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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9)화 (9/449)
  • 제9화

    “당신이니까 마음이 안 놓이오.”

    장신성이 놀리듯 그녀의 코를 톡톡 건드렸다. 눈 속에 애정이 담겨 있었다.

    “오늘밤 건너가겠소.”

    침대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뛰어난 기교가 떠오르자 장신성의 눈빛이 한층 더 너그러워졌다.

    “영아(影儿, 장서영)에게 계몽을 가르칠 때가 된 것 같소. 여 스승님께 청하려 하오.”

    “부인, 피백(披帛, 비단 겉옷)을 걸치세요.”

    갑작스런 하인의 목소리에 바짝 붙어있던 두 사람이 빠르게 떨어졌다. 두 사람은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되었다.”

    조 씨가 내당(内堂)에서 나오며 답했다. 칠보 연꽃무늬로 장식한 유군(襦裙)을 걸치고, 감청색 공작 꼬리가 활짝 펼쳐진 비녀를 꽂은 그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부시지 않은 데가 없었다. 짙은 남색의 허리띠를 높게 묶어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단아한 자태는 진주와 같아 그 아름다움이 비할 바가 없었다.

    “오늘은 일찍 퇴청하셨습니까?”

    장신성은 순식간에 조 씨에게 매료되었다. 애정은 없었으나 조옥언(赵玉言)은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녀의 손짓과 말투 하나하나에서 세도가의 적녀(嫡女, 정실의 딸)만이 풍길 수 있는 고고함이 느껴졌고, 가만히 있어도 흘러나오는 기품은 사람을 매료시켰다. 다만 위엄이 너무 지나쳐 보이는 게 흠이었다.

    기 씨의 마음이 질투로 욱신거렸다. 고귀한 신분과 뛰어난 미모를 모두 가진 조 씨는 누구와도 혼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자신의 남자인 장신성과 맺어졌단 말인가.

    기 씨는 장신성이 조 씨의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잘난 조 씨는 남편에게 기만당하고 있었다. 기 씨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으려고 애썼다.

    ‘정부인이 뭐 그리 대수인가?’

    장신성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잘난 조옥언을 발아래 짓밟을 수 있다는 사실은 기 씨를 더없이 통쾌하게 했다.

    멍하니 조 씨를 바라보고 있던 장신성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과거에 그녀가 그 아름다운 얼굴로 어떻게 자신을 우롱했는지를 떠올리며 재차 분노했다.

    장신성은 고귀한 신분의 그녀가 어째서 가진 것 하나 없는 자신을 선택했는지 늘 의아했었다. 당시 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와의 혼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장신성은 조 씨와 연인 사이의 일을 발설하지 않을 만큼 하찮고 쉬운 상대였기에 선택된 것뿐이었다.

    첫날밤, 조 씨에게선 피가 비치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 장신성에게 그녀는 예전에 외상을 입은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고, 그를 무지한 사람 취급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다음 날 20만 냥에 달하는 혼수를 보내고 그의 관직이 오르게끔 도와준 이유는 뭐란 말인가. 심지어 그가 첩을 들여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장신성은 다가가 조 씨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식사 시간이 멀었는데 왜 일찍 나왔소.”

    조 씨는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기 충분한 몸짓이었다.

    “병이 난 것도 아니고 몸이 조금 피곤할 뿐이니 많이 걷는 게 좋지요. 하루 종일 고생하셨습니다. 홍촉은 오늘 외숙어르신께서 보내 주신 차를 내오너라.”

    “외숙어르신께서 오셨었소? 어찌 내게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게요.”

    두 사람은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키가 크고 준수한 남자와 단정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만남이었다. 두 사람은 그림처럼 잘 어울렸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레 동경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에 떨어져 서있던 기 씨는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다독였다. 그래야만 눈앞의 상황에 마음을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기 씨와 장신성은 어린 시절부터 가까웠던 사이로, 그가 과거 시험을 보러 가기 전 이미 혼례를 치른 상태였다. 그녀야말로 장신성이 정식으로 맞아들인 정실이자 첫 번째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연경으로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이미 조국공부(赵国公府)의 정식 사위이자 대주국의 4품 관원이 되어 있었다.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생사결단을 내려 했으나, 그녀에게는 감히 조국공부의 딸을 건드릴 만한 힘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본처라는 사실을 숨기고 몸을 낮춰 첩이 되었다.

    기 씨는 측부인(侧夫人)도 못 되었기에 그녀의 아이들 역시 조옥언이 낳은 두 얼간이보다 신분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조 씨의 두 아이를 떠올릴 때면 그녀는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만일 그녀의 첫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오늘날 좌상부의 장자였을 것이고, 모든 부귀영화는 그녀의 것일 터였다.

    * * *

    장서열은 식탁에 앉기 전, 가장 먼저 기 씨에게 시선을 던졌다. 기 씨는 눈썹을 낮게 드리우고 순종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 씨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익숙한 원한의 기운이 금용으로 인해 심란했던 서열의 마음을 기적적으로 달래주었다.

    장서열은 평소처럼 나는 듯이 달려가다 이제야 어머니가 있는 걸 발견한 듯 급히 발걸음을 멈췄다. 이어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머뭇머뭇 어머니께 인사를 올렸다.

    “어머니, 오셨어요.”

    상황을 지켜보던 장신성은 딸을 위로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조 씨는 나무라는 기색 없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배고프지. 어서 상을 차려라.”

    장신성은 당황한 나머지 손을 내밀어 딸을 품에 안는 것도 잊었다.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딸아이를 나무라지도 않다니, 그녀답지 않았다. 조 씨는 명문세가 출신으로 딸의 몸가짐에 매우 기대가 높고 엄격했다. 특히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할 때에는 가혹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 씨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딸아이가 지난 3개월 동안 얌전히 금족령을 지킨 것도 모자라, 지시대로 경서를 백 번이나 베껴 쓴 사실에 드디어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린 딸아이는 또래보다 조금 더 활발한 것뿐이었다. 조 씨는 자신 역시 그 나이 때 어머니의 골치를 썩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너무 조급하게 굴었다고 생각했다. 딸아이가 응석받이로 자라 제멋대로이고 난폭하다는 생각에 그녀는 언제나 딸을 통제하려고 했다. 혹여 딸아이가 큰 소동을 피우거나 후에 남에게 이용당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경서를 백 번이나 베껴 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빨갛게 부어 오른 딸아이의 손목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벌써부터 딸을 고생시킬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는 천천히 하나하나 가르쳐 나가자고 생각했다.

    “왜 그러십니까?”

    장신성의 구겨진 표정을 본 조 씨가 물었다. 딸을 나무라지 않는 모습이 남편에게는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장신성은 아무렇지 않은 척 식탁을 바라보았다.

    “식사합시다.”

    기 씨와 새로 들어온 육 씨가 주모(主母, 첩이 본처를 부르는 말)의 식사 시중을 들 준비를 했다. 장신성이 미간을 찡그렸다.

    “농교는 어디 갔느냐. 아가씨가 식사하는데 왜 시중을 들지 않는 게야.”

    장서전과 기 씨의 세 남매는 담소를 나누며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장서전은 밥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황급히 밥을 욱여넣었다.

    “배고파 죽겠어요.”

    조 씨는 심호흡을 하며 아들에게 훈계하고픈 마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나중에 따로 날을 잡아 외삼촌께 데려가야겠어.’

    장신성은 부인이 심지어 아들까지 나무라지 않자 예상을 벗어난 행동에 초조해졌다. 그가 화풀이하듯 소리쳤다.

    “내 말 안 들리느냐! 아가씨가 직접 반찬을 집어 들게 할 셈이냐!”

    기 씨는 장신성이 화내는 것을 못 본 체했다. 식사 시중을 들 하인은 많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세 자녀를 기쁘게 바라보았다. 신분이 낮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이들은 적자(嫡子, 본처가 낳은 아들), 적녀(嫡女, 본처가 낳은 딸)와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했고, 그들보다 수려하고 품위 있었다.

    장서열은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순박한 두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화나셨어요, 아버지? 농교는 몸이 아파서 쉬라고 했어요.”

    입 안 가득 밥을 오물거리던 장서전이 투덜거렸다.

    “아버지는 편애가 심하세요. 누이동생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없다고 화를 내시다뇨? 저도 시중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아들이 씹고 있던 밥알을 내뿜으며 말하자 결국 참다 못한 조옥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훈계했다.

    “입 다물고 조용히 식사하거라.”

    장서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볼이 메도록 다시 밥을 넣었다. 매일 맞는 야단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너와 누이동생이 비교가 되느냐. 서열이는 연약하잖느냐. 농교가 아프다니 괜히 서열이에게 병을 옮기지 않게 팔아버립시다.”

    끝까지 트집을 잡는 아버지를 보며 장서열은 속으로 냉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화난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더욱 애교 있게 말을 이었다.

    “고정하세요, 아버지. 역시 제 생각을 해주는 건 아버지뿐이에요. 제가 제대로 식사하지 못할까 염려하시니, 그렇다면… 동생 영아에게 시중을 들게 할까요? 영아가 해주면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순간 기 씨가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이제 막 밥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장서영 역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서영의 몸을 감싼 옷감은 현재 연경에서 유행 중인 비단이었으며, 언니인 장서열과 똑같이 두 갈래로 틀어 올린 머리에는 붉은 나비매듭이 묶여 있었다. 언뜻 보면 귀여웠지만 조 씨 옆에 앉은 두 아이 곁에서는 상대적으로 빛을 잃었다.

    조 씨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잠시 딸을 바라보았다. 딸이 애틋한 눈길로 장신성을 간절히 바라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기 씨에게 계속 식사 시중을 들게 했다.

    한편 장신성은 말문이 막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장서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서매(庶妹, 첩 소생의 이복 누이동생)를 향해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탁자를 내리쳤다.

    “뭘 그리 멍청하게 앉아있어? 어서 식사 시중을 들어라.”

    사람들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각자 일에 바쁜 척했다. 큰아가씨 성격이 나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장서영은 허기를 느꼈다. 그녀는 겨우 다섯 살이었고 마찬가지로 기 씨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란 딸이었다. 언니가 밥을 먹으면 자신도 밥을 먹는 게 당연했다.

    ‘언니는 밥을 먹는데, 어째서 나는 시중을 들지?’

    장서영이 억울한 표정으로 장서전과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언니를 나무랄 수 있는 이들은 그들뿐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장서전은 마치 공기처럼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밥을 욱여넣었다. 그에게 누이동생은 오직 장서열 한 명뿐이었다.

    장서열이 더욱 노여워하며 외쳤다.

    “어딜 보는 거야! 내 말이 안 들리느냐? 아버지, 저 아이 좀 보세요. 측은한 마음에 같이 식사를 하게 해줬더니 여기가 정말 자기 자리인 줄 아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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