자비로 낙인찍은 건 일국의 후계자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수업 종료를 알리는 모래시계의 모래가 모두 떨어지자 초혜전에는 떠들썩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일찌감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태감과 궁녀들은 각자의 주인을 맞이했고, 눈치 빠른 이들은 과자나 사탕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가 주인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하인들 역시 문 밖에서 아가씨와 도련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붓을 내려놓고 손목을 주무르던 장서열은 마지막 글자를 쓰려다 멈칫했다.
‘이상하다. 자꾸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혼란한 학생들 속에서 구염락이 기쁜 얼굴로 장서열을 향해 달려왔다. 그는 머리를 숙인 채 그녀의 책상에 놓인 서적과 종이를 공손하게 정리했다. 상을 받은 태감보다도 더 즐거워 보였다.
“누님, 여기요.”
장서열은 갑자기 튀어나온 구염락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쳐다보았다. 잠시 그녀의 입가가 뻣뻣하게 굳었으나 곧이어 원래대로 돌아왔다. 녀석은 아부하려는 듯했고 그냥 받아주면 그만이었다. 훗날 장서열이 괴롭혔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도록 오늘 그녀는 구염락을 몇 번이나 도와주었다.
장서열이 그가 건네주는 물건을 받아들었다. 구염락은 환하게 웃으며 얼른 손을 털고, 팔을 들어 올려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전형적인 태감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조금 전 다잡았던 그녀의 마음이 다시 한번 무너질 뻔했다. 앙상하게 마른 팔뚝과 아첨하며 웃는 얼굴이 그녀를 경직시켰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걸까?’
미래의 영덕대제를 태감으로 부려 보고픈 생각에 장서열의 마음이 조금 설렜다. 제 발로 찾아온 기회를 낭비하기는 싫었다. 돌연 전생에서 그가 자신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떠올리자 장서열은 그의 중요 부위를 제거한 뒤 진짜 태감으로 만들어 평생 노역을 시키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고도 그가 과연 기사회생하여 자신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태감이 된다면 자신의 출셋길 또한 막힐 것이다.
장서열은 싱긋 웃으며 교양있고 우아한 상부의 딸로 돌아왔다. 전생에서 스무 해 동안 냉궁에 갇혀있던 그녀는 그간 뱉어보지 못한 욕이 없었고, 심지어 지나가는 태감을 희롱하는 노래까지 불러봤었다. 비참했던 전생을 떠올리며 결심이 선 그녀는 그가 내민 팔에 손을 올리고 속으로 이를 꽉 물었다.
‘구염락, 네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한편 구염락은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시중을 기꺼이 받아주다니, 기쁘고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누님, 이쪽이에요.”
구염락을 바라보는 장서열의 시선에 죄책감이 일렁거렸다. 장서열은 못난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무서울 게 뭐 있어. 이건 그가 원한 일이야.’
열심히 태감 노릇을 하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진 장서열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달처럼 밝게 웃는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온종일 그녀를 불편하게 했던 바로 그 눈이었다. 그녀는 눈빛을 바꾸며 못 본 척했다. 후에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올 인물과 그녀는 아무런 교집합이 없었다. 하물며 그는 충왕부의 세자였다.
한편 서풍엽은 장서열의 태도에 경악했다.
‘나를 무시하다니?’
달처럼 묘연하던 눈이 재미있다는 듯 반짝 빛났다. 그는 비록 태자만큼 영예롭지는 않으나 그 못지않은 명성을 지닌 것에 자부심이 높았다. 충왕부와 연을 맺고자 하는 아가씨들은 태자비를 꿈꾸는 여인들 못지않게 많았다. 그런 그가 완벽히 무시당한 것이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밖을 향해 나갔다. 장서열이 미처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그녀 곁으로 휙 바람이 일었다. 동시에 그녀의 손을 부축하고 있던 구염락이 쓰러졌다. 종소리처럼 우렁찬 목소리가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네가 뭔데 내 누이동생과 어울려! 네 꿍꿍이를 내가 모를 것 같아? 주제도 모르고 내 동생의 시중을 들려 하다니, 썩 꺼져!”
장서전은 구염락의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온갖 악랄한 욕을 쏟아냈다. 그는 지난 며칠간 누이동생에게 붙어 있는 구염락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누이동생이 좋은 마음으로 감싸주자 감히 염치도 없는 놈이 누이동생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네가 어떤 물건인지 장서전이 모를까. 화근 덩어리 주제에 어디서 감히 귀한 아가씨를 넘봐? 음흉한 놈 같으니.’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늘 그래왔듯 재미난 구경을 감상했고, 지나가던 아이들도 장서전을 거들며 한 마디씩 욕을 던졌다. 그리고 하나둘씩 하인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구염락을 괴롭히는 건 늘상 있는 일이으므로 따로 남아 구경할 가치조차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리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다홍색 대금마갑(对襟马甲, 윗옷의 두 섶이 겹치지 않고 단추로 채우게 되어 있는 중국식 조끼)을 입은 사황자 구염단사는 오만한 얼굴로 목에 건 금목걸이를 흔들며 흠씬 두들겨 맞는 구염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품고 있던 불길이 순간 가라앉는 것 같았다. 감히 장서열의 앞에서 충성심을 보이려 하다니. 저놈은 장서열을 위해 신발 시중을 들 자격조차 없었다.
구염락이 알랑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장서열의 시중을 들 수 있게만 해준다면 자신은 맞아도 좋고 욕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때리고 욕하다 지치면 자연히 놓아줄 것이다. 이는 그가 지난 사 년 동안 궁에서 지내며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태감들 역시 그를 때리다 지치면 나중에는 그를 어린 잡종이라 부르며 욕하면서도, 더러운 게 싫지도 않은지 등을 두드리며 안마를 시켰다.
구염락은 푸른 멍자국이 가득한 얼굴을 치켜들고 웃다가, 이내 장서전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그의 신발을 닦기 시작했다.
“열셋째가 도련님을 수고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도련님께서 직접 손을 쓸 만한 주제가 못되니 스스로 맞겠습니다.”
그는 꾀부리지 않고 한 대 한 대 힘을 실어 자신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구염락은 진심으로 장서열의 시중을 들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맞을 수 있었다.
무리에 섞여있던 서풍엽의 시선이 미간을 찡그린 장서열에게로 향했다. 역시나 그녀는 언짢아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궁금했다. 스스로 거둔 ‘노비’가 맞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열셋째를 진심으로 아껴서일까. 그는 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장 씨 가문의 두 오누이는 확실히 어리석었다. 돌대가리 장서열은 말할 것도 없고, 장서전 역시 뻔뻔하고 어리석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다. 황자인 구염락을 괴롭히는 이들은 장서전을 제외하면 모두가 황실 사람들이었다. 이 사실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눈치 없는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