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시중드는 사람을 물린 장서열은 뒤에서 갈아 놓은 먹물을 가져와 책상 오른편 모서리에 두었다. 배독으로 곁에 있던 하인이 능숙하게 먹물을 꺼내놓았다. 이전보다 향이 짙고 좋은 것이었다.
먹물을 적신 호세필(狐尾细, 여우 꼬리털로 만든 붓)을 다시 집어 든 작은 손이 이내 빠른 속도로 글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단정한 해서체로 쓰인 글자들은 빠르게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적힌 내용은 그해 과거 시험에 대한 것으로 글자 하나하나가 주옥같이 날카로웠다. 장서열은 일필휘지로 거침없이 단숨에 써내려갔다.
대전은 많은 학생들로 소란스러웠다. 그 중 맨 뒷줄에 앉은 사황자는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앞쪽에 길게 드리운 연노란빛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두 갈래로 틀어 올린 머리 모양이 또렷했다. 주변에 앉은 형제들에게 눈짓을 보낸 사황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서열, 왜 또 반독을 괴롭힌 거야?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데. 네가 없을 때는 그렇게 불쌍할 일이 없었거든. 반독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걔가 네 걸 빼앗기라도 한 거야? 이를테면 네 오라버니들이라든지?”
말을 마친 사황자가 소리내어 웃었다. 물색 공단으로 만들어진 봄옷을 입고 팔보 모자를 쓴 사황자는 길상(吉祥)을 나타내는 금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예쁘장한 외모와 세련된 차림새가 돋보였다. 그러나 미간에 서려 있는 교만함은 그가 사귀기 어려운 인물임을 알려주었다.
마침 대전에 들어오던 장서전은 누이동생을 괴롭히는 사황자를 발견하고 화를 냈다.
“넷째 전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제 누이동생이 반독을 벌한 것이 대체 전하와 무슨 상관입니까?”
“쯧, 사납기는.”
사황자가 거만하게 말했다. 그는 남을 훈계하는 모비(母妃, 황제의 첩인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자란 아이였다.
“화를 누르지 못하는 서열이의 성격이 장래에 걷잡을 수 없어질까 염려되어 좋은 마음으로 몇 마디 조언해 준 것 뿐인데, 왜 화를 내느냐? 넌 누이동생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훗날 여인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가르칠 마음이 없는 게냐?”
사황자가 비웃자 옆에 있던 소년이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다. 서열이의 사나운 모습에 어찌나 놀랐던지. 그래서야 앞으로 다른 비빈들이 어떻게 태자 전하의 자손을 번성 시킬 수 있겠어!”
순간 책상을 쾅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발끈한 구염단신이 뒤를 돌아보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사황자 구염단사는 코웃음을 쳤지만 더는 태자를 도발할 수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성난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어야 할 장서열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구염단사의 기분은 더욱 언짢아졌다. 장서열은 오늘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러니 장서전 역시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 * *
향긋한 봄의 향기가 화려한 궁 안을 맴돌았다. 위엄과 우아함을 동시에 지닌 금은옥기(金银玉器, 금, 은, 옥으로 만들어진 장식품)가 고풍스러운 아취를 풍기고 있었다. 두 줄로 늘어선 궁녀와 태감들은 전각의 유일한 주인을 정성껏 섬기는 중이었다.
봉잠(봉황 모양을 새긴 큼직한 비녀)을 꽂은 점잖은 여인이 높은 자리에 앉아 마지못해 찻잔을 들어올렸다. 백옥 찻잔과 대비되는 투갑(套甲, 손톱을 보호하기 위해 손가락에 끼우는 고깔모양의 장신구)이 더욱 돋보였다. 흐느끼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참을성 있게 듣고 있던 그녀는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억울함은 본궁도 잘 알고 있다. 여봐라, 폐하께서 하사하신 천운공금(天云贡锦)을 상으로 내려라.”
미색이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용모였으나 존귀함이 배어나오는 평온한 기품은 가히 일국의 황후라 할만 했다.
“황후마마, 소녀는…….”
범억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서럽게 옷자락을 꽉 틀어쥐었다. 그녀는 상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황후라면 자신을 업신여긴 장서열을 두둔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황후가 상냥한 미소를 짓자 따스한 봄바람 같은 기품이 느껴졌다.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태자가 널 서운케 했다는 것을 본궁도 알고 있다. 넌 착한 아이지.”
“…….”
“네가 모친과 함께 입궁하던 날, 본궁은 네 어머니에게 약속했다. 비록 네가 태자의 측비(太子侧妃, 정비인 태자비보다 품계가 한 등급 낮은 첩실)로 내정되었지만 살면서 억울한 일은 절대 없도록 하겠다고 말이야. 그러니 안심하거라. 이번 일은 본궁에게도 나름의 생각이 있다.”
범억아는 황후가 옛일을 언급하자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왠지 자신의 행동이 옹졸하게 느껴졌다. 하찮은 일 하나 때문에 황후께 도움을 청하러 온 자신이 무능력한 사고뭉치로 비쳐질 듯했다. 송구해진 범억아는 황후를 향해 절을 올리며 얼른 말을 바꿨다.
“용서해 주십시오, 황후마마. 경솔한 일을 저지른 소녀는 마마의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돌아가 서열이에게 용서를 빌겠습니다. 소녀가 서열이보다 나이가 많고 신분이 고귀하지 않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요. 신분의 존비귀천을 지키지 않은 소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황후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억아가 갈수록 영특해지는구나. 본디 내린 상은 거둘 수 없는 법이다. 그것으로 봄옷을 몇 벌 지어 입고 태자에게 보여주거라. 이제 생일이 지나면 열 살이 되지? 제법 처녀 태가 나는 것이 점점 예뻐지는구나. 태자뿐만 아니라 본궁도 널 좋아한단다.”
“…….”
“자,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서두르면 두 번째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게다. 시간 날 때 본궁을 보러 오는 것 잊지 말고.”
말을 마친 황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약간 겁을 집어먹은 채로 범억아가 물러가자 황후는 탄식했다.
“하나같이 날 걱정시키는 사람밖에 없구나.”
황후를 시중들던 마마(嬷嬷)가 웃었다.
“억아 아가씨는 아직 어리니 마마께서 신경 써 가르치시면 점차 나아질 겁니다.”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낸 황후는 우아하고 침착하게 입가를 닦았다.
“그러는 수밖에.”
황후는 두 예비 며느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범억아는 지나치게 꾀가 많고, 장서열은 멍청해서 후에 무슨 소란을 피울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범억아를 태자비로, 장 씨 가문의 계집을 측비로 들인다면 미래에 위계질서가 흐트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의 상황이 더 유력했다. 성혼 시기가 오면 측비를 먼저 들일 것이나, 도리상 정비를 들이기 전에 측비가 먼저 회임하게 할 수는 없었다. 황후는 시기가 오면 나이 어린 장 씨 가문의 딸도 함께 측비로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범억아를 태자비로 세운다면 그럭저럭 큰 소란은 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장 씨 가문의 계집을 정비로 고집하고 있었다. 심지어 태자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훗날 범억아가 삿된 마음을 품고 먼저 장자를 낳는다면, 우려하던 분란은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아(如儿)는?”
“여의와 함께 마마의 탕약을 달이고 있습니다.”
“날 걱정시키지 않는 유일한 아이로구나.”
그녀의 조카딸은 심성이 착할 뿐더러 용모 또한 두말할 것 없이 단정했으나 안타깝게도 태자의 눈에 들지 못했다.
* * *
그날 오후, 장 씨 가문의 딸이 범 씨 가문의 딸을 때렸다는 소식이 연경 곳곳에 퍼져나갔다.
―황후가 범 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비단 몇 필을 상으로 내린 걸 보면, 범 씨 가문의 아가씨가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 분명해.
―장 씨 가문 딸은 날이 갈수록 형편없어지는군. 어린 것이 성미가 불같잖아. 그런데도 장 승상은 딸을 그저 보배처럼 아끼고만 있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생각은 무슨. 조국공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신주 모시듯 모시고 사는 사람인걸. 부인을 보살처럼 떠받드니 당연히 부인이 낳은 아들딸도 총애할 수밖에. 내가 보기에 장 승상은 둘도 없는 공처가야.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아직 정식 성지를 내린 건 아니지만 황제께서는 장 씨 가문의 아가씨를 수도 없이 태자비로 언급하셨어. 미래에 국모가 될 사람의 행실이 저 모양이라니, 어쨌든 좋지 않아.
―안 좋기는? 조 씨 가문 아가씨는 아직 그 혼담에 응하지도 않은걸! 딸을 장 승상 같은 사내에게 시집보내면 제 마음대로 하고 살 수 있을 텐데, 뭐 하러 황가의 혼담에 응하겠어.
―그럴 리가, 황제께서 이미 입을 여셨는데.
―자네 뭘 모르는구먼. 황제께서 성지를 내리지 못하는 건 조 씨 가문의 아가씨가 동의하지 않을까 염려해서지. 만일 지금 당장 조 씨 가문의 아가씨가 다른 혼처를 정한다 한들 황제께선 어쩌지 못해.
―거참, 그 조 씨 가문의 아가씨 소리 좀 그만 하게. 그녀는 이제 장 부인(章夫人, 장서열의 어머니)이야. 옛날 그 조국공부의 아가씨가 아니라고. 그러고 보니 장 씨 가문의 딸이 꼭 지난날 조 씨 가문의 아가씨를 보는 듯하군. 차이점이라면… 어린 나이에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이랄까.
* * *
연경 땅에서 광활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코 황실이 으뜸이겠으나, 그 다음 가는 곳으로는 황궁에서 세 길목 떨어진 충왕부를 꼽을 수 있다.
7대를 거쳐 내려온 충왕부는 대주국 시조 황제를 도와 나라의 기초를 닦은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충왕 서율(瑞栗)은 대주국 최초로 황족이 아님에도 왕(王)의 작위를 받은 자였다. 또한 서 씨 가문은 초대 황후를 배출한 집안으로, 그 위신과 명망이 높았으며 황제의 은총이 두터웠다.
두 길목을 가로지른 충왕부의 대문은 가히 그 위세를 짐작케 했다. 매끄럽고 평평한 계단과 두꺼운 편액, 그리고 황궁의 주전(主殿)과 동일한 모양의 아치와 기둥은 충왕부의 높은 명망을 뚜렷이 드러냈다.
7대에 거쳐 400여 년의 명맥을 유지해온 충왕부는 이제 개국무장에서 대주국 문벌귀족의 대표가 되어있었다. 황제의 깊은 신임을 바탕으로 연경 궁정 친위를 통솔하는 ‘일등공’에 봉해진 충 왕야(王爷, 왕 작위를 받은 사람에 대한 존칭)는 연경 팔방의 병권을 손에 쥐고 있었으며, 이름만 들어도 간담을 서늘케 하는 장군이었다. 또한 충왕부는 평소 연회를 즐기지 않는 탓에 이들과 가까이 지내고자 하는 연경 세도가에게 그럴 만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정오 무렵, 눈에 띄지 않는 마차 한 대가 조용히 충왕부 저택으로 들어갔다. 전원(前院)에서 식사를 마친 충왕은 내원(前院)에 방문객이 왔었다는 하인의 보고를 듣고 돌연 눈살을 찌푸렸다.
“조옥언이 왔었다고?”
“그렇습니다. 왕야.”
충왕은 황급히 후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