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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4)화 (14/449)
  • 제14화

    “서열아, 신랑으로 ‘맞이하는’ 게 아니라 네가 시집을 ‘가는’ 거란다.”

    낯이 두꺼운 아이 하나가 그녀의 말을 바로잡아 주었다. 반면 부끄러움을 타는 아이는 수줍어 도망쳐 버렸다. 대담한 아이의 경우 얼굴이 검게 변한 태자를 몰래 쳐다보며 편안히 구경을 계속했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따분한 일이었는지 몸을 돌려 자리를 뜨고 없었다.

    “넌… 넌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

    장서열을 삿대질한 범억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화가 난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욕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순간 태자가 싫어할 거라는 생각에 하지 못했다. 범억아는 그 즉시 손을 거두고는 매우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흐느끼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비에 젖은 배꽃처럼 어여쁜 얼굴이 울음으로 무력한 목소리를 냈다.

    “너… 이상한 소리 마. 태, 태자 전하, 소녀의 잘못이 아니에요…….”

    범억아는 가련하게 태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을 설레게 할 만한 가냘픈 자태였다. 그녀는 억울한 사람처럼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소녀는 그저… 서열이가 열셋째와… 서로 껴안고 있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녀는 ‘껴안고’에 힘을 주며 눈물을 닦았다.

    “서열이는 아직 어리지만 ‘시집간다’는 말을 아는 나이이니 다 큰 아가씨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태자 전하께서 아끼는 몸이니 전하를 위해서라도 더욱 행동을 조심해야지요. 그래서 소녀는 열셋째와 껴안지 말라고… 주의를 준 거예요.”

    그녀가 ‘껴안다’는 단어에 또 한 번 힘을 주었다. 본래 마음이 깊을수록 책임도 엄하게 묻는 법이었다. 범억아는 태자가 장서열의 행동에 동요하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예뻐 봤자지.’

    궁 안에 차고 넘치는 게 미인이었다. 태자도 언젠가는 그녀에게 질릴 날이 올 것이다. 자연히 태자는 장서열의 부정적인 면모를 떠올릴 것이고, 오늘 이 사건은 그녀의 죄목 중 하나가 될 터였다.

    “그런데… 열셋째가 소녀를 노려봤어요.”

    범억아가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는 서열이가 나쁜 뜻을 품은 사람에게 이용당할까 봐 소리쳐 제지한 것뿐이온데… 열셋째의 계략에 훼방을 놓았다는 이유로 소녀에게 악담을 퍼부을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모른 체할까도 생각했으나, 태자 전하께서 평소에 저희들에게 잘해주시는 걸 떠올리니 차마 그럴 수가 없어…….”

    모든 게 태자를 위해서였다는 듯 범억아가 더욱 구슬프게 울었다.

    “순간 화를 참지 못해 그만……. 부디 용서해 주세요, 전하.”

    말을 마친 그녀가 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땅에 쿵쿵 찧었다.

    “용서해 주세요, 태자 전하. 소녀는 결코 다른 마음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서열이를 염려하는 마음에…….”

    주변을 빙 둘러싼 구경꾼들은 키득키득 웃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암투극이었다. 그때, 오 씨 가문의 딸 오취령도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범억아보다도 더 가련하게 울먹였다.

    “전하, 부디 굽어 살펴주세요. 서열이는 아직 철이 없고 예의범절을 몰라 열셋째와 ‘껴안은’ 것입니다.”

    말을 마친 오취령은 장서열의 반응을 기다렸다. 성격상 장서열은 사실을 왜곡한 그녀들에게 분노하여 손을 올릴 게 분명했다. 장서열이 손찌검을 한다면 범억아의 잘못은 묻힐 것이다. 오취령의 흥망성쇠는 범억아의 앞날에 달려 있으므로 그녀가 태자의 미움을 사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따귀는 끝끝내 날아오지 않았다. 의아하여 고개를 든 순간, 돌연 구염락이 뛰쳐나와 꿇어앉았다.

    “태자 전하, 이번 일은 서열 아가씨와 무관합니다. 서열 아가씨가 전하의 미움을 사도록 고의로 꾸며낸 말입니다. 음흉한 말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이를 꽉 깨문 두 여자아이가 구염락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주위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 일이 태자를 놓고 벌어진 여자아이들의 쟁탈전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걸 대놓고 언급한 사람은 구염락이 처음이었다.

    구염단신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여봐라! 구염락을 끌어내고 점심을 굶겨라!”

    괜한 말을 입에 올렸으니 무사할 리 없었다. 게다가 방금 전 장서열이 구염락을 껴안은 것도 사실이었다.

    “너희도 그만 일어나라. 큰일이 난 것도 아닌데 시끄럽게 울 것 없다.”

    여자들끼리의 싸움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고, 장서열 역시 억울할 게 없었다. 구염단신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요량으로 장서열을 끌어당겨 붙잡으려 했으나, 손에 잡힌 건 허공이었다.

    “전하, 열셋째는…….”

    그러나 장서열은 구염락의 간청하는 눈빛에 그를 변호하려던 마음을 꾹꾹 눌렀다. 그는 장서열이 태자의 노여움을 살까 염려하고 있었고, 그녀 역시 그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목표를 달성한 범억아와 오취령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태자가 이것들을 벌하지 않다니.’

    장서열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녀는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태자의 노여움을 살 수는 없었지만 여자아이들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앞으로 걸어 나간 그녀가 높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을 향해 세차게 손바닥을 내리쳤다.

    “맞고 싶어 했으니 바라는 대로 해주마. 그렇지 않으면 계략을 꾸민 너희의 노력에 실례가 아니냐?”

    주변에서 들려오는 비웃음이 더욱 커졌다. 범억아는 살면서 이런 설움을 겪어본 적이 없었으나 장서열보다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증오심을 숨긴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태자 전하, 전 이런 서러움은 감당할 수 없어요……. 송구하오나 소녀는 황후마마께 시시비비를 가려달라 청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범억아가 울음을 터뜨리며 뛰어나갔다.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쥔 오취령이 그 뒤를 급하게 쫓았다.

    “기다리세요, 아가씨!”

    주변의 시선이 다시 장서열에게로 향했다. 나이가 찬 아이는 장 씨 가문의 아가씨 성격이 날이 갈수록 포악해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소한 일도 그냥 넘기지 못하니 장서열은 계속 태자의 총애를 받기는 힘들 것이라고. 어떤 아이는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장서열의 말로를 상상하며 탄식했고, 또 어떤 아이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감상하듯 입을 가리고 비웃었다. 그리고 장서열을 가리켜 못된 본보기라고 험담했다.

    또 다른 아이는 그동안 가장 큰 위협이었던 장서열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가 되었음에 감사했다. 그녀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지금, 기회를 틈 타 자신이 더 큰 총애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는 장서열의 공격이 무섭지 않았고, 결국 빈틈을 공략해 태자에게 깊은 총애를 얻게 되는 건 자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장서열이 태자의 눈에 들었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장서전이 몰려 있는 무리를 힘겹게 뚫고 들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장서전은 누이동생이 태자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누군가의 통통한 손 하나가 그의 어깨에 걸쳐졌다.

    “저런 누이동생을 두시다니 축하드립니다, 서전 형님. 하하하!”

    장서전이 덩달아 함께 웃었다. 그의 누이동생은 당연히 최고였다. 조금 전 울면서 뛰쳐나간 두 아이를 떠올리던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다시 인파를 따라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를 하러 갔다.

    * * *

    구염단신은 장서열을 전각으로 데려왔다. 그는 장서열이 내내 말이 없자 방금 전 일을 걱정하는 줄 알고 웃으며 말했다.

    “염려 마. 어마마마께서는 벌을 내리진 않으실 거야. 그런데 어째서 열셋째랑 함께 있었느냐? 내가 오늘 아침에 매를 쏘아 떨어뜨린 건 봤고?”

    장서열이 침묵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머리가 아파요.”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태자가 자신을 비호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범억아는 우승의 딸이므로 구염단신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에게 벌을 줄 리 없었다.

    웃음을 터뜨린 구염단신이 기분 좋게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새침데기 아가씨, 화났구나.”

    그가 고개를 숙여 애지중지하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 마라. 이 몸의 마음은 네게 있으니.”

    장서열은 가소로운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 말에 감격해 기쁨의 눈물이라도 흘리길 바랐다면 오산이었다. 물론 그의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황권(皇权)을 떠올리면 감격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지만, 그녀는 오늘 구염단신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준수하고 멋진 모습을 보인대도 싫었다.

    장서열은 구염단신의 손을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전각 안으로 향했다.

    “전 아침 수업 준비하러 갈게요.”

    장서열이 부끄러워하는 거라고 생각한 구염단신은 미소 지었다. 허둥지둥 달려오던 여운은 갑자기 멈춘 그림자에 몸을 부딪칠 뻔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그녀는 당황하며 절을 올렸다.

    “전하.”

    여운을 나무라려던 구염단신은 놀란 토끼처럼 겁을 집어먹은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를 잘 모셔라. 또 게으름을 피울 거면 학당에 올 필요 없다.”

    “네, 전하.”

    여운은 태자의 단호한 말에 눈물을 글썽이며 절을 올렸다. 그리고 장서열의 시중을 들기 위해 급히 걸음을 옮겼다.

    대전으로 들어와 장서열의 곁에 선 다음에도 그녀는 서러움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막 종이를 깔고 있던 장서열이 동작을 멈추고 날카롭게 여운을 쳐다보았다.

    “여봐라! 여운을 끌고 나가 벌을 세워라! 내 시중을 드는 게 억울하지 않을 때 다시 들어오라고 해라.”

    놀란 여운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있다 봉변을 당한 꼴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 애처롭게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끌고 나가라니까!”

    여운은 순식간에 끌려나와 문 밖에 서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지나가는 귀족 자제들을 보자 다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나 역시 세가의 딸인데 어째서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 걸까.’

    여운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쉼 없이 흐느꼈다. 스승님의 수업을 들다가 조금 늦게 돌아왔을 뿐인데 어째서 벌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장서열처럼 든든한 가문이 없으므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함께 바깥에 서있던 구염락은 손가락질에 익숙한 듯 노련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여운이 장서열의 반독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오늘 자신에게 상냥했던 장서열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앞에서 울고 있는 가련한 누이 역시 장서열과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울지 마.”

    우는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동정해주지 않았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아가씨가 사람들과 싸우고 괜히 내게 화풀이하지 않았을 거야!”

    말을 마친 여운은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더욱 구슬프게 울었다. 여운이 자신을 혐오하고 있음을 눈치 챈 구염락은 장서열을 생각하며 가졌던 호감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돌아선 그는 스승님의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바르게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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