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12)화 (12/449)

제12화

차비를 마친 장서열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를 본 기 씨는 애써 기쁜 기색을 감추며 자신의 품에서 깊이 잠든 딸을 아들 곁으로 옮겼다. 그녀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 나갔다.

“큰아가씨, 큰아가씨! 서영이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감히 아가씨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해요. 다만 한때 아가씨 시중을 들었던 정을 생각해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노비가 앞으로 아가씨를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초 마마가 눈치 빠르게 시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은 앞으로 덤벼드는 기 씨를 막았다.

“무엄하다! 감히 큰아가씨께 덤벼들다니!”

“그런 게 아닙니다. 노비는 그럴 뜻은 없었어요. 큰아가씨, 서영이가 아직 철이 없어 그런 것이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기 씨는 장서열의 곁에 접근하려고 필사적이었다.

“어서 막지 않고 뭐하는 게냐!”

초 마마가 곁에서 장서열을 비호했다.

“아가씨, 가시지요.”

장서열은 곧장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미 초 마마가 어젯밤에 벌어진 일을 귀띔해준 상태였다.

역시 어머니는 자녀에 관한 일이라면 조그만 의심이라도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전생에서의 그녀는 어머니의 지혜를 눈곱만치도 배우지 못했다.

장서열은 멈추지 않고 그들을 빙 돌아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나 기 씨가 돌연 계집종에게서 벗어나 그녀에게로 덤벼들었다.

“큰아가씨, 제발 용서를……!”

순간 초 마마가 기 씨의 팔을 비틀어 뒤로 밀어냈다.

“감히 어딜!”

“아……!”

기 씨는 계획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아픔이 온몸을 휩쓸었다. 그녀는 아랫배를 감싸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 아파…….”

장서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서열을 밀어낸 뒤 재빨리 기 씨에게로 향했다. 그 소란에 장서영이 잠에서 깨어났다. 기 씨의 얇은 치마가 피로 붉게 물들자 놀란 그녀가 엉엉 울며 기 씨에게 뛰어갔다.

“이랑, 이랑!”

장서열은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초 마마는 일이 재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괜히 아가씨가 놀라기라도 하면 안 되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재빨리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뒤를 돌아본 장서열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미 수도 없이 겪어본 일이었다. 그녀는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이 상황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아이를 셋이나 낳아본 여인이 몸에 태기가 있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분명 손찌검을 당해 아이를 잃은 거라고 우길 셈이었다.

“끌고 나가라. 아버지의 자손도 보중하지 못한 여인이다. 별채로 끌고 나가 혼쭐을 내라!”

기 씨는 분노로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이런 치욕스러운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자손을 보중하지 못했다니? 어린 게 뭘 안다고 지껄여! 세간의 평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게야?’

“아! 내 아이… 내 아이! 노야! 어서 와서 아이를 살려주세요! 노야! 노야!”

기 씨는 장신성을 찾으며 몰래 장서양의 손등을 꼬집었다. 무슨 뜻인지 눈치 챈 장서양이 곧 울음을 터뜨리며 전원(前院)으로 달려나갔다.

“이랑이 죽어가고 있어요! 아버지, 아버지! 이랑에게 큰일이 났습니다!”

소란에 놀란 사람들이 반운루에 몰려들었다. 마당은 걱정과 호기심에 찬 사람들로 가득했다.

초 마마는 바닥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기 씨와 몰려오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일을 키운 것을 후회했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큰아가씨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길 것이다. 장서열의 평판은 이미 충분히 좋지 않았다. 만일 ‘이랑을 유산 시켰다’는 꼬리표가 하나 더 붙게 된다면 그녀에게는 ‘악랄’하다는 평가가 새로 추가될 터였다.

“여봐라! 기 씨를 어서 죽원(竹园)으로 옮겨라!”

“아! 아파! 육 이랑, 나 좀 살려줘! 가서 노야를……!”

“헛소리다, 입을 틀어막아라!”

인파 속에서 장서전이 튀어나왔다. 장서열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시끌벅적한 소동에 그가 빠질 리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장서열이 그를 잡아당겼다.

“오라버니, 어머니께 문안인사 드리러 갈 시간이에요.”

뒤돌아 선 장서열은 어머니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절을 올린 후 달콤하게 웃었다.

“어머니.”

조옥언이 빠르게 답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문안인사는 됐다. 어서 입궁하거라. 돌아와서 저녁에 내게 들르고.”

‘발칙한 것. 만약 이번 일이 내 딸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친다면 가만 두지 않겠다.’

때마침 장서열도 기 씨에게 흥미가 떨어지던 참이었다. 이 정도 사건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구염락에게만 집중하기에도 벅찼다. 그에게만 잘 보이면 누구도 자신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 하찮은 기 씨 한 명쯤이야 원한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아이를 잃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옥언은 미소 짓는 딸과 비명을 지르며 억지로 끌려 나가는 기 씨, 그리고 수군대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거라. 길 조심하고.”

분명 무엇인가 이상했다.

“모여서 뭣들 하는 게냐. 기 씨는 왜 여기 있고? 큰아가씨가 입궁 시간을 놓치기라도 하면 어쩔 것이냐! 피를 보다니, 무엄하다! 노야의 자손을 지키지 못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발을 뗄 때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안도감이 들었다.

* * *

한 무리의 매 떼가 초혜전의 텅 빈 하늘 위를 가로질러 날았다. 키가 들쭉날쭉한 아이들이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준비! 발사!”

수백 개의 화살이 일제히 날아갔다. 어떤 것은 맹렬했고, 어떤 것은 능숙하고 부드러웠다. 고공을 향해 돌진하다 사라지는 화살도 있었다. 초혜전 오전 수업의 시작이었다.

맑은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이 단번에 목표물을 명중 시켰다. 사방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역시 전하의 궁술은 최고십니다.”

“태자 전하는 신궁이십니다. 우리 대주국의 복이에요.”

“태자 오라버니 멋져요!”

오색찬란한 의복을 차려입은 소녀들이 동시에 진심 어린 탄성을 터뜨렸다. 마지막 열에서 장서열의 시중을 들고 있던 여운 역시 화살에 맞아 떨어지는 기러기를 보며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태자 전하의 궁술이 나날이 늘어가네요.”

장서열은 힘없이 날아가다 하강하는 자신의 화살촉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맞히지 못한 화살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았지만 맥없이 툭 떨어진 화살은 파리 한 마리도 맞히지 못했다. 구염단신은 땅에 떨어진 화살을 노려보는 장서열을 찾아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이윽고 독수리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자 구염단신은 장서열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긴장한 얼굴로 궁술 사부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가르침을 주십시오!”

태자와 함께 첫째 줄에 서 있던 학생들 역시 일제히 활과 화살을 거두고 차렷 자세로 공손히 외쳤다.

“사부님! 가르침을 주십시오!”

대주국 북벌대장군 섭궁개(聂夫子)는 궁술에서는 신의 경지에 오른 자였다. 그는 삼백 미터 밖에서 적장을 쏘아 맞혀 대주국 출병 이래 가장 빠른 승리를 기록한 인물이었다. 현재 그는 ‘일등공(一等功)’으로 금군의 궁술을 총괄하는 한편, 황자들에게 말 타기와 활쏘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첫 번째 열에 선 학생들은 섭 장군의 기백에 저항할 수 없었다. 태생부터 호전적인 피가 흘렀지만, 섭 장군 앞에서는 아무리 천방지축인 학생이라도 말 잘 듣는 온순한 토끼가 되곤 했다.

우렁차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초혜전을 가득 메웠다.

“1열! 활시위를 당겨라!”

작은 몸집을 한 열다섯 명의 학생들은 제자리걸음과 함께 활시위를 당겼다. 질서정연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은 제법 전장의 살벌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은 부러움과 찬양의 함성을 보냈다.

장서전은 궁보(弓步, 무술 보법 중 하나)를 디디며 엄숙한 눈빛으로 화살촉 끝의 목표물을 응시했다. 활시위를 당기는 자세에서만큼은 그중 가장 눈부신 성적을 내고 있는 구염단신에게 뒤지지 않았다.

장서열은 구석에서 계속해 활시위를 당기며 연습을 이어갔다. 성실하고 배우기 좋아하는 여운은 이미 앞쪽으로 나가 동경 가득한 두 눈을 깜박이며 남학생들의 연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장서열은 동그란 두 눈을 부릅뜨고 자꾸만 초라하게 떨어지는 화살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면 화살깃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옆에 놓인 화살 하나를 꺼내 햇빛에 비추며 가늘게 뜬 눈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차피 섭궁개는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처럼 장난치는 여학생은 수두룩했다. 그에게는 전장에 나갈 일 없는 계집아이를 가르칠 여유가 없었다.

가늘게 뜬 장서열의 시선 속에 문득 쓸쓸하고 외로운 그림자 하나가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에는 풀뿌리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몸에 걸친 옷은 이리저리 잡아당겨져 엉망진창이었으며 꽃무늬 형태로 기운 옷자락은 진흙이 묻어 더러웠다.

구염락은 울긋불긋 멍 자국이 난 얼굴로 그의 키만 한 활을 품에 꼭 껴안고 있었다. 그러나 활은 부러져 있었고 화살깃은 볼품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히 품에 안은 채였다.

그는 전방에 선 섭궁개를 쳐다보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두려운 듯 얼른 시선을 떼고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바닥에 깐 후, 그 위에 부러진 활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 모습은 가장 소중한 장난감을 대하듯 애틋했지만 한편으로는 무력해 보였다. 이제 그는 얇은 노끈을 꺼내 부러진 활을 고치려 애를 썼다. 괴롭힘을 당한 뒤 지어보이는 비굴한 웃음기마저 사라진 모습이었다.

그때, 누군가 빠르게 달려들어 땅에 놓인 활을 우지끈 밟아 부러뜨렸다. 그리고는 섭궁개의 가르침을 놓칠세라 다시 신속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구염락은 지옥에서 나온 악귀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짓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장서열은 들고 있던 화살을 내려놓았다.

‘저게 활이야?’

아이가 대나무와 버들가지를 엮어 만든 장난감은 한 번 밟으면 으스러졌다. 마치 황자들 사이에 섞여 있지만 황자가 아닌 구염락의 처지 같았다.

쉽게 얻을 수 없는 장난감이 망가졌으니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장서열은 그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의 인내심에 깊은 두려움을 느꼈다. 겨우 다섯 살짜리 아이가 감정을 자유자재로 통제하고 있었다. 바로 그 자제력이 구염락을 황위까지 올려놓았을 것이다.

“내 활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볼래?”

장서열이 구염락을 불렀다. 마치 자신이 한 수 위라는 듯 거만하고 도도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바닥에 망연히 꿇어앉은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난 저기 있는 버드나무를 맞힐 거야.”

고개를 든 구염락은 장서열이 활시위를 당긴 후 다시 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화살은 버드나무를 맞혔지만 힘이 약해 꽂히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