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저녁 무렵, 충왕부의 세자 서풍엽이 황가학당에서 돌아왔다. 충왕비는 기쁜 마음으로 아들에게 혼담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서열이가 나고 자라는 모습을 이 어미는 다 지켜봤단다. 예쁘고 총명하고 순한 아이지. 내 아들이 이렇게 운이 좋을 줄은 몰랐구나. 어미는 네가 참 자랑스럽다.”
싱글벙글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그녀는 자부심에 우쭐해 있었다.
“이제부터 네 미래의 아내에게 잘 해야 한다. 무조건 그 아이에게 맞춰주고, 우선시하고,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서야 해. 혹여 그 애가 싸우기라도 하면 같이 나서서 싸우고 도와주거라. 네가 내 며느리에게 잘하지 못한다면 이 어미가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점점 더 흥이 오른 충왕비는 쉬지 않고 아들에게 좋은 남편이 되는 방법에 대한 훈계를 계속했다. 미소를 띤 서풍엽은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서풍엽의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어머니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마음속 깊이 새겨지는 듯했다. 그러나 곁에 선 유모는 서풍엽이 남의 말을 건성으로 들을 때 가장 경건한 표정을 짓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충왕비에게 아들의 의견은 중요치 않았다. 무릇 혼사란 부모의 뜻과 중매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 아들의 의견이란 저 밖에 굴러다니는 개똥만큼이나 하찮은 것이었다.
“서열이는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대범하고 울 때 목소리가 우렁찼지. 공국 부인(公国夫人, 조옥언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그 모습이 상야 부인(相爷夫人, 조옥언)의 어릴 적과 꼭 닮았다고 하시더구나. 보고 있으면 정말 사랑스럽지. 그리고 넌 모르겠지만 서열이는 어렸을 때…….”
순간 서풍엽의 머릿속에 거만하고 사나운 장서열의 모습이 지나갔다. 하인을 때리는 모습, 욕하는 모습, 억지를 쓰는 모습… 무례를 일삼는 데 정통한 그녀의 모습을 차례로 떠올리던 서풍엽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는 어머니가 말하는 아이가 대체 어딜 봐서 장서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풍엽은 장서열과 함께 황가학당에서 수학 중이었으나 연령이 달라 접촉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명성은 보통 유명한 게 아니었다.
먼저, 장서열은 이제껏 스승님이 낸 과제를 한 번도 끝마친 적이 없었다. 기사(骑射, 말 타기와 활쏘기) 수업을 듣다 말굽이 일으킨 먼지가 옷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말을 때려죽였으며, 시험을 망친 후 스승님께 괴롭힘을 당했다고 황제께 거짓으로 고하여 결국 그를 대학사에서 파면시킨 적도 있었다. 당시 대학사는 그녀에게 간절히 용서를 빌었지만 그녀는 그런 스승님께 ‘당연한 결과’라고 일침을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품성이 어머니가 말하는 ‘어질고 공손한’ 것이라면, 세상에 공손함이란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미 말 들어!”
충왕비는 분통을 터뜨리며 아들의 머리를 때렸다.
“그렇게 설명했건만 대체 누굴 닮아 이러는 게야? 똑똑히 듣거라. 넌 이번에 이 어미 말을 따라야 해.”
서풍엽은 어머니를 향해 싱긋 웃었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칠거지악을 고루 갖춘 세자비를 맞이하라는 건 장난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화가 난 충왕비는 다시 아들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어리석은 것, 서열이는 아직 어리니 얼마든지 바뀔 수 있잖니. 어쨌든 장 씨 가문 딸이 예쁘다는 것도 사실이고.”
서풍엽은 드디어 어머니가 허심탄회하게 진심을 털어놓는다고 생각했다.
“웃긴 뭘 웃느냐.”
다시 한번 충왕비의 주먹이 아들을 때렸으나, 실눈을 뜬 서풍엽의 눈동자는 더욱 온순하게만 보였다. 그는 7세부터 지난 삼 년 동안 아버지를 보고 배우며 왕부를 이끌 예행연습을 해왔다. 서풍엽은 더 이상 어머니 품안의 효성 지극한 아들이 아닌, 충왕부의 세자였다.
스스로 판단 능력을 갖추게 된 그의 견해로 비추어 볼 때, 장서열의 미래는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주변은 잘못을 바로잡아 줄 사람은커녕 오히려 응석을 받아주고 무한히 총애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끝이 좋지 않을 게 분명했다.
서풍엽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저는 그저 아들을 위해 일찍부터 좋은 혼사를 맺어주시려는 어머니의 안목이 높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 말에 충왕비가 더욱 득의양양해졌다.
“그래, 이 어미는 다 널 위해 이러는 게야.”
서풍엽이 더욱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후부 아가씨와 우승의 딸까지 때린 며느리를 맞는 게 저를 위한 것이라니요. 게다가 그 아이는 이미 공공연한 태자의 약혼녀인데, 대주국이 언제부터 일처다부제였습니까.’
우선 어머니를 진정시킨 서풍엽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에는 돌처럼 엄숙한 이목구비의 윤곽과 강직함이 돋보였다.
서재 중앙에는 맹호하산도(猛虎下山图)가 걸려있었다. 그림 속 호랑이의 흉악한 눈과 날카로운 발톱은 보고 있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거대한 촛불이 서재를 환하게 비추었다. 좌측에 일렬로 늘어선 책장에는 국전가집(国典家集 국가의 법전에 관한 글을 모아 엮은 책)이, 우측 선반에는 반질반질하게 닦아 놓은 장총도검(长枪刀剑)이 놓여 있었다. 서재의 주인이 선호하는 바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평상복을 입은 충왕이 닦고 있던 활을 내려놓았다.
“여봐라.”
충왕은 볼품없는 생김새에 살집이 있는 체구로 평범한 남자의 전형이었다. 역대 충왕부의 조상들 또한 그와 같았다. 만일 용모가 출중한 장소접을 아내로 맞이하지 못했다면 그에게 준수한 외모를 가진 아들은 없었을 것이다.
충왕은 충왕부의 내력을 비껴간 아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이따금씩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먼 훗날 가문의 사당을 찾은 후손들이 호박이 걸린 초상화 사이에서 비취 같은 얼굴을 발견하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그는 조상님께 불경을 표하는 생각은 멈추자고 생각했다.
“네 어미에게 전해 들었나 보구나.”
“네.”
서풍엽은 자리에 앉아 평온한 표정으로 자신 몫의 차를 따랐다.
“아버지께서도 그 혼사에 동의하신 건 아니죠?”
충왕이 대답을 피하며 물었다.
“할아버지께서 지시하신 일은 다 끝냈느냐?”
화제를 돌리는 그의 모습에 서풍엽이 정색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언급을 피하실 정도로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단 말인가?’
부친을 응시하는 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끝냈습니다.”
“다행이구나.”
말을 마친 충왕은 곧바로 다른 활을 꺼내어 계속해 닦았다. 그는 아들의 의혹을 풀어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넌 아직 나이가 어리니 수하가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직접 나서지 않도록 하거라.”
서풍엽이 멈칫했다.
‘정말 연경 제일의 바보와 혼인할 수도 있겠구나.’
제아무리 심지가 곧고 확고하다 해도 그는 이제 겨우 열 살 난 아이일 뿐이었다. 돌대가리 장서열이 제 아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못생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백 번 나았다.
* * *
다음날, 학당에 들어선 서풍엽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모란이 활짝 핀 듯 화려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선이 높이 올라간 연녹색의 긴 치마는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더욱 곱고 예뻐 보이게 했다.
그러나 뒤태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돌대가리에 멍청한 행동을 일삼는 장서열을 가르쳐 억지로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외원(外院)으로 집합! 오늘 아침은 무술 수업이다!”
서풍엽은 태자의 옆에 섰다. 군주와 신하는 유별하나 구염단신은 아직 황제가 아니므로 두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언제나 수업에 열심이었던 서풍엽은 오늘따라 집중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는 구석에 자리한 어떤 그림자 하나가 미래의 아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역 장군이 학생들을 하나씩 지도하는 틈을 타 뒤의 구석 자리를 바라보았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 하나가 휙 소리를 내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버드나무에 꽂혔다. 뒤이어 날아든 두 번째 화살 역시 첫 번째 화살이 꽂힌 지점에 정확하게 꽂혔다.
온몸에 맑은 기운이 넘치는 여자아이가 이건 별 것도 아니라는 듯 손짓하며 고개를 돌렸다. 곁에는 얼굴에 검푸른 멍을 단 채 누더기를 걸친 소년이 있었다. 서풍엽은 입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며 그녀가 소년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았다.
“팔은 안정되어 있어야지 그렇게 떨면 안 돼. 그런데 너 팔이 왜 그래?”
“앗!”
장서열의 말에 구염락이 팔을 움츠렸다. 어젯밤에 물통을 백 개나 짊어진 탓이었다. 오늘 아침에 태감인 소리자(小李子)와 금용이 주물러 줬지만 팔은 점점 더 부어올랐고, 활을 당길 때는 참을 수 없이 아팠다.
“많이 아파?”
장서열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다가 갑자기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들이 널 또 때렸구나!”
그녀는 결판을 내려는 듯 때린 사람을 찾으려 했다. 구염락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으며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아, 아니에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방금 활을 쏘던 그녀의 모습은 어제보다 더욱 구염락을 놀라게 했다. 그는 반드시 실력을 키워 그녀를 기쁘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
“한… 한 발만 더 보여줘요!”
그는 맹렬하게 활을 쏘는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정말 괜찮아?”
그의 팔은 많이 아파보였다. 장서열은 주물러줄까 물어보려다 과한 것 같아 관두었다.
“네, 괜찮아요.”
장서열은 의심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괜찮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녀가 다시 한번 활을 당기고 쏘았다. 화살촉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아가 버드나무에 곧장 박혔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그녀가 다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많이 아프면 잠시 쉬는 게 어때?”
구염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장서열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쏜 화살인데, 어떻게 아까와 같은 자리에 꽂힐 수가 있지?’
한편, 서풍엽은 자신이 손에 활을 쥐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그의 머릿속은 조금 전 장서열이 화살을 쏘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대중없이 쏜 화살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마치 활과 혼연일체가 된 듯 매우 자연스러웠고, 자유자재로 활을 통제하기라도 한 것처럼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그는 장서열이 목표물의 위치를 전혀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한 의심 없이 곧장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가히 역 장군의 실력과 비슷한 경지였다.
‘말도 안 돼! 겨우 일곱 살일 뿐인데, 궁술 감각이 저토록 뛰어나단 말인가?’
서풍엽의 눈이 의혹으로 가득 찼다. 장서열은 계속해서 구염락을 가르치고 있었다.
“열셋째, 몸의 중심을 좀 더 뒤쪽에 두고… 활을 더 팽팽히 당겨. 화살을 쏠 때는 망설이지 마. 시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