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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6)화 (16/449)
  • 제16화

    충왕비는 나이가 서른이 넘은 여인이었다. 황후 다음가는 지위를 가진 그녀에게 용모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온몸을 휘감은 사치스러운 옷과 장신구였다. 황후와 위용을 다툴 정도의 복식은 충왕비 장 씨의 깊은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오전 방문한 내방객으로 인해 그동안 그녀가 힘들게 키워온 자부심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화가 난 충왕비는 입술을 오므린 채 자단화 잎사귀를 힘껏 잡아당기며 아이마냥 성질을 부렸다. 그러나 조옥언의 말을 떠올린 그녀는 이내 다시 으스대며 뾰족한 턱을 높이 치켜세웠다.

    하녀가 주렴을 걷었다. 안으로 들어서려던 충왕은 자단화 앞에서 구겨졌다가 다시 활짝 펴지는 아내의 얼굴을 보며 퍼뜩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조옥언과 무슨 약조를 한 건 아니겠지.’

    충왕의 마음이 불안해진 것은 그가 겁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조옥언의 ‘횡포함’을 잘 알고 있었다. 원수는 반드시 갚고야 마는 그녀의 성격은 보기만 해도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었고, 과거 연경의 모든 이들은 그녀의 성미를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흠흠.”

    충왕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귀여움이 남아있는 앳된 외모와 중후한 왕비의 차림새에서 기이한 조화가 느껴졌다. 마치 아이가 어른을 흉내 내듯 어색한 모양은 보는 이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황급히 고개를 숙인 충왕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여러 해를 보아도 이 모습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가 온 줄 전혀 몰랐다는 듯 충왕비가 입을 열었다.

    “노야?”

    충왕비 장 씨는 자신의 신분을 사랑했고 이를 통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는 더욱 사랑했다. 그녀를 나이 들어 보이게 하는 장중한 왕비복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옷으로, 충왕과 혼인한 날부터 질리는 일 없이 매일같이 입고 있었다. 왕비복과 외모의 부조화를 그녀가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충왕비의 쾌활한 목소리에 충왕은 전신이 오싹해졌다. 부디 조옥언이 자신의 철없고 단순한 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충왕비가 이렇듯 기뻐하는 모습은 불길했다. 조옥언은 충왕비의 정신적 지주였고, 충왕비는 그런 조옥언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조옥언이 자신의 심장을 약으로 쓰려 한다면 충왕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버릴 것이다.

    조옥언이 혼인 이후로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연경 전체가 충왕비와 같은 부녀자로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충왕은 조옥언이 아무 목적 없이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옥언 때문에 기가 차서 뒤로 벌렁 넘어지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부디 그녀가 가장 친한 친구인 충왕비에게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무슨 일인데 그리 기뻐하오?”

    충왕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물었다. 남편의 겉옷을 받아 든 충왕비는 기쁘게 그를 뒤따라 병풍 뒤로 걸어갔다.

    “왕야, 좋은 소식이 있어요!”

    ‘끝장이다.’

    충왕은 질문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의 흥분한 얼굴을 보고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오?”

    단추를 푸는 그의 손이 떨려왔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충왕비가 숭배 가득한 얼굴로 감격하며 말했다.

    “옥언 언니가 딸을 우리 풍엽에게 시집보내고 싶대요! 우리 아들이 언니의 눈에 들다니,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기에 이렇게 운이 좋을까요!”

    마치 아들의 창창한 앞길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기쁜 얼굴이었다. 충왕비가 먼 곳을 응시하며 두 손을 턱 아래 마주잡았다.

    하지만 충왕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충왕부의 세자가 좌상 딸의 남편 노릇을 하게 생겼거늘, 어찌 운이 좋다 하겠는가!’

    그러나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없었던 그는 무어라 대꾸하려던 기세를 이내 연기처럼 수그러뜨렸다. 조옥언의 위압 아래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까지도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와 현격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는 이제 왕야이고 더 이상 조옥언의 하찮은 졸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도 가끔은 조옥언에게 반기를 들고 남자의 위엄을 세우고 싶었다. 예를 들면, ‘조옥언, 그런 식으로 내 아들을 괴롭히지 마!’라고 대꾸를 한다든지 말이다.

    충왕은 설득하듯 말했다.

    “그렇…군. 확실히 운이 좋군. 그런데 본왕이 듣기로 그녀의 딸은 성격이 좀…….”

    충왕비가 하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이 모두 물러가자 충왕비는 곧바로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충왕에게 호통을 쳤다.

    “‘그녀’의 딸이라니요? 그녀가 대체 누구죠? 바로 옥언 언니예요. 감히 언니를 모욕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요! 언니는 당신을 높이 사서 혼담을 넣은 거예요. 당신이 과거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내가 모르는 줄 알아요?”

    “…….”

    “무능력한 당신이 옥언 언니를 아내로 맞이하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 아들까지 옥언 언니의 딸과 혼인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어디 있어요? 이게 먹지 못할 포도를 보고 시다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구요! 아, 난 몰라요. 어차피 혼담은 받아들였어요.”

    충왕은 아내의 타박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 그의 마음이 아무리 단련되었고 수중에 큰 권세를 쥐었다 해도, 또한 대주국을 위해 생사를 몇 번이나 넘나들었다 해도, 그가 어린 시절 조옥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차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부인, 목소리를 낮추시오. 본왕이 그렇게 못난 사람으로 보이오?”

    과거 그는 그렇게 무능력하지 않았다. 단지 조옥언을 둘러싼 주변인들이 너무 출중했을 뿐이었다. 황실을 비롯, 세도가의 자제부터 서북지방을 지키는 대장군까지 모두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녀는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난뱅이 장신성과 혼인했다.

    그리고 스무 해가 지난 지금,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는 충왕비가 여전히 지난날의 행동을 반복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두 사건은 전혀 다른 일이니 혼동해서는 아니 되오.”

    충왕이 모처럼 끈질기게 자신의 의견을 고수했다.

    “그리고 난 이 혼담에 동의할 수 없소. 황제께서 이미 그 아이와 태자와의 혼담을 여러 차례 거론하셨단 말이오. 설사 그 아이가 태자와 혼인하지 않게 된다 해도 그렇소. 당신은 황권에 도전할 셈이오?”

    “옥언 언니의 결정에 반대할 생각을 하다니 당신도 참 많이 컸군요. 황제가 뭐 대수예요? 그 역시 옥언 언니에게 감히 큰소리 칠 수 없다는 데에 나 장소접(庄小蝶) 이름 석 자를 걸겠어요!”

    충왕은 풀이 죽었다. 맞는 말이었다.

    “…천천히 신중하게 생각해 봅시다.”

    “싫어요.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기 전에 지금 당장 아들에게 얘기하고, 이 혼사를 확정 지을 거예요.”

    충왕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인, 급할 것 없잖소. 옥언 누님의 딸은 정말로 성정이 나쁘오. 오늘도 우승의 딸을 때렸다 들었소.”

    어머니의 총명함은 온데간데없이 하필 그 성미만을 닮았으니 화근이 따로 없었다. 그의 말에 충왕비가 두 눈을 반짝였다.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죠. 범 씨 계집은 왜 그랬대요?”

    충왕은 충왕비에게 완전히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만 그녀의 무지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조옥언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자에게 그 딸의 단점을 말하는 건 온 세상을 모욕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번 일은 쉬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조옥언에게 황후 자리를 보상해주고 싶어하는 황제의 마음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만약 조옥언이 태자를 폐하고 다른 황자를 태자로 삼으라고 해도, 황제는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충왕은 조옥언과 연관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집 밖에서의 위엄을 내보이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혼사는 받아들이지 마시오. 아무 데서나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도 말고! 내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겠소.”

    충왕비는 남편이 평소와 달리 성난 목소리로 말하자 더는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그의 시중을 도왔다. 그녀는 선을 지킬 줄 알았다. 평소 충왕은 대부분의 일을 그녀에게 양보했지만 특정 사안만큼은 절대로 선을 넘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조옥언이 아니므로 감히 대주국의 첫 번째 외성왕(外姓王, 황족이 아님에도 왕()의 작위를 받은 자)을 도발할 수 없었다.

    오늘 충왕비가 혼사를 받아들인 이유는 조옥언이 장서열의 혼사에 절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충왕비를 설득하지 못했다면 조옥언은 충왕을 직접 찾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충왕 또한 그녀와 똑같이 조옥언에게 반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충왕은 어떠한 경우에도 냉철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지만 오로지 조옥언 앞에서는 허둥대고 무너졌다. 그런 남편을 충왕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충왕비는 조옥언을 시기하지 않았다. 충왕비 장소접의 집안은 본래 몰락한 가문으로 그녀가 열세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선조의 유산을 모두 팔고 연경에 입성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처음 들어온 건 번화한 연경의 모습이나 하늘을 찌를 듯한 세도가의 위엄이 아닌, 선녀처럼 아름다운 조옥언의 미소였다.

    조옥언은 기마와 활쏘기, 가무시사(歌舞诗词, 춤추고 노래하고 시 짓기)까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게 없었고, 상냥하며 영특했다. 게다가 조국공이 사랑하는 적녀였으니, 연경의 소년들이 앞다투어 조 씨 가문의 아가씨와의 혼인을 꿈꾸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충왕비는 충왕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충왕은 유년 시절 외모와 능력 모든 면에서 조옥언에 견줄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조의 유산을 모두 팔고 연경으로 겨우 입성한 장소접이 많은 이들이 탐내던 서율과 혼인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조옥언의 한 마디 덕분이었다. 그녀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모든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옥언은 다른 아가씨들의 괴롭힘을 받고 있던 장소접에게 말했었다.

    “내가 보기에 장소접은 차분하고 철이 든 아이 같아.”

    그리하여 그녀는 서율의 눈에 들었고, 오늘날 모든 이가 존경해 마지않는 충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조옥언은 혼인을 잘못 하는 바람에 연경 귀족들 사이에서 자취를 감췄고, 위풍당당했던 과거의 모습은 거의 잊혀진 듯했다.

    그러나 충왕비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대주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존귀한 여인은 태후도, 황후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있는 조옥언이야말로 대주국 최고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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