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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3)화 (13/449)

제13화

구염락은 순간 눈앞의 여자아이가 빛을 발하는 선녀로 보였다. 화려한 복식을 갖춰 입은 그녀도, 그녀가 당긴 활과 쏘아 보낸 화살까지 전부 눈이 부셨다. 화살깃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날아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버드나무에 명중했다. 활을 다루는 능수능란한 기술에 그는 넋이 나가버렸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구염락은 이날을 잊지 못했다.

그는 전율과 동경을 동시에 느꼈다. 그건 그녀가 화려한 옷을 걸쳐서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져서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어린아이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함과 실제로 버드나무를 명중시키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때, 대단하지?”

득의양양해진 장서열이 말했다.

“자, 이걸로 쉬운 거라도 맞혀서 날 즐겁게 해 봐.”

긍지에 찬 작은 얼굴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를 조롱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정말로 화살을 쏠 줄 모르는 구염락의 실력을 통해 그녀의 치기 어린 자존심을 만족시키려는 것 같았다.

구염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장서열이 건네는 활을 응시했다. 은빛 난초 문양이 옅게 새겨진 갈색 화살과 날카로운 빛을 발산하는 활시위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한 것이었다. 기다랗고 깃털이 풍부한 화살이 얌전히 활시위에 꽂혀 있었다.

‘내게 활과 화살을 만지게 해주다니…….’

구염락은 어안이 벙벙했다. 가만히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마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해진 장서열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가져가라니까!”

그저 하찮은 활 하나일 뿐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빼앗아 간 것들을 생각하면 겨우 이까짓 걸로 떠는 그의 모습은 우스웠다. 평소 그가 제 명에 죽지 못하기를 바라며 저주를 퍼붓던 그녀였지만, 그가 처한 상황 때문인지 지금은 조금도 악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활을 받아 든 구염락은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활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활은 이렇게 생겼구나. 손잡이가 곧고 활시위는 예리한 칼 같다.’

여자아이가 쓰는 활이어도 결코 만만치 않은 무게였다.

“쏴 봐!”

장서열의 말에 구염락은 반사적으로 활시위를 당기고 활을 쏘았다. 삐뚤게 날아간 화살은 얼마 못 가 땅에 툭 떨어졌다. 장서열은 깜짝 놀라 얼이 빠졌다.

‘이게… 희대의 신궁 영덕대제? 활시위도 못 당기는 이 아이가……?’

일단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의아한 표정을 거둔 장서열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던 그 용맹한 황제가 활 하나도 제대로 쏘지 못하는 모습은 일순간 그녀를 웃음 짓게 했다. 줄곧 마음에 짙게 깔려있던 안개가 잠시나마 깨끗이 걷히는 듯했다. 역시 인생이란 알 수 없었다.

“열셋째, 활 쏘는 자세가 잘못 됐어.”

장서열은 웃음을 참으며 구염락에게 계속 활을 당겨보라고 손짓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비웃지 않고 사람들을 불러와 놀리지도 않자 그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구염락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던 어제의 그녀를 떠올리며 마음 속 의혹을 키워가고 있었다. 왠지 그녀를 피하는 게 낫겠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었다. 하지만 손에 쥔 활의 감촉은 자꾸만 그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그는 이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구염락의 눈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함정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렇대도 기꺼이 빠져주마.

그는 장서열의 말대로 활시위를 당긴 채 몸을 반쯤 웅크렸다. 양팔을 곧게 편 후 화살촉이 눈앞의 버드나무를 향하도록 겨누었다. 엄숙한 눈빛에 담대한 기세가 어렸다. 물론 실력이 그를 뒷받침 하지는 못할 것이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자세를 찬찬히 살펴보며 그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움직이지 마.”

장서열이 그의 두 손에서 화살을 꺼냈다.

“네게 화살은 아직 일러.”

그런 다음 그의 발을 툭툭 차서 두 다리 사이의 거리를 넓혔다.

“좀 더 넓게.”

이어 몸을 숙인 그녀는 다시 그의 왼쪽 다리를 고쳐 몸이 앞으로 숙여지도록 한 후, 다시 뒤에서 그의 오른쪽 다리를 툭툭 쳤다.

“이렇게. 움직이지 마.”

장서열은 그의 두 팔을 쳐다보았다. 올해 일곱 살이 된 그녀는 비쩍 마른 구염락보다 키가 컸다. 손을 뻗은 거리에서 그를 안을 수 있기에 그녀는 등 뒤에서 손쉽게 그를 에둘렀다. 그녀의 왼손은 그의 왼손 위에, 오른손은 그의 오른손 위에 얹었다.

달콤한 향기와 부드러운 어조에 구염락은 잠시 호흡을 멈췄다. 이제껏 자신을 이렇게 대해준 사람은 없었다.

“맞아, 이렇게. 나를 따라하면서 동작을 고쳐. 힘을 줘서 잡아당기고… 아주 좋아.”

장서열은 그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이제야 제대로 된 자세 같았다. 구염락은 진심으로 웃어보였다. 설령 이 모든 게 더 많은 이들과 자신을 비웃기 위해 한 행동일지라도… 그녀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장서열은 기꺼이 그의 스승님이 되어주었다.

“이렇게요?”

자세를 바로 한 구염락은 마치 주워 온 강아지가 감격해서 쳐다보듯 장서열을 경애해 마지않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기가 찬 그녀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심정이 되었다.

‘어머니 노릇도 아니고…….’

문득 그녀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만약 그녀가 진심을 다해 그를 친동생처럼 보살펴준다면, 그와 혼인할 필요도 없이 ‘황저(皇姐,황제의 누이)’의 지위를 누릴 수도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평생을 유유자적하며 살 수 있었다.

거대한 유혹이 일었다. 지금 감동과 신뢰에 젖은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 잠깐의 고생으로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조정의 분쟁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마음 쓸 일 없는, 진정한 자유가 눈앞에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그의 비천한 시기를 함께한다는 건 그가 감추고자 한 형편없는 모습을 전부 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구염락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녀를 비()로 삼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대로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다면 그녀의 체면을 봐서라도 후에 오라버니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생각에 잠긴 장서열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자 구염락은 또 한 번 사슴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빛나는 그의 눈망울과 앵두처럼 빨간 입술, 그리고 반듯한 이목구비를 보며 별안간 그에게 귀여움을 느꼈다. 얼굴에 남은 푸른 멍 자국만 아니었다면 그는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는 깨끗한 도화지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구염락은 ‘깨끗한’ 도화지가 아닌, 검은 바탕의 화선지 같은 사람이었다. 장서열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게 중요했다.

“자세가 정확해야 목표물을 맞힐 수 있어. 화살이 아무리 빨라도 안정적인 초석이 마련되어 있어야…….”

그때 누군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서열이는 참 한가하네. 도적놈과 대화하는 것도 모자라 껴안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야. 전하께서 보시면 얼마나 상심이 크실까? 일부러 전하를 화나게 하려고 도적놈과 친구가 되려는 거야?”

봄옷으로 한껏 단장한 아이가 나타났다.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에서 여인의 요염함이 느껴졌다. 장서열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몸 자체의 힘이 매우 중요해. 자세는 요령일 뿐이야. 만일 네 팔의 힘이 세다면 자세와 관계없이 적중률이 높아지겠지. 하지만 넌 처음 배우는 거니까 자세를 정확히 해야 해.”

구염락 역시 등 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장서열을 향해 힘주어 말했다.

“앞으로 열심히 단련할 거야.”

이날 이후 실제로 그는 새벽마다 궁 안에 있는 모든 뜰에 물을 나르곤 했다.

한편, 장서열이 그의 말에 대답을 하기가 무섭게 구염락이 바닥에 엎어졌다. 갑작스럽게 기습을 당한 탓이었다.

손수건을 꺼낸 오취령은 쪼그리고 앉아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범억아의 신발을 닦았다.

“억아 언니, 왜 직접 나서요. 신발이 더러워지면 어쩌려고요.”

범억아가 내려다보듯 장서열을 응시했다.

“이 몸이 얘기하는 게 안 들려? 아니면 저 도적놈과 노는 게 네 신분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순간 그녀에게서 몸을 돌린 장서열이 자신에게 걸어오는 그림자를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태자 오라버니, 연습은 끝났나요?”

그러고는 무섭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태자 오라버니, 방금 전 억아 언니는 정말 사나웠어요. 힘이 어찌나 센지 발을 날려 열셋째를 넘어뜨렸어요.”

말을 마친 장서열은 구염단신의 등 뒤에 숨어 범억아를 노려보았다.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는 가운데 태자가 인상을 쓰자 범억아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에요… 전하, 그 말은 사실이 아니고… 소녀는…….”

그제야 오전 수업이 이미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초조해졌다. 태자의 면전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발을 날리는 모습을 보여준 꼴이 되어버렸다.

“전하, 소녀는 아니에요…….”

입술을 삐죽 내민 장서열이 태자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다시는 억아 언니랑 안 놀래요. 너무 사나워요.”

구염단신은 사랑해 마지않는 장서열의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래, 우리 서열이는 억아랑 놀지 마라.”

화가 난 범억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납다니!’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이런 고약한 말을 내뱉다니, 독하기 그지없는 계집이었다. 게다가 태자는 장서열이 그런 헛소리를 지껄여도 그냥 내버려 두고만 있었다.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화가 난 범억아는 씩씩대며 장서열을 가리켰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나운 건 너잖아! 아니, 넌 사나울 뿐만 아니라 이간질로 전하를 기만하고 있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내게 어떻게 그런 험담을 할 수 있지? 네가 염치도 모르고 저 도적놈이랑 껴안고 다닌다는 말은 왜 안 해? 설마 걔한테 시집이라도 가고 싶은 거야?”

‘독설가 납셨군.’

장서열이 되받아쳤다.

“듣기 거북하네요. 시집을 가다뇨? 언니가 매일 전하를 쫓아다녀도 아무도 언니에게 전하께 시집가라고 하지 않으니 공연히 내게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껴안으면 반드시 시집가야 해요?”

뒤돌아선 그녀는 태자 곁에 있던 소년 몇 명을 한 번씩 껴안은 뒤 다시 천진난만하게 돌아섰다. 담황색 치마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활짝 펼쳐졌다가 소리 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장서열이 범억아를 향해 말했다.

“이제 제가 모두를 신랑으로 맞이해야겠네요?”

장서열이 껴안았던 소년들의 얼굴이 동시에 붉게 물들었다. 그 순간 좌상댁 큰아가씨가 성격을 떠나 외모만큼은 독보적으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특히 그녀가 화를 낼 때 더욱 빛을 발하는 맑은 눈빛과 새하얀 얼굴은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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